2010. 1. 25. 20:05
21세기 엄청난 변화 속에서 개인, 기업, 사회 모두가 불확실성의 돌파구로서 창의에 주목하고 있다. 사람이 무언가를 창조한다는 것은 여러가지 것들을 연결하여 새로운 조합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창의적 잠재력이 발현되기 위해서는 다양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과거의 시대 환경적 특성에서 창의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데, 바로 르네상스 시대이다. 당시 급변하는 위기 속에서 창의가 분출될 수 있었던 시대적 원동력은 창의의 기반이 되는 다양성이 넘쳐났다는 점이다. 르네상스 거장들은 이러한 시대 환경에서 오는 기회들을 최대한 활용하여 창의적인 예술 걸작들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이들은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본질에 집중했고, 과거를 재해석하고,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공동의 작업공간 안에서 활발한 상호작용을 하면서 새로운 조합물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로 시대적 환경에서 얻을 수 있는 다양성의 기회를 최대한 살리려는 노력과 이를 새로운 조합으로 표현하기 위한 자유로운 커뮤니케이션이 활발해질수록 창의의 기운이 더 분출될 것이다.
세계 최고의 명화 한 점을 꼽으라면 많은 사람들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실제로 매년 5백만 명 이상의 관람객이 이 그림을 보기 위해 루브르 박물관을 찾고 있다. 그런데 지난해 10월 이 거장이 그린 것으로 보이는 인물화 한 점이 발견돼 세계 고미술계를 떠들썩하게 했다. 모나리자에 맞먹는 이 그림이 최종 진품으로 확인될 경우, 감정가만 1천억 원을 훌쩍 넘어설 것이라 한다. 그런가 하면, 일명 ‘천지창조’라고 알려진, 바티칸에 있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벽화를 직접 올려다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엄청난 걸작에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할 것이다.
이와 같이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로 대표되는 르네상스 예술 대가들의 작품은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날까지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들 거장들은 주제나 표현방식 등에서 기존과는 전혀 다른 접근으로 새로운 감흥을 주고 있기 때문에 창의적이라 평가받고 있다. 물론 어느 시대에나 예술적 천재들은 존재하기 마련인데, 왜 유독 르네상스 시대에 창의적인 거장들이 많았던 것일까? 이 거장들은 예술적 걸작들을 어떻게 창조할 수 있었을까? 이 글에서는 창의성 발현이 두드러졌던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들이 당시의 시대 환경적 기회들을 어떻게 활용하여 창의적 잠재력을 극대화할 수 있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이를 통해 오늘날 최대 화두가 된 ‘창의’에 이르는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Ⅰ. 21세기 최대 화두는‘창의’
21세기 들어 가장 주목 받는 키워드 중 하나가 바로 ‘창의’다. 요즘 일상에서도 각종 매체를 통해 이 단어를 심심찮게 접하게 된다. 개인 수준의 창의적 사고와 학습부터 조직 단위의 창의적 리더십, 창의 인재의 발굴과 육성까지 저마다 창의를 강조하고 있다. 올해 많은 기업들의 신년사나 경영방침에서도 ‘창의’라는 키워드가 쉽게 눈에 띈다. 2006년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의 주제도 ‘창의적 대응(Creative Imperative)’이었다.
이처럼 모두가 창의에 사활을 걸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1990년대 중반 이후 글로벌화가 심화되고 산업간, 영역간 컨버전스가 확대되면서 기존 경쟁의 경계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여기에 하루가 다르게 진화하는 IT기술의 발달로 연결성까지 증대되면서 우리 모두가 엄청난 변화의 속도와 강도에 노출되고 있다. 이렇게 복잡다단해진 세상에서 변화의 방향성마저 예측이 불가능해졌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어떤 하나의 문제도 해결하기가 만만치 않게 되었다. 급변하고 불확실성이 높은 환경에서는 원인을 따져보고 미리 계획을 세운 후 열심히 일하는 것만으로는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효과적이던 방식만을 고수해서는 미래의 생존마저도 보장받기가 어려워졌다. 결국, 기존의 성공 방식 안에서 효율성을 높이는 데에만 몰두하던 개인이며, 기업이며, 국가, 사회 모두가 앞으로의 불확실성을 헤쳐 나갈 돌파구로서 창의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창의성이라 하면, 흔히 예술작품을 떠올리고 모차르트나 피카소 같은 소수의 천재들에 국한된 얘기로 치부해버리곤 한다. 대개 창의성이란 원래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대로라면 창의에 이르는 길은 요원해 보일 뿐이다. 반면에 창의성을 누구나 갖고 있는 잠재력이 발현되는 것으로 본다면, 누구나 창의적인 성과를 낼 수 있다. 그리고 단순히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는 차원을 넘어서, 상상력에 기반하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창의성이라 말할 수 있다. 이런 식이라면 창의성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예술을 넘어 새로운 해결책을 필요로 하는 모든 영역으로 확대될 수 있다.
그렇다고 창의가 아무것도 없던 상태에서 어느 한 순간 섬광처럼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무언가를 창조한다는 것은 저마다 처한 환경적 특성과 타고난 기질, 그리고 살면서 축적된 지식과 경험 등 여러 가지 것들을 연결하여 새로운 조합을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창의는 다양성을 전제조건으로 한다. 따라서 개인마다 내재되어 있는 창의적 기질을 충분히 발휘하도록 하는 제반 조건들을 밝혀내고, 이러한 기회들을 어떻게 활용하여 창조적 결과물로 구현해내는지에 대한 메커니즘을 알아내는 것이 창의에 관한 논의의 핵심이라 하겠다.
Ⅱ. 창의의 기반이 되는 다양성이 넘쳐났던‘르네상스’
창의의 실마리는 과거의 시대 환경적 특성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문예부흥이라 부르는 르네상스 시대이다.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 이탈리아 피렌체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르네상스는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렬한 창의의 기운이 분출했던 역동적인 시기이다. 그 시대에 위대한 예술적 성과가 나타난 것을 평화와 경제적 풍요로움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태평성대라 해서 반드시 창의성이 넘쳐나는 것은 아니며, 실제 역사적 기록을 보더라도 당시의 이탈리아가 좋은 시절만은 아니었다. 1400년대 피렌체는 흑사병의 재앙으로부터 회복 중이었고, 정치세력간 내분으로 갈등과 분열 속에 있었다. 그런 와중에 십자군 전쟁 종결 이후부터 이미 쇠퇴 기미를 보여왔던 로마 카톨릭교회의 분열이 시작되고, 오랜 세월을 지배해오던 절대적인 중세의 가치관과 질서가 붕괴됨을 목격하게 된다. 그야말로 불확실성이 극으로 치닫던 시기였다.
그렇다면 급변하는 위기 속에서 창의가 분출될 수 있었던 시대적 원동력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 핵심은 창의의 기반이 되는 다양성이 넘쳐났다는 점이다. 먼저, 창의에 대한 수준 높은 니즈와 유능한 인재 유입이 크게 늘어났다. 이는 지속적인 경제적 기득권 유지와 교회권 강화의 필요성이 맞물려 피렌체에서 르네상스가 시작된 것과 관련이 깊다. 국제무역의 발달로 유럽 최고의 부호가 된 메디치 가문은 사실상 고리대금업인 은행업을 지속하기 위해 당시 대중과 교회의 비난을 무마시켜야 했다. 때마침 카톨릭 교회의 부흥을 꾀하던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수도원 건축기금 기부의 대가로 메디치가의 중심인물인 코시모에게 면죄부를 제안했다. 이 대타협이 이뤄진 이후 메디치가를 비롯한 이탈리아와 유럽의 명문가들은 자선의 형태로 수많은 건축물을 연이어 짓게 되었고, 이에 따라 건축물을 장식하는 다양한 예술품들의 수요가 급증하게 되었다. 수요가 증가하니 재능 있는 창작자들도 모여들기 마련이었다.
여기에 구성원들의 기질이나 성향이 창의성 발휘에 강력한 촉매제 역할을 했다. 자신이 상처를 입는 것도 불사할 만큼 강렬한 비판정신을 소유하고 있었던 피렌체인들의 기질도 르네상스가 피렌체에서 시작되고 활발했던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비판적이고 개방적인 성향은 정국 안정에는 부적절한 것이었지만, 더 나은 방식을 추구하는데 저항감이 작았기 때문에 새로운 예술에는 적절한 토양이 될 수 있었다.
Ⅲ. 르네상스 거장들의 창의성 발현
그렇다면 르네상스 거장들은 당시의 시대 환경에서 오는 기회들을 어떻게 활용하여 창의성 발현을 극대화할 수 있었을까? 이들은 본질을 추구하고자 하는 내적 열망을 갖고, 과거를 재해석하고, 다양한 분야와 영역을 넘나들며, 공동의 작업공간 안에서 활발한 상호작용을 하면서 새로운 조합물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하나씩 살펴보자(<그림> 참조).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본질에 집중
예측이 어려우며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르네상스 거장들이 사람들의 뇌리에 꽂히는 걸작을 창조할 수 있었던 첫 실마리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인간 내면의 본질에 집중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당시 작품에 대한 다양한 니즈가 늘어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감동하기 위해서는 작품 속의 핵심 메시지가 쉽게 소통되어야 했다. 그렇다고 단순하게 표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진정으로 가치 있는 심오한 내용을 추구하되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는 단순함이어야 했다. 당시 상황에 적용해보면 중세시대까지 이어온 기존의 틀에 질문을 던지고 시대 변화가 요구하는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 필요했다.
르네상스 미술의 아버지로 불리는 거장 마사치오가 1424년 피렌체의 브랑카치 예배당에 그린 프레스코화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의 그림들에서도 종교적 주제는 여전히 유효했지만, 그는 인간 내면의 참된 모습을 파악하여 전달하고자 했다. 일례로 ‘세례를 베푸는 성 베드로’라는 그림에서 성 베드로 앞에서 세례를 받고 있는 남자는 성수를 받아 감동한 것이 아니라 추위로 인해 떨고 있는 모습이다. 중세시대에 절대적인 교회와 신학의 권위에 의해 인간의 존재 이유가 정당화되었던 것과는 사뭇 달라진 모습이다. 이렇게 마사치오로부터 시작된 인간의 내면세계를 추구하려는 르네상스 예술의 본질은 미켈란젤로에 의해 재발견되어 다른 예술가들에게로 이어지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창조 그 자체는 본질이 될 수 없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어느 예술가에게나 창조 과정은 고된 시간이기 때문에, 창의성이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지, 추구할 목표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르네상스 거장들은 인간 본질을 추구한다는 강한 내적 열망을 가지고 있었기에, 끊임없는 도전에 맞서서도 새로운 경지에 오르고자 하는 동기를 스스로 부여해가며 몰입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과거의 독창적인 재해석
‘위대한 예술가들은 훔친다(Great Artists Steal)’라는 영화 제목처럼, 우리가 창조적이라 여기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경험이나 기존의 요소들을 끄집어내어 서로 연결함으로써 새로운 것을 합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르네상스 거장들은 본질적 가치를 창의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고대 로마 문화로 눈길을 돌렸다. 다행히 고대 로마 제국의 본국은 이탈리아이고 수도는 로마였기 때문에,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고대 로마의 축적된 문화적 유산에 대한 접근이 훨씬 용이했다. 일단, 과거를 충분히 접하고 소화해낸 후 이를 재현하는 수준을 넘어, 기존 통념을 뒤집는 독창적인 해석으로 시대를 뛰어넘는 걸작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이 대표적인 예이다. 성서의 ‘다윗과 골리앗’에 등장하는 다윗은 대부분의 중세시대 예술작품에서 골리앗을 물리친 다음 장면과 앳된 소년의 모습으로 묘사되어왔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다윗을 분노에 사로잡힌 청년 거인으로 표현했다. 또한 승리자가 아니라 싸움 직전에 적을 바라보며 긴장을 늦추지 않는 가분수의 나체상을 조각했다. 올려다 봤을 때 한 인간의 비장함과 완벽한 인간 육체의 조형미를 느끼게 한다.
피렌체 제일의 교회인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도 고대를 단순히 복원하거나 모방하기보다는 발상의 전환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10년 이상 로마의 유적을 연구해오던 브루넬레스키는 이 성당의 둥근 지붕을 어떻게 만들까를 고민하던 중 로마 시대 건축물인 판테온을 보고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건축가는 지붕 꼭대기가 열려있는 판테온과 달리, 지붕이 닫힌 채 그 위로 황금색 구리공을 얹혔고 이 하중을 보강하기 위해 이중 구조를 취했다. 이런 식으로 판테온의 지붕 구조를 개조하여 로마 건축의 특색인 질서와 조화를 부활시키면서 새로운 양식의 건축을 창조해낼 수 있었다.
이질적 분야의 응용
다음으로, 르네상스 거장들은 다양한 분야와 영역을 넘나들며 그 교차점에서 통합적인 시각으로 접근했다. 지금이야 예술과 과학을 서로 전혀 다른 별개의 영역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르네상스 시대에는 학문영역은 물론이고 그 어떠한 문화영역도 따로 구별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당시 예술가들은 창의를 구현하는데 필요하다면 생소한 영역이라도 해당 기량을 습득해야 했다. 거장들은 이질적 분야를 피하지 않고 과감하게 맞닥뜨리면서 기존에 자신의 강점과 결합시키고 응용하여 작업 과정에서 부딪히게 되는 난관들을 돌파하는 데 활용했다. 다양한 영역, 분야, 문화 등이 서로 만나는 교차점에서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는, 소위 ‘메디치 효과’ 를 가능케 했던 것이다.
여러 분야를 섭렵하고 통합적으로 활용한 르네상스의 선구자라면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첫째로 꼽을 수 있다. 그는 ‘모나리자’를 그리는 화가이기 이전에 뇌와 인간의 신체를 연구하고 자연 풍경, 빛과 그림자를 연구하는 과학자였으며, 각종 기구와 무기를 개발하는 발명가이자 건축가였다. 이러한 통합적인 지적 활동으로 모나리자 같은 생명력 넘치는 명화를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다빈치의 라이벌이었던 미켈란젤로 또한 마찬가지다.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벽화가 더욱 놀라운 점은 이 대작이 조각가의 손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미켈란젤로는 스스로를 화가가 아닌 조각가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 작품 의뢰를 받았을 때 무척 당황했다고 한다. 천장에 매달려 그려야 했고 석회가 마르기 전에 바로 채색해야 하는 프레스코화를 그려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업을 위해 일종의 계단식 사다리인 비계를 독자적으로 설계했으며, 이미 해부학에 정통한 그는 인체 구조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활용하여 인간의 균형미를 완벽하게 표현함으로써 해부학과 조각을 회화에 접목시킨 창의적 걸작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앞서 언급했던 브루넬레스키가 세계 최대의 벽돌 돔을 창조할 수 있었던 것도 단순히 건축에만 의존하지 않고 디자인과 수학 등을 연결하여 교차적 시각으로 접근했기 때문이다. 당시 유행하던 고딕 스타일에서 벗어나 새로운 양식을 고안해냈지만, 돔의 무게를 견디게 해야 하는 기술적 문제에 부딪혔다. 이때 그는 그간 연구해오던 원근법과 수학적 비율을 활용한 새로운 공법을 창안함으로써 내부 지지대 없이 스스로 지탱할 수 있는 아름다운 돔 구조를 창조해낼 수 있었다.
혼자서는 이룰 수 없는 창의
창의라는 것이 본원적으로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들을 풀어 나가는 과정인 데다가, 당시 몰려드는 다양한 창작 의뢰를 한 개인의 역량만으로 소화하기에는 분명 한계가 있었다. 보다 체계적이고 집합적인 접근이 필요했다. 이를 뒷받침해주기 위해 15, 16세기 이탈리아에는 ‘공방’이 존재했다. 맞춤형 스승과 제자의 도제 시스템으로 운영되었던 이 공동의 작업 공간 안에서 견습생들은 일찌감치 다양한 재료와 모사에 익숙해졌다. 점차 실무 기량을 배우고 영감을 얻어 결국엔 독립된 예술가로 성장해갔다. 또한 주문자의 요구사항부터 이를 작품으로 구현하기 위한 새로운 기법까지 풍부한 정보를 접할 수 있었고, 작품들에 대한 토론이나 평가 등 자유로운 커뮤니케이션이 활발했던 상호작용의 장이었다.
이탈리아어로 공방은 ‘보테가(Bottega)’인데, 이 단어에는 공방이나 작업장 외에 가게라는 의미도 있다. 오늘날 예술가의 개인작업실을 칭하는 ‘아뜰리에’와 달리 누구나 들어올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피렌체인의 기질상 사람들이 그냥 구경만 하는 것이 아니라 거침없는 비판을 퍼부을 수 있는 열린 공간이었다. 더구나 공방은 출신, 성격, 동기 등에서 각양각색의 사람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도제는 서로 다른 관점과 경험을 공유하면서 협력과 동시에 경쟁 관계 속에서 실력을 연마할 수 있었다.
또한 당시의 공방은 회화나 조각은 기본이고 미를 추구하는 일이라면 종류를 가지지 않고 맡는 체제였다. 축제에 쓰이는 깃발, 부인용 장신구, 탁상용 장식품을 만드는 것은 물론이고, 대규모 건축도면을 그리는 일까지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당연히 일하는 방식도 전문 분야별로 나뉘어 있지 않았다. 견습 기간에는 필요하면 무슨 일이든 거들어야 하고, 자연스레 오랜 기간 동안 이런 다양한 역할들을 수행하며 학습할 기회를 제공받았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도 이 필수적 코스를 거쳐 거장으로서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건설적인 긴장 관계
다양한 기회와 시간적 여유만 주어진다고 해서 그것이 자동적으로 창의성과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보다는 라이벌간 치열한 경쟁을 치러내면서 최고의 자리에 등극하겠다는 열망이 만인을 놀라게 만드는 창조를 만들어내었으며, 주문자와 작업자 사이의 건설적인 긴장 관계가 창의에 박차를 가하게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르네상스 예술사는 라이벌들의 역사라 할 만큼 특출 난 인재들간 팽팽한 경쟁의식이 있었기에 또 다른 창의성을 낳을 수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다빈치와 앙숙이었던 것은 물론이고, 라파엘로와도 자존심이 걸린 라이벌 관계였기 때문에 창의에 대한 열의를 더욱 불태울 수 밖에 없었다. 브루넬레스키 역시 조각가 도나텔로, 기베르티와의 숨막히는 대결이 없었다면 피렌체 대성당의 독특한 돔을 창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일찍이 금은 세공사로 성공한 브루넬레스키는 도나텔로가 만든 나무 십자가상에 기품이 없다며 도전장을 내밀어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1401년 피렌체의 세례당 문을 교체하면서 그 위에 새겨 넣을 조각을 위한 대회에서는 기베르티에게 상대가 안되게 지고 말았다. 그러나 이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 로마에서 고대 판테온의 비밀을 연구한 후 다시 피렌체로 돌아와 기베르티를 제치고 위대한 걸작을 창조해낸 것이다.
작품의 주문자와 작업자간의 긴장 관계도 창의적 열정에 불을 붙이는데 한몫 했다. 대표적인 예가 시스티나 천장벽화를 의뢰한 교황 율리우스 2세와 미켈란젤로간 관계이다. 언제나 자신이 조각가로 불리기를 원했던 이 거장에게 이 다혈질의 교황은 든든한 후원자이자, 작품의 주제와 작업 진척까지도 직접 챙기는 깐깐한 주문자였다. 이에 맞서 미켈란젤로는 한때 도망치기도 했지만 결국 자기몰입의 강도를 더 높여 불과 몇 년 만에 이 대작을 완성했다. 애초 요구했던 주제와 달리 ‘심판하는 신’으로 좀더 독창적으로 창조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충돌 속에서 나온 의지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Ⅳ. 21세기 창의에 이르는 길
요즘 가장 창의적인 기업으로 회자되고 있는 애플은 처음부터 개인용 컴퓨터를 상용화하여 보급함으로써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대담한 목표로 출발하였다. 또한 시대변화를 관통하면서 소비자가 원하는 본질적 가치를 추구하려는 노력 속에 기존의 MP3와 휴대폰을 재해석한 아이팟과 아이폰을 내놓을 수 있었다.
창의에 있어서 대표적인 라이벌 기업으로 구글도 빼놓을 수 없다. 구글은 스마트폰과 앱스토어 등 분야의 경계를 가지지 않고 애플과 현재 치열하게 경쟁 중이다. 양사는 지금까지 협력과 동시에 경쟁의 관계 속에서 서로의 창의성에 자극과 발전을 도모해오고 있다. 또한 구글은 놀이 공간이나 문화를 통해 구성원간 누구와도 자연스럽게 아이디어를 나눌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직원들이 일주일에 하루는 무엇이든 상관없이 자신이 좋아하는 다른 일에 사용하게 권장하고 있다. 실제로 이러한 시도는 ‘지메일’이나 ‘구글 알리미(Google Alerts)’와 같은 새로운 서비스의 개발을 가져왔고, 구글 창조력의 중요한 밑바탕이 되고 있다.
오늘날 창의에 이르는 길에 모두들 목말라 있지만, 위와 같이 이미 창의성을 훌륭하게 발휘한 사례들이 존재한다. 더구나 이들이 창의성을 발현한 모습을 보면, 르네상스 시대 예술 거장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시대적 환경에서 얻을 수 있는 다양성의 기회를 최대한 살리려는 노력과 이를 새로운 조합으로 표현하기 위한 자유로운 커뮤니케이션이 활발해질수록 창의의 기운이 더 분출될 것이다.
- LG Business Insight 1077호
과거의 시대 환경적 특성에서 창의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데, 바로 르네상스 시대이다. 당시 급변하는 위기 속에서 창의가 분출될 수 있었던 시대적 원동력은 창의의 기반이 되는 다양성이 넘쳐났다는 점이다. 르네상스 거장들은 이러한 시대 환경에서 오는 기회들을 최대한 활용하여 창의적인 예술 걸작들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이들은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본질에 집중했고, 과거를 재해석하고,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공동의 작업공간 안에서 활발한 상호작용을 하면서 새로운 조합물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로 시대적 환경에서 얻을 수 있는 다양성의 기회를 최대한 살리려는 노력과 이를 새로운 조합으로 표현하기 위한 자유로운 커뮤니케이션이 활발해질수록 창의의 기운이 더 분출될 것이다.
세계 최고의 명화 한 점을 꼽으라면 많은 사람들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실제로 매년 5백만 명 이상의 관람객이 이 그림을 보기 위해 루브르 박물관을 찾고 있다. 그런데 지난해 10월 이 거장이 그린 것으로 보이는 인물화 한 점이 발견돼 세계 고미술계를 떠들썩하게 했다. 모나리자에 맞먹는 이 그림이 최종 진품으로 확인될 경우, 감정가만 1천억 원을 훌쩍 넘어설 것이라 한다. 그런가 하면, 일명 ‘천지창조’라고 알려진, 바티칸에 있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벽화를 직접 올려다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엄청난 걸작에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할 것이다.
이와 같이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로 대표되는 르네상스 예술 대가들의 작품은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날까지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들 거장들은 주제나 표현방식 등에서 기존과는 전혀 다른 접근으로 새로운 감흥을 주고 있기 때문에 창의적이라 평가받고 있다. 물론 어느 시대에나 예술적 천재들은 존재하기 마련인데, 왜 유독 르네상스 시대에 창의적인 거장들이 많았던 것일까? 이 거장들은 예술적 걸작들을 어떻게 창조할 수 있었을까? 이 글에서는 창의성 발현이 두드러졌던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들이 당시의 시대 환경적 기회들을 어떻게 활용하여 창의적 잠재력을 극대화할 수 있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이를 통해 오늘날 최대 화두가 된 ‘창의’에 이르는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Ⅰ. 21세기 최대 화두는‘창의’
21세기 들어 가장 주목 받는 키워드 중 하나가 바로 ‘창의’다. 요즘 일상에서도 각종 매체를 통해 이 단어를 심심찮게 접하게 된다. 개인 수준의 창의적 사고와 학습부터 조직 단위의 창의적 리더십, 창의 인재의 발굴과 육성까지 저마다 창의를 강조하고 있다. 올해 많은 기업들의 신년사나 경영방침에서도 ‘창의’라는 키워드가 쉽게 눈에 띈다. 2006년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의 주제도 ‘창의적 대응(Creative Imperative)’이었다.
이처럼 모두가 창의에 사활을 걸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1990년대 중반 이후 글로벌화가 심화되고 산업간, 영역간 컨버전스가 확대되면서 기존 경쟁의 경계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여기에 하루가 다르게 진화하는 IT기술의 발달로 연결성까지 증대되면서 우리 모두가 엄청난 변화의 속도와 강도에 노출되고 있다. 이렇게 복잡다단해진 세상에서 변화의 방향성마저 예측이 불가능해졌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어떤 하나의 문제도 해결하기가 만만치 않게 되었다. 급변하고 불확실성이 높은 환경에서는 원인을 따져보고 미리 계획을 세운 후 열심히 일하는 것만으로는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효과적이던 방식만을 고수해서는 미래의 생존마저도 보장받기가 어려워졌다. 결국, 기존의 성공 방식 안에서 효율성을 높이는 데에만 몰두하던 개인이며, 기업이며, 국가, 사회 모두가 앞으로의 불확실성을 헤쳐 나갈 돌파구로서 창의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창의성이라 하면, 흔히 예술작품을 떠올리고 모차르트나 피카소 같은 소수의 천재들에 국한된 얘기로 치부해버리곤 한다. 대개 창의성이란 원래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대로라면 창의에 이르는 길은 요원해 보일 뿐이다. 반면에 창의성을 누구나 갖고 있는 잠재력이 발현되는 것으로 본다면, 누구나 창의적인 성과를 낼 수 있다. 그리고 단순히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는 차원을 넘어서, 상상력에 기반하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창의성이라 말할 수 있다. 이런 식이라면 창의성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예술을 넘어 새로운 해결책을 필요로 하는 모든 영역으로 확대될 수 있다.
그렇다고 창의가 아무것도 없던 상태에서 어느 한 순간 섬광처럼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무언가를 창조한다는 것은 저마다 처한 환경적 특성과 타고난 기질, 그리고 살면서 축적된 지식과 경험 등 여러 가지 것들을 연결하여 새로운 조합을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창의는 다양성을 전제조건으로 한다. 따라서 개인마다 내재되어 있는 창의적 기질을 충분히 발휘하도록 하는 제반 조건들을 밝혀내고, 이러한 기회들을 어떻게 활용하여 창조적 결과물로 구현해내는지에 대한 메커니즘을 알아내는 것이 창의에 관한 논의의 핵심이라 하겠다.
Ⅱ. 창의의 기반이 되는 다양성이 넘쳐났던‘르네상스’
창의의 실마리는 과거의 시대 환경적 특성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문예부흥이라 부르는 르네상스 시대이다.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 이탈리아 피렌체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르네상스는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렬한 창의의 기운이 분출했던 역동적인 시기이다. 그 시대에 위대한 예술적 성과가 나타난 것을 평화와 경제적 풍요로움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태평성대라 해서 반드시 창의성이 넘쳐나는 것은 아니며, 실제 역사적 기록을 보더라도 당시의 이탈리아가 좋은 시절만은 아니었다. 1400년대 피렌체는 흑사병의 재앙으로부터 회복 중이었고, 정치세력간 내분으로 갈등과 분열 속에 있었다. 그런 와중에 십자군 전쟁 종결 이후부터 이미 쇠퇴 기미를 보여왔던 로마 카톨릭교회의 분열이 시작되고, 오랜 세월을 지배해오던 절대적인 중세의 가치관과 질서가 붕괴됨을 목격하게 된다. 그야말로 불확실성이 극으로 치닫던 시기였다.
그렇다면 급변하는 위기 속에서 창의가 분출될 수 있었던 시대적 원동력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 핵심은 창의의 기반이 되는 다양성이 넘쳐났다는 점이다. 먼저, 창의에 대한 수준 높은 니즈와 유능한 인재 유입이 크게 늘어났다. 이는 지속적인 경제적 기득권 유지와 교회권 강화의 필요성이 맞물려 피렌체에서 르네상스가 시작된 것과 관련이 깊다. 국제무역의 발달로 유럽 최고의 부호가 된 메디치 가문은 사실상 고리대금업인 은행업을 지속하기 위해 당시 대중과 교회의 비난을 무마시켜야 했다. 때마침 카톨릭 교회의 부흥을 꾀하던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수도원 건축기금 기부의 대가로 메디치가의 중심인물인 코시모에게 면죄부를 제안했다. 이 대타협이 이뤄진 이후 메디치가를 비롯한 이탈리아와 유럽의 명문가들은 자선의 형태로 수많은 건축물을 연이어 짓게 되었고, 이에 따라 건축물을 장식하는 다양한 예술품들의 수요가 급증하게 되었다. 수요가 증가하니 재능 있는 창작자들도 모여들기 마련이었다.
여기에 구성원들의 기질이나 성향이 창의성 발휘에 강력한 촉매제 역할을 했다. 자신이 상처를 입는 것도 불사할 만큼 강렬한 비판정신을 소유하고 있었던 피렌체인들의 기질도 르네상스가 피렌체에서 시작되고 활발했던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비판적이고 개방적인 성향은 정국 안정에는 부적절한 것이었지만, 더 나은 방식을 추구하는데 저항감이 작았기 때문에 새로운 예술에는 적절한 토양이 될 수 있었다.
Ⅲ. 르네상스 거장들의 창의성 발현
그렇다면 르네상스 거장들은 당시의 시대 환경에서 오는 기회들을 어떻게 활용하여 창의성 발현을 극대화할 수 있었을까? 이들은 본질을 추구하고자 하는 내적 열망을 갖고, 과거를 재해석하고, 다양한 분야와 영역을 넘나들며, 공동의 작업공간 안에서 활발한 상호작용을 하면서 새로운 조합물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하나씩 살펴보자(<그림> 참조).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본질에 집중
예측이 어려우며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르네상스 거장들이 사람들의 뇌리에 꽂히는 걸작을 창조할 수 있었던 첫 실마리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인간 내면의 본질에 집중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당시 작품에 대한 다양한 니즈가 늘어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감동하기 위해서는 작품 속의 핵심 메시지가 쉽게 소통되어야 했다. 그렇다고 단순하게 표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진정으로 가치 있는 심오한 내용을 추구하되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는 단순함이어야 했다. 당시 상황에 적용해보면 중세시대까지 이어온 기존의 틀에 질문을 던지고 시대 변화가 요구하는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 필요했다.
르네상스 미술의 아버지로 불리는 거장 마사치오가 1424년 피렌체의 브랑카치 예배당에 그린 프레스코화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의 그림들에서도 종교적 주제는 여전히 유효했지만, 그는 인간 내면의 참된 모습을 파악하여 전달하고자 했다. 일례로 ‘세례를 베푸는 성 베드로’라는 그림에서 성 베드로 앞에서 세례를 받고 있는 남자는 성수를 받아 감동한 것이 아니라 추위로 인해 떨고 있는 모습이다. 중세시대에 절대적인 교회와 신학의 권위에 의해 인간의 존재 이유가 정당화되었던 것과는 사뭇 달라진 모습이다. 이렇게 마사치오로부터 시작된 인간의 내면세계를 추구하려는 르네상스 예술의 본질은 미켈란젤로에 의해 재발견되어 다른 예술가들에게로 이어지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창조 그 자체는 본질이 될 수 없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어느 예술가에게나 창조 과정은 고된 시간이기 때문에, 창의성이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지, 추구할 목표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르네상스 거장들은 인간 본질을 추구한다는 강한 내적 열망을 가지고 있었기에, 끊임없는 도전에 맞서서도 새로운 경지에 오르고자 하는 동기를 스스로 부여해가며 몰입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과거의 독창적인 재해석
‘위대한 예술가들은 훔친다(Great Artists Steal)’라는 영화 제목처럼, 우리가 창조적이라 여기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경험이나 기존의 요소들을 끄집어내어 서로 연결함으로써 새로운 것을 합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르네상스 거장들은 본질적 가치를 창의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고대 로마 문화로 눈길을 돌렸다. 다행히 고대 로마 제국의 본국은 이탈리아이고 수도는 로마였기 때문에,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고대 로마의 축적된 문화적 유산에 대한 접근이 훨씬 용이했다. 일단, 과거를 충분히 접하고 소화해낸 후 이를 재현하는 수준을 넘어, 기존 통념을 뒤집는 독창적인 해석으로 시대를 뛰어넘는 걸작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이 대표적인 예이다. 성서의 ‘다윗과 골리앗’에 등장하는 다윗은 대부분의 중세시대 예술작품에서 골리앗을 물리친 다음 장면과 앳된 소년의 모습으로 묘사되어왔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다윗을 분노에 사로잡힌 청년 거인으로 표현했다. 또한 승리자가 아니라 싸움 직전에 적을 바라보며 긴장을 늦추지 않는 가분수의 나체상을 조각했다. 올려다 봤을 때 한 인간의 비장함과 완벽한 인간 육체의 조형미를 느끼게 한다.
피렌체 제일의 교회인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도 고대를 단순히 복원하거나 모방하기보다는 발상의 전환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10년 이상 로마의 유적을 연구해오던 브루넬레스키는 이 성당의 둥근 지붕을 어떻게 만들까를 고민하던 중 로마 시대 건축물인 판테온을 보고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건축가는 지붕 꼭대기가 열려있는 판테온과 달리, 지붕이 닫힌 채 그 위로 황금색 구리공을 얹혔고 이 하중을 보강하기 위해 이중 구조를 취했다. 이런 식으로 판테온의 지붕 구조를 개조하여 로마 건축의 특색인 질서와 조화를 부활시키면서 새로운 양식의 건축을 창조해낼 수 있었다.
이질적 분야의 응용
다음으로, 르네상스 거장들은 다양한 분야와 영역을 넘나들며 그 교차점에서 통합적인 시각으로 접근했다. 지금이야 예술과 과학을 서로 전혀 다른 별개의 영역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르네상스 시대에는 학문영역은 물론이고 그 어떠한 문화영역도 따로 구별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당시 예술가들은 창의를 구현하는데 필요하다면 생소한 영역이라도 해당 기량을 습득해야 했다. 거장들은 이질적 분야를 피하지 않고 과감하게 맞닥뜨리면서 기존에 자신의 강점과 결합시키고 응용하여 작업 과정에서 부딪히게 되는 난관들을 돌파하는 데 활용했다. 다양한 영역, 분야, 문화 등이 서로 만나는 교차점에서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는, 소위 ‘메디치 효과’ 를 가능케 했던 것이다.
여러 분야를 섭렵하고 통합적으로 활용한 르네상스의 선구자라면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첫째로 꼽을 수 있다. 그는 ‘모나리자’를 그리는 화가이기 이전에 뇌와 인간의 신체를 연구하고 자연 풍경, 빛과 그림자를 연구하는 과학자였으며, 각종 기구와 무기를 개발하는 발명가이자 건축가였다. 이러한 통합적인 지적 활동으로 모나리자 같은 생명력 넘치는 명화를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다빈치의 라이벌이었던 미켈란젤로 또한 마찬가지다.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벽화가 더욱 놀라운 점은 이 대작이 조각가의 손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미켈란젤로는 스스로를 화가가 아닌 조각가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 작품 의뢰를 받았을 때 무척 당황했다고 한다. 천장에 매달려 그려야 했고 석회가 마르기 전에 바로 채색해야 하는 프레스코화를 그려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업을 위해 일종의 계단식 사다리인 비계를 독자적으로 설계했으며, 이미 해부학에 정통한 그는 인체 구조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활용하여 인간의 균형미를 완벽하게 표현함으로써 해부학과 조각을 회화에 접목시킨 창의적 걸작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앞서 언급했던 브루넬레스키가 세계 최대의 벽돌 돔을 창조할 수 있었던 것도 단순히 건축에만 의존하지 않고 디자인과 수학 등을 연결하여 교차적 시각으로 접근했기 때문이다. 당시 유행하던 고딕 스타일에서 벗어나 새로운 양식을 고안해냈지만, 돔의 무게를 견디게 해야 하는 기술적 문제에 부딪혔다. 이때 그는 그간 연구해오던 원근법과 수학적 비율을 활용한 새로운 공법을 창안함으로써 내부 지지대 없이 스스로 지탱할 수 있는 아름다운 돔 구조를 창조해낼 수 있었다.
혼자서는 이룰 수 없는 창의
창의라는 것이 본원적으로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들을 풀어 나가는 과정인 데다가, 당시 몰려드는 다양한 창작 의뢰를 한 개인의 역량만으로 소화하기에는 분명 한계가 있었다. 보다 체계적이고 집합적인 접근이 필요했다. 이를 뒷받침해주기 위해 15, 16세기 이탈리아에는 ‘공방’이 존재했다. 맞춤형 스승과 제자의 도제 시스템으로 운영되었던 이 공동의 작업 공간 안에서 견습생들은 일찌감치 다양한 재료와 모사에 익숙해졌다. 점차 실무 기량을 배우고 영감을 얻어 결국엔 독립된 예술가로 성장해갔다. 또한 주문자의 요구사항부터 이를 작품으로 구현하기 위한 새로운 기법까지 풍부한 정보를 접할 수 있었고, 작품들에 대한 토론이나 평가 등 자유로운 커뮤니케이션이 활발했던 상호작용의 장이었다.
이탈리아어로 공방은 ‘보테가(Bottega)’인데, 이 단어에는 공방이나 작업장 외에 가게라는 의미도 있다. 오늘날 예술가의 개인작업실을 칭하는 ‘아뜰리에’와 달리 누구나 들어올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피렌체인의 기질상 사람들이 그냥 구경만 하는 것이 아니라 거침없는 비판을 퍼부을 수 있는 열린 공간이었다. 더구나 공방은 출신, 성격, 동기 등에서 각양각색의 사람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도제는 서로 다른 관점과 경험을 공유하면서 협력과 동시에 경쟁 관계 속에서 실력을 연마할 수 있었다.
또한 당시의 공방은 회화나 조각은 기본이고 미를 추구하는 일이라면 종류를 가지지 않고 맡는 체제였다. 축제에 쓰이는 깃발, 부인용 장신구, 탁상용 장식품을 만드는 것은 물론이고, 대규모 건축도면을 그리는 일까지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당연히 일하는 방식도 전문 분야별로 나뉘어 있지 않았다. 견습 기간에는 필요하면 무슨 일이든 거들어야 하고, 자연스레 오랜 기간 동안 이런 다양한 역할들을 수행하며 학습할 기회를 제공받았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도 이 필수적 코스를 거쳐 거장으로서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건설적인 긴장 관계
다양한 기회와 시간적 여유만 주어진다고 해서 그것이 자동적으로 창의성과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보다는 라이벌간 치열한 경쟁을 치러내면서 최고의 자리에 등극하겠다는 열망이 만인을 놀라게 만드는 창조를 만들어내었으며, 주문자와 작업자 사이의 건설적인 긴장 관계가 창의에 박차를 가하게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르네상스 예술사는 라이벌들의 역사라 할 만큼 특출 난 인재들간 팽팽한 경쟁의식이 있었기에 또 다른 창의성을 낳을 수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다빈치와 앙숙이었던 것은 물론이고, 라파엘로와도 자존심이 걸린 라이벌 관계였기 때문에 창의에 대한 열의를 더욱 불태울 수 밖에 없었다. 브루넬레스키 역시 조각가 도나텔로, 기베르티와의 숨막히는 대결이 없었다면 피렌체 대성당의 독특한 돔을 창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일찍이 금은 세공사로 성공한 브루넬레스키는 도나텔로가 만든 나무 십자가상에 기품이 없다며 도전장을 내밀어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1401년 피렌체의 세례당 문을 교체하면서 그 위에 새겨 넣을 조각을 위한 대회에서는 기베르티에게 상대가 안되게 지고 말았다. 그러나 이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 로마에서 고대 판테온의 비밀을 연구한 후 다시 피렌체로 돌아와 기베르티를 제치고 위대한 걸작을 창조해낸 것이다.
작품의 주문자와 작업자간의 긴장 관계도 창의적 열정에 불을 붙이는데 한몫 했다. 대표적인 예가 시스티나 천장벽화를 의뢰한 교황 율리우스 2세와 미켈란젤로간 관계이다. 언제나 자신이 조각가로 불리기를 원했던 이 거장에게 이 다혈질의 교황은 든든한 후원자이자, 작품의 주제와 작업 진척까지도 직접 챙기는 깐깐한 주문자였다. 이에 맞서 미켈란젤로는 한때 도망치기도 했지만 결국 자기몰입의 강도를 더 높여 불과 몇 년 만에 이 대작을 완성했다. 애초 요구했던 주제와 달리 ‘심판하는 신’으로 좀더 독창적으로 창조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충돌 속에서 나온 의지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Ⅳ. 21세기 창의에 이르는 길
요즘 가장 창의적인 기업으로 회자되고 있는 애플은 처음부터 개인용 컴퓨터를 상용화하여 보급함으로써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대담한 목표로 출발하였다. 또한 시대변화를 관통하면서 소비자가 원하는 본질적 가치를 추구하려는 노력 속에 기존의 MP3와 휴대폰을 재해석한 아이팟과 아이폰을 내놓을 수 있었다.
창의에 있어서 대표적인 라이벌 기업으로 구글도 빼놓을 수 없다. 구글은 스마트폰과 앱스토어 등 분야의 경계를 가지지 않고 애플과 현재 치열하게 경쟁 중이다. 양사는 지금까지 협력과 동시에 경쟁의 관계 속에서 서로의 창의성에 자극과 발전을 도모해오고 있다. 또한 구글은 놀이 공간이나 문화를 통해 구성원간 누구와도 자연스럽게 아이디어를 나눌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직원들이 일주일에 하루는 무엇이든 상관없이 자신이 좋아하는 다른 일에 사용하게 권장하고 있다. 실제로 이러한 시도는 ‘지메일’이나 ‘구글 알리미(Google Alerts)’와 같은 새로운 서비스의 개발을 가져왔고, 구글 창조력의 중요한 밑바탕이 되고 있다.
오늘날 창의에 이르는 길에 모두들 목말라 있지만, 위와 같이 이미 창의성을 훌륭하게 발휘한 사례들이 존재한다. 더구나 이들이 창의성을 발현한 모습을 보면, 르네상스 시대 예술 거장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시대적 환경에서 얻을 수 있는 다양성의 기회를 최대한 살리려는 노력과 이를 새로운 조합으로 표현하기 위한 자유로운 커뮤니케이션이 활발해질수록 창의의 기운이 더 분출될 것이다.
- LG Business Insight 10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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