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0. 18. 14:20
스피드는 점점 빨라지는 세상에서 기업의 가장 중요한 경쟁 요소 중
하나이다. 그러나 조직의 미래에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들은 서둘러서는 잘 안 되는 경우도 많다. 스피드 경영의 진가는 유연한 속도의 완급조절로
일방적인 속도 추구의 부작용을 막아주는 슬로우 리더십에 의해 더 잘 발휘될 수 있다.
세상은 점점 빨라지고 있다. 우리는 매일 퀵서비스, 초고속 인터넷과 같은 속도 경쟁 서비스에 둘러 싸여 생활한다. 점점 빨라지는 현상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전 세계적으로 공통적이다. 영국 런던 번화가에서 수십 년간 진행된 관찰 결과 사람들의 걷는 속도가 지속적으로 빨라지고 있음이 밝혀졌다. 패스트푸드의 본고장 미국에서는 자동차 운전석에 앉은 채로 음식을 주문하여 받아가고 현금지급기를 이용할 수 있는 Drive-through 서비스가 장례식 조문에까지 등장할 정도이다.
세계 경제 포럼 창설자 클라우스 슈바프는 현대를 일컬어 ‘빠른 것이 느린 것을 잡아 먹는 시대’라 정의하였다. 현대 비즈니스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품질 좋고 값싼 제품과 서비스를 누가 더 ‘빨리’ 시장에 내놓느냐에 기업의 성패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니혼게이자이 신문은 한국 기업의 성공 비결이 ‘빨리빨리’ 문화로 대변되는 스피드 경영이라 보도한 바 있다. 확실히 스피드는 많은 기업을 성공으로 이끈 핵심 요소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속도만 추구하다 보면 사람들은 행동뿐만 아니라 마음도 조급해진다. 이미 우리는 출퇴근 시 앞차가 조금만 늦게 가도, 엘리베이터 속도가 조금만 느려도 뭔가 모를 불편함을 느낄때가 많다.
스피드보다 더 중요한 고객 가치
속도 예찬의 시대에는 조직을 더 빠르게 이끄는 것이 리더의 중요한 역량 요건이다. 직장 상사들은 지시에 민첩하게 반응하고 분석, 집계, 보고의 속도가 빠른 부하 직원을 선호한다. 남보다 한발 앞서 고객과 시장의 흐름을 읽고 밤을 새워서라도 제품의 출시와 서비스 속도에서 경쟁사보다 빨라야 생존할 수 있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직원들조차 빠른 일 처리를 능력의 척도로 여긴다. 스피드 중시의 근저에는 효율성을 우선하는 사고가 깔려 있다. 주어진 시간에 더 많이 일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당연히 시간을 쪼개 쓰고 아끼며 일정 관리를 엄격히 하는 것이 기본이 된다.
그러나 기업 경영에서 스피드보다 더 중요한 것이 고객 가치이다. 1995년 제약회사 머크의 CEO 길마틴은 ‘가장 빨리 성장하는 회사’라는 도전적인 목표를 제시하였지만 이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안전성 검증이 덜된 관절염 치료제의 무리한 출시를 강행, 결국 제품 부작용으로 대규모 리콜과 소송에 따른 금전적 손해는 물론 기업 이미지도 크게 손상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고객보다 스피드를 앞세운 결과이다.
모든 조직에는 조직의 리더가 생각하는 스피드와 실제 조직이 움직이는 스피드간에 차이가 발생한다. 이 차이를 줄이는 방법은 조직의 스피드를 높이거나 리더의 생각을 바꾸는 두 가지뿐이다. 대다수의 기업들은 리더의 스피드를 따라잡기 위해 자원과 시간을 더 투자하지만 그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한 경우가 많다. 글로벌 컨설팅 기업 포럼에서 경영진을 대상으로 실시한 글로벌 서베이 결과 스피드를 중요한 경쟁 요소로 생각한 응답자의 약 40%만이 자신의 회사가 빠르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대로 조직의 역량에 맞추어 리더의 스피드를 조금 낮추는 방법을 보자. 하버드비지니스리뷰는 속도만 추구하며 전진밖에 모르는 ‘스피드’ 기업은 중요한 순간마다 잠시 멈춰 회사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확인하는 기업보다 실적이 저조하다고 지적했다. 영국의 경제정보 평가기관인 이코노미스트인텔리전스유닛(EIU)은 343개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경영진에서 일선 현장까지 적절한 감속을 통해 생각과 행동을 일치시키는 기업이 그 반대 유형의 기업보다 3년 평균 매출 및 영업이익 성장률에서 각각 40%, 52% 더 높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하버드비지니스리뷰는 이런 차이의 원인으로 전략적 속도를 지목하였다. ‘스피드’ 기업은 생산량 증대나 생산주기 단축과 같은 운영의 속도에서는 빨랐지만 고객에 가치를 전달하는 시간, 즉 전략적 속도는 단축하지 못했던 것이다. 세상에는 빠른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 오히려 서둘러서는 안 되는 일도 적지 않다. 특히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는 운영의 속도가 아닌 전략적 속도가 중요하다. 느리지만 핵심을 찌르는 한두 마디의 절제된 표현이 빠른 속도로 유창하게 말을 잘하는 것보다 더 설득력 있게 들리는 것처럼 반드시 실행하는 속도가 빨라야만 더 큰 가치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기업의 속도 숭배는 다양한 부작용도 수반한다. 이미 사람들의 생활에서 여유가 없어지고 업무에서의 스트레스는 가중되고 있다. 직장에서는 동료간 정이 메마르고 갈수록 삭막해져 일하는 즐거움이 사라진 지 오래이며 심지어 신체적, 정신적 건강의 문제마저 발생한다. 미국의 내과의사 래리 도시는 이런 부작용이 질병으로 확대되는 것을 일컬는 ‘시간병(Time-sickness)’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스피드 경영을 보완하는 슬로우 리더십
끝없이 빨라지기만 할 것 같은 세상에 삶의 속도를 조금 늦추려는 시도가 등장하고 있다. 바로 슬로우 운동(Slow Movement)이다. 느림의 미학을 추구하는 슬로우 철학에 바탕을 둔 슬로우 운동은 슬로우 푸드(Food), 슬로우 트래블(Travel) 등 생활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속도 추구로 인해 놓치기 쉬웠던 가치들을 일깨우며 공감대를 넓혀가고 있다.
여기서 분명히 기억해야 할 점은 슬로우 운동에서 말하는 ‘슬로우(Slow)’가 느리다는 사전적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존재 방식과 삶의 철학을 표현하는 차분, 신중, 수용적, 직관적, 여유, 인내, 반성, 양보다 질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슬로우 운동은 기존의 빠른 생활일변도에서 탈피하자는 것이지 결코 게으르게 살자는 것은 아니다. 빠르게 하는 것이 마땅할 때는 빠르게, 느리게 해야 할 때는 느리게 하는 균형의 추구이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지만, 그 벌레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 일찍 일어난 것이 화근이었던 것이다.
슬로우 철학을 기업 경영에 적용할 때 슬로우 리더십이라는 개념을 생각해볼 수 있다. 슬로우 리더십이라는 용어는 효율성이 아닌 효과를 중시하는 리더의 요건으로 처음 사용되었다. 미국 우드베리 대학 안드레 반니컬크 교수는 슬로우 리더십을 ‘구성원들이 유행과 주변 여건에 휩쓸리지 않고 장기적 관점에서 진정 도움이 되는 것을 발견하여 실행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갖게 만드는 것’으로 정의한다. 결코 리더의 느린 행동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철저한 준비, 신중한 조사를 통해 민첩한 실행력과 정확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감정적이고 즉각적인 대응, 고정 관념과 작은 것에 대한 집착, 지나친 단순화와 표준화, 획일화 등은 지양한다.
스피드 경영의 관점에서 보면 슬로우 리더십의 의미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속도를 늦추어주는 ‘감속’이다. 스피드를 중시하는 조직이 과속할 때 부작용이 생기기 마련이다. 예를 들면 품질 이슈나 자원 활용의 비효율성, 구성원의 피로도 상승과 같은 의도하지 않은 문제가 발생하기 쉽다. 이런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서 자동차에 브레이크 장치가 있듯이 스피드 경영에는 ‘감속’ 장치가 필요하다.
둘째, 속도를 무조건 늦추는 것이 아니라 빠르게 해야 할 때와 쉬어갈 때를 잘 구분하는 것이다. 축구나 농구 경기를 보면 빠른 역습과 함께 느린 공격, 즉 지공(遲攻)을 잘 활용하는 팀이 이긴다. 야구에서도 빠른 직구와 느린 커브를 적절히 배합하는 투수가 타자를 압도한다. 경기를 하는 선수 스스로 침착성을 유지하고 상황을 냉철하게 판단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감독의 역할이 중요하다. 조직에서도 다르지 않다. 업무에 몰입해 있는 직원들이 언제 뛰거나 걷거나 잠시 쉬어야 할 지 잘 판단해주는 것도 슬로우 리더십의 중요한 포인트다.
슬로우 리더십의 요건
슬로우 리더십에서 특히 강조되는 바는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된다.
① 장기적인 시각
리더십의 대가 스티븐 코비 박사는 ‘급하고 중요한 것’보다 ‘급하지 않고 중요한 것’을 챙기는 것이 진정한 리더라고 말했다. 사업 성공에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것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당장의 실적에 얽매여 바쁜 일상 속에 파묻혀 있으면 ‘급하지 않고 중요한 것’을 생각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직원들의 직무 교육이나 차세대 리더 육성 등은 당장 급해 보이지 않아도 기업의 미래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이지만 현안에 밀려 소홀히 여겨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한나라를 건국한 유방은 진시황의 폭정으로 피폐해진 세상에서 시간이 걸리더라도 백성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임을 알았다. 그래서 당장 한두 개의 성을 더 차지하는 것보다 백성의 입장에서 간하는 신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반면 항우는 당대 최고의 문무를 겸비하여 서초패왕으로 불렸지만 급한 성격과 자신에 대한 자만심으로 눈 앞에 닥친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만 신경을 곤두세웠다. 심지어 본 때를 보인다는 명목으로 성 하나를 통째로 불태우는 등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백성의 신뢰를 잃어 결국 유방에게 패하고 만다.
온라인 신발 판매 기업 재포스의 CEO 토니 셰이는 고객이 온라인으로 제품을 선택할 때 실물과의 품질 차이를 가장 걱정한다는 점에 착안, 시간과 노력이 더 들더라도 최대한 실물과 같은 입체 사진을 올리는 데 역량을 집중하였다. 동시에 반품 배송비를 받지 않는 전략으로 품질 관리에 철저함을 더했다. 결국 품질에 대한 신뢰가 쌓이면서 단골 고객이 늘어가고 이들의 입 소문으로 회사는 비약적인 성장을 하게 된다.
② 과정에서 가치 발견
성과주의가 확산되면서 결과 중심의 조직 관리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임파워먼트, 자율적 업무 수행, 상하간 신뢰 제고의 측면에서 결과 위주의 관리는 매우 효과적일 수 있다. 평가의 객관성과 구성원 수용도가 높아 관리의 스피드와 효율성도 높일 수 있다. 그러나 결과만 강조하다 보면 조직 전체가 단기적 시각에 갇히게 된다. 역량 개발과 기초 투자처럼 당장의 성과로 연결되지 않는 것에 인색해지기 쉽다. 또 정도를 걷지 않고 요령과 편법을 통해서라도 목적만 달성하면 된다는 분위기가 조성될 수 있다는 점도 우려되는 부분이다. 최고의 품질과 가치를 자랑하는 명품브랜드 루이비통은 장시간의 철저한 수작업 정성으로 제품에 담긴 시간 가치를 통해 고객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슬로우 리더십은 과정에서 나오는 가치를 중시한다. 예를 들어 1시간 분량의 일을 시킨다고 가정할 경우, 50분에 끝내는 효율성도 좋지만 시간을 단축하지 못하더라도 1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는 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결과중심적 사고가 놓치기 쉬운 과정에서의 교훈을 간과하지 않는 것도 리더의 몫이다.
③ 창의적 휴(休) 관리
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은 편안하고 조용한 상태에서 더 강한 뇌파가 나오며 창의성과 사고력이 높아진다고 한다. 깊고 차분하게 생각할 때 작은 아이디어를 지나치지 않을 수 있다. 빌게이츠는 일 년에 두 차례씩 미국 서북부 호숫가에 있는 별장에 은둔하여 전략과 아이디어를 연구하는 ‘생각 주간(Think Week)’을 갖는다. 휴식의 중요성을 잘 알기 때문이다. IBM에서는 수시로 이메일을 확인해야만 하는 조급함을 의도적으로 치유하자는 의미에서 하루에 두 번만 이메일을 확인하자는 캠페인이 시작되었다.
휴식은 심신을 재충전시켜 줌으로써 일에 대한 더 큰 몰입과 열정의 토대가 된다. 혼다의 설립자 혼다 소이치로는 “마디가 있어야 대나무가 자라는 것처럼 휴식이 있어야 사람도 기업도 성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버드대학교에서는 신입생에게 하루 일과를 빠듯하게 짜지 말고 반드시 노는 시간, 쉬는 시간을 포함시키라고 강조한다. 세계적인 선물용품업체 홀마크 역시 디자이너들의 근무 시간 중 30%를 재충전의 시간으로 사용하게 하고 있다.
넓은 의미로 보면 반드시 직장을 떠나야만 편안하게 쉬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3M에서 연구원들이 개인 연구에 근무 시간의 15%를 쓸 수 있게 하는 것이나 구글이 20%의 시간을 원하는 프로젝트에 쓸 수 있게 제도화한 것도 창의적 성과를 노리는 휴(休) 관리이다. 2010년 포춘지가 선정한 가장 일하기 좋은 기업 1위에 오른 소프트웨어기업 SAS는 급여는 높지 않지만 육아지원, 건강관리 등 업무 환경과 복지 제도로 회사를 일터이면서 동시에 가장 좋은 휴식처로 만들고 있다.
현대 비즈니스 무대에서 스피드는 가장 강력한 무기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스피드 경영만으로 기업의 성공을 보장하기 어렵다. 고객 가치 혁신을 위한 자율과 창의가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슬로우 리더십은 스피드 경영의 부작용을 줄여주는 보완재가 되면서 동시에 창의적인 조직에 적합한 리더의 요건이기도 하다. 스피드가 많이 강조되면서 창의적 조직 문화가 요구되는 지금과 같은 시기일수록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변화의 속도를 잘 조절하는 슬로우 리더십이 더욱 필요해 보인다.
- LG Business Insight 1115호
세상은 점점 빨라지고 있다. 우리는 매일 퀵서비스, 초고속 인터넷과 같은 속도 경쟁 서비스에 둘러 싸여 생활한다. 점점 빨라지는 현상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전 세계적으로 공통적이다. 영국 런던 번화가에서 수십 년간 진행된 관찰 결과 사람들의 걷는 속도가 지속적으로 빨라지고 있음이 밝혀졌다. 패스트푸드의 본고장 미국에서는 자동차 운전석에 앉은 채로 음식을 주문하여 받아가고 현금지급기를 이용할 수 있는 Drive-through 서비스가 장례식 조문에까지 등장할 정도이다.
세계 경제 포럼 창설자 클라우스 슈바프는 현대를 일컬어 ‘빠른 것이 느린 것을 잡아 먹는 시대’라 정의하였다. 현대 비즈니스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품질 좋고 값싼 제품과 서비스를 누가 더 ‘빨리’ 시장에 내놓느냐에 기업의 성패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니혼게이자이 신문은 한국 기업의 성공 비결이 ‘빨리빨리’ 문화로 대변되는 스피드 경영이라 보도한 바 있다. 확실히 스피드는 많은 기업을 성공으로 이끈 핵심 요소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속도만 추구하다 보면 사람들은 행동뿐만 아니라 마음도 조급해진다. 이미 우리는 출퇴근 시 앞차가 조금만 늦게 가도, 엘리베이터 속도가 조금만 느려도 뭔가 모를 불편함을 느낄때가 많다.
스피드보다 더 중요한 고객 가치
속도 예찬의 시대에는 조직을 더 빠르게 이끄는 것이 리더의 중요한 역량 요건이다. 직장 상사들은 지시에 민첩하게 반응하고 분석, 집계, 보고의 속도가 빠른 부하 직원을 선호한다. 남보다 한발 앞서 고객과 시장의 흐름을 읽고 밤을 새워서라도 제품의 출시와 서비스 속도에서 경쟁사보다 빨라야 생존할 수 있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직원들조차 빠른 일 처리를 능력의 척도로 여긴다. 스피드 중시의 근저에는 효율성을 우선하는 사고가 깔려 있다. 주어진 시간에 더 많이 일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당연히 시간을 쪼개 쓰고 아끼며 일정 관리를 엄격히 하는 것이 기본이 된다.
그러나 기업 경영에서 스피드보다 더 중요한 것이 고객 가치이다. 1995년 제약회사 머크의 CEO 길마틴은 ‘가장 빨리 성장하는 회사’라는 도전적인 목표를 제시하였지만 이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안전성 검증이 덜된 관절염 치료제의 무리한 출시를 강행, 결국 제품 부작용으로 대규모 리콜과 소송에 따른 금전적 손해는 물론 기업 이미지도 크게 손상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고객보다 스피드를 앞세운 결과이다.
모든 조직에는 조직의 리더가 생각하는 스피드와 실제 조직이 움직이는 스피드간에 차이가 발생한다. 이 차이를 줄이는 방법은 조직의 스피드를 높이거나 리더의 생각을 바꾸는 두 가지뿐이다. 대다수의 기업들은 리더의 스피드를 따라잡기 위해 자원과 시간을 더 투자하지만 그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한 경우가 많다. 글로벌 컨설팅 기업 포럼에서 경영진을 대상으로 실시한 글로벌 서베이 결과 스피드를 중요한 경쟁 요소로 생각한 응답자의 약 40%만이 자신의 회사가 빠르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대로 조직의 역량에 맞추어 리더의 스피드를 조금 낮추는 방법을 보자. 하버드비지니스리뷰는 속도만 추구하며 전진밖에 모르는 ‘스피드’ 기업은 중요한 순간마다 잠시 멈춰 회사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확인하는 기업보다 실적이 저조하다고 지적했다. 영국의 경제정보 평가기관인 이코노미스트인텔리전스유닛(EIU)은 343개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경영진에서 일선 현장까지 적절한 감속을 통해 생각과 행동을 일치시키는 기업이 그 반대 유형의 기업보다 3년 평균 매출 및 영업이익 성장률에서 각각 40%, 52% 더 높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하버드비지니스리뷰는 이런 차이의 원인으로 전략적 속도를 지목하였다. ‘스피드’ 기업은 생산량 증대나 생산주기 단축과 같은 운영의 속도에서는 빨랐지만 고객에 가치를 전달하는 시간, 즉 전략적 속도는 단축하지 못했던 것이다. 세상에는 빠른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 오히려 서둘러서는 안 되는 일도 적지 않다. 특히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는 운영의 속도가 아닌 전략적 속도가 중요하다. 느리지만 핵심을 찌르는 한두 마디의 절제된 표현이 빠른 속도로 유창하게 말을 잘하는 것보다 더 설득력 있게 들리는 것처럼 반드시 실행하는 속도가 빨라야만 더 큰 가치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기업의 속도 숭배는 다양한 부작용도 수반한다. 이미 사람들의 생활에서 여유가 없어지고 업무에서의 스트레스는 가중되고 있다. 직장에서는 동료간 정이 메마르고 갈수록 삭막해져 일하는 즐거움이 사라진 지 오래이며 심지어 신체적, 정신적 건강의 문제마저 발생한다. 미국의 내과의사 래리 도시는 이런 부작용이 질병으로 확대되는 것을 일컬는 ‘시간병(Time-sickness)’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스피드 경영을 보완하는 슬로우 리더십
끝없이 빨라지기만 할 것 같은 세상에 삶의 속도를 조금 늦추려는 시도가 등장하고 있다. 바로 슬로우 운동(Slow Movement)이다. 느림의 미학을 추구하는 슬로우 철학에 바탕을 둔 슬로우 운동은 슬로우 푸드(Food), 슬로우 트래블(Travel) 등 생활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속도 추구로 인해 놓치기 쉬웠던 가치들을 일깨우며 공감대를 넓혀가고 있다.
여기서 분명히 기억해야 할 점은 슬로우 운동에서 말하는 ‘슬로우(Slow)’가 느리다는 사전적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존재 방식과 삶의 철학을 표현하는 차분, 신중, 수용적, 직관적, 여유, 인내, 반성, 양보다 질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슬로우 운동은 기존의 빠른 생활일변도에서 탈피하자는 것이지 결코 게으르게 살자는 것은 아니다. 빠르게 하는 것이 마땅할 때는 빠르게, 느리게 해야 할 때는 느리게 하는 균형의 추구이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지만, 그 벌레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 일찍 일어난 것이 화근이었던 것이다.
슬로우 철학을 기업 경영에 적용할 때 슬로우 리더십이라는 개념을 생각해볼 수 있다. 슬로우 리더십이라는 용어는 효율성이 아닌 효과를 중시하는 리더의 요건으로 처음 사용되었다. 미국 우드베리 대학 안드레 반니컬크 교수는 슬로우 리더십을 ‘구성원들이 유행과 주변 여건에 휩쓸리지 않고 장기적 관점에서 진정 도움이 되는 것을 발견하여 실행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갖게 만드는 것’으로 정의한다. 결코 리더의 느린 행동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철저한 준비, 신중한 조사를 통해 민첩한 실행력과 정확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감정적이고 즉각적인 대응, 고정 관념과 작은 것에 대한 집착, 지나친 단순화와 표준화, 획일화 등은 지양한다.
스피드 경영의 관점에서 보면 슬로우 리더십의 의미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속도를 늦추어주는 ‘감속’이다. 스피드를 중시하는 조직이 과속할 때 부작용이 생기기 마련이다. 예를 들면 품질 이슈나 자원 활용의 비효율성, 구성원의 피로도 상승과 같은 의도하지 않은 문제가 발생하기 쉽다. 이런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서 자동차에 브레이크 장치가 있듯이 스피드 경영에는 ‘감속’ 장치가 필요하다.
둘째, 속도를 무조건 늦추는 것이 아니라 빠르게 해야 할 때와 쉬어갈 때를 잘 구분하는 것이다. 축구나 농구 경기를 보면 빠른 역습과 함께 느린 공격, 즉 지공(遲攻)을 잘 활용하는 팀이 이긴다. 야구에서도 빠른 직구와 느린 커브를 적절히 배합하는 투수가 타자를 압도한다. 경기를 하는 선수 스스로 침착성을 유지하고 상황을 냉철하게 판단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감독의 역할이 중요하다. 조직에서도 다르지 않다. 업무에 몰입해 있는 직원들이 언제 뛰거나 걷거나 잠시 쉬어야 할 지 잘 판단해주는 것도 슬로우 리더십의 중요한 포인트다.
슬로우 리더십의 요건
슬로우 리더십에서 특히 강조되는 바는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된다.
① 장기적인 시각
리더십의 대가 스티븐 코비 박사는 ‘급하고 중요한 것’보다 ‘급하지 않고 중요한 것’을 챙기는 것이 진정한 리더라고 말했다. 사업 성공에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것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당장의 실적에 얽매여 바쁜 일상 속에 파묻혀 있으면 ‘급하지 않고 중요한 것’을 생각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직원들의 직무 교육이나 차세대 리더 육성 등은 당장 급해 보이지 않아도 기업의 미래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이지만 현안에 밀려 소홀히 여겨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한나라를 건국한 유방은 진시황의 폭정으로 피폐해진 세상에서 시간이 걸리더라도 백성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임을 알았다. 그래서 당장 한두 개의 성을 더 차지하는 것보다 백성의 입장에서 간하는 신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반면 항우는 당대 최고의 문무를 겸비하여 서초패왕으로 불렸지만 급한 성격과 자신에 대한 자만심으로 눈 앞에 닥친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만 신경을 곤두세웠다. 심지어 본 때를 보인다는 명목으로 성 하나를 통째로 불태우는 등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백성의 신뢰를 잃어 결국 유방에게 패하고 만다.
온라인 신발 판매 기업 재포스의 CEO 토니 셰이는 고객이 온라인으로 제품을 선택할 때 실물과의 품질 차이를 가장 걱정한다는 점에 착안, 시간과 노력이 더 들더라도 최대한 실물과 같은 입체 사진을 올리는 데 역량을 집중하였다. 동시에 반품 배송비를 받지 않는 전략으로 품질 관리에 철저함을 더했다. 결국 품질에 대한 신뢰가 쌓이면서 단골 고객이 늘어가고 이들의 입 소문으로 회사는 비약적인 성장을 하게 된다.
② 과정에서 가치 발견
성과주의가 확산되면서 결과 중심의 조직 관리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임파워먼트, 자율적 업무 수행, 상하간 신뢰 제고의 측면에서 결과 위주의 관리는 매우 효과적일 수 있다. 평가의 객관성과 구성원 수용도가 높아 관리의 스피드와 효율성도 높일 수 있다. 그러나 결과만 강조하다 보면 조직 전체가 단기적 시각에 갇히게 된다. 역량 개발과 기초 투자처럼 당장의 성과로 연결되지 않는 것에 인색해지기 쉽다. 또 정도를 걷지 않고 요령과 편법을 통해서라도 목적만 달성하면 된다는 분위기가 조성될 수 있다는 점도 우려되는 부분이다. 최고의 품질과 가치를 자랑하는 명품브랜드 루이비통은 장시간의 철저한 수작업 정성으로 제품에 담긴 시간 가치를 통해 고객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슬로우 리더십은 과정에서 나오는 가치를 중시한다. 예를 들어 1시간 분량의 일을 시킨다고 가정할 경우, 50분에 끝내는 효율성도 좋지만 시간을 단축하지 못하더라도 1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는 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결과중심적 사고가 놓치기 쉬운 과정에서의 교훈을 간과하지 않는 것도 리더의 몫이다.
③ 창의적 휴(休) 관리
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은 편안하고 조용한 상태에서 더 강한 뇌파가 나오며 창의성과 사고력이 높아진다고 한다. 깊고 차분하게 생각할 때 작은 아이디어를 지나치지 않을 수 있다. 빌게이츠는 일 년에 두 차례씩 미국 서북부 호숫가에 있는 별장에 은둔하여 전략과 아이디어를 연구하는 ‘생각 주간(Think Week)’을 갖는다. 휴식의 중요성을 잘 알기 때문이다. IBM에서는 수시로 이메일을 확인해야만 하는 조급함을 의도적으로 치유하자는 의미에서 하루에 두 번만 이메일을 확인하자는 캠페인이 시작되었다.
휴식은 심신을 재충전시켜 줌으로써 일에 대한 더 큰 몰입과 열정의 토대가 된다. 혼다의 설립자 혼다 소이치로는 “마디가 있어야 대나무가 자라는 것처럼 휴식이 있어야 사람도 기업도 성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버드대학교에서는 신입생에게 하루 일과를 빠듯하게 짜지 말고 반드시 노는 시간, 쉬는 시간을 포함시키라고 강조한다. 세계적인 선물용품업체 홀마크 역시 디자이너들의 근무 시간 중 30%를 재충전의 시간으로 사용하게 하고 있다.
넓은 의미로 보면 반드시 직장을 떠나야만 편안하게 쉬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3M에서 연구원들이 개인 연구에 근무 시간의 15%를 쓸 수 있게 하는 것이나 구글이 20%의 시간을 원하는 프로젝트에 쓸 수 있게 제도화한 것도 창의적 성과를 노리는 휴(休) 관리이다. 2010년 포춘지가 선정한 가장 일하기 좋은 기업 1위에 오른 소프트웨어기업 SAS는 급여는 높지 않지만 육아지원, 건강관리 등 업무 환경과 복지 제도로 회사를 일터이면서 동시에 가장 좋은 휴식처로 만들고 있다.
현대 비즈니스 무대에서 스피드는 가장 강력한 무기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스피드 경영만으로 기업의 성공을 보장하기 어렵다. 고객 가치 혁신을 위한 자율과 창의가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슬로우 리더십은 스피드 경영의 부작용을 줄여주는 보완재가 되면서 동시에 창의적인 조직에 적합한 리더의 요건이기도 하다. 스피드가 많이 강조되면서 창의적 조직 문화가 요구되는 지금과 같은 시기일수록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변화의 속도를 잘 조절하는 슬로우 리더십이 더욱 필요해 보인다.
- LG Business Insight 11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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