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11. 21. 23:06
전세계적인 약가 인하 및 R&D 생산성 저하로 CRO의 중요성이 점점 부각되고 있다. 최근의 정책 변화로 사업모델 개선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는 국내 제약사들에게 CRO는 새로운 수익 창출 대안의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약제비 적정화 방안, 한미 FTA 등 정책변화로 최근 국내 제약 업계는 사업 환경 전반에 걸쳐 중대 위기를 맞고 있다. 약가 인하 및 지적 재산권 보호가 더욱 강조되는 정책 변화 속에서, 국내 제약사들이 제네릭(복제약) 중심의 사업모델만으로 지속적인 성장을 유지하기가 매우 어려워질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수익 창출 대안을 발굴하고 사업모델을 개선해야 하는데, 그 대안의 하나로 CRO(Contract Research Organization, 연구개발 대행 기업)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R&D 생산성 저하로 각광받는 CRO
제약 업계의 위기는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전세계 제약 업계는-연 매출이 수백 억 달러에 달하는 다국적 제약사부터 소규모 바이오텍 회사에 이르기까지- 정부의 약가 인하 정책, 더욱 엄격해진 의약품 허가 과정, R&D 생산성 저하 등으로 인해 큰 위협을 받고 있다. 이에 제약사들은 전 가치사슬(Value Chain)에 걸쳐 효율성 향상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그 일환으로 아웃소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제약 업계의 아웃소싱이 다른 산업분야와 큰 차이를 보이는 점은 핵심분야인 R&D에 있어서도 활발하게 아웃소싱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제약 산업의 경우 타 산업분야와 달리 제품 당 R&D 과정이 매우 길고 높은 비용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한 개의 의약품을 개발하는 데 드는 R&D 비용은 1970년대 1억 4천만 달러에서 2000년대에는 8억 달러로 크게 늘어났다. 전체 R&D 기간(판매허가 기간 포함)도 1970년대 11년에서 1990년대 14년으로 증가하였다. 미국은 전체 R&D 기간을 줄이기 위해 1992년부터 신약허가 업무를 담당하는 FDA(식품의약품안전청)의 업무 인력을 증원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지만, 임상시험의 수, 기간 및 참여 환자수의 증가 때문에 전체 기간은 크게 줄어들지 않고 있다.
의약품의 물질특허는 제품 허가 시점이 아닌 특허 출원 시점을 기준으로 기간을 산정한다. 따라서 전체 R&D 기간이 길어져서 제품 허가가 늦어질수록 제네릭의 공격 없이 독점적으로 제품을 판매할 수 있는 기간이 짧아진다. 제약 R&D에 있어 비용뿐만 아니라 속도가 매우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제약 산업의 R&D 단계에 대해서는 <그림 1> 참조).
또한 급속한 기술 발전에 따라 R&D에 필요한 모든 역량과 기술을 한 회사가 소유하는 것이 힘들어졌다. 새로운 기술이 소개될 때마다 제약사가 관련 인력을 채용하고 고가의 실험기구를 모두 구입하는 것은 너무 위험이 크고 비용 부담 또한 적지 않다. 그러다 보니 각 제약사는 자체의 강점을 지니고 있는 핵심 R&D 부문은 내부적으로 수행하고 나머지 부문은 R&D 아웃소싱을 전담하는 연구개발 대행 기업, 즉 CRO에 의존하여 비용, 속도 면에서 더 높은 효율성을 추구하게 되었다.
이러한 추세에 따라, 1970년대 임상시험 대행 업무 위주로 시작된 CRO의 업무범위는 질환 타겟 선정 및 검증, 선도화합물 발굴 및 최적화, 제형 개발, 임상데이터 수집 및 통계 분석, 허가 업무 지원 등 R&D의 전 단계로 매우 다양해졌다. 그 결과 최근 CRO 시장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세계 CRO 시장규모는 2000년 이후 연평균 14%로 성장하여 2006년 약 140억 달러에 달했고, 향후에도 지속적으로 성장하여 2010년에는 24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그림 2> 참조).
CRO의 다양한 사업모델
CRO의 사업모델은 크게 ‘풀 서비스(Full Service)’ 모델과 ‘니치 서비스(Niche Service)’ 모델로 나눌 수 있다. 비교적 역사가 짧거나 규모가 작은 CRO들의 경우 R&D 단계 중 특정 부문에 대한 전문성 또는 특정 질환, 특정 지역에서의 전문성을 기반으로 하는 ‘니치 서비스’ 모델로 시장에 참여한다. 이들은 대형 CRO에 비해 유연하고, 개별 프로젝트에 더 심도 있게 집중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니치 서비스’ 모델의 CRO들은 역사와 규모가 축적됨에 따라 사업범위를 점차 확대해 ‘풀 서비스’ CRO로 발전해 나가기도 한다.
Quintiles, Paraxel 등의 대규모 CRO들은 1980년대 초반에 설립되어 여러 건의 기업인수를 거쳐 크게 성장했다. 이들은 전임상, 임상시험, 임상데이터 관리 등의 ‘개발’ 관련 서비스를 모두 제공하고, 때로는 영업/마케팅 업무까지 지원한다. 각국의 지사 또는 파트너사를 이용한 대규모 다국가 임상시험 경험 및 다수의 의약품 허가 경험 등을 주요 강점으로 하지만, 잦은 인수합병 및 큰 조직 규모에서 비롯되는 업무 효율성 저하의 문제점을 안고 있다.
‘니치 서비스’를 시작으로 사업범위를 확대해 나가는 CRO의 예로 중국의 Wuxi PharmaTech을 들 수 있다. 2001년 상하이에 설립된 Wuxi는 세계 Top 20 제약사 중 18개와 계약을 체결하면서 현재 중국 제일의 CRO로 떠올랐다. Wuxi는 설립 초기, 질환 타겟을 조절하여 치료효과를 낼 수 있는 물질을 발굴하고 그 구조를 변화시켜 치료 효과와 타켓 선택성을 최적화하는 ‘선도화합물 발굴 및 최적화’ 서비스에 집중하였다.
세계 최대 제약사의 하나인 Merck와의 계약 내용을 예로 들면, 선도화합물 최적화 단계를 위한 새로운 ‘화합물 은행(Chemical Library)’을 만들기로 합의하였다. 사업 경험이 축적됨에 따라 Wuxi는 공정개발 및 약품원료(API, Active Pharmaceutical Ingredient) 생산 등으로 업무 범위를 확대하였다. 최근 3년간 Wuxi의 연평균 매출 증가율은 83%, 영업이익 증가율은 41%에 달하고 있다. 2006년 매출 7천만 달러, 영업이익 1천만 달러를 기록한 이 회사의 2007년 상반기 매출은 6천 4백만 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129%의 성장을 이루었고, 영업이익은 1천 3백만 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343% 성장하는 등 성장세가 시간이 흐를수록 가속화되고 있다.
불분명해지는 제약사와 CRO의 경계
CRO와 제약사 간의 경계가 무너지는 경우도 나타나고 있는데, 인도의 Biocon Limited가 대표적인 예이다. 제약사인 Biocon은 ‘연구’ 단계(선도화합물 최적화)에 집중하여 서비스를 제공하는 Syngene 및 ‘개발’ 단계(임상시험)에 집중하여 서비스를 제공하는 Clinegene을 자회사로 설립하였다. Biocon은 자체 R&D를 통해 의약품을 출시할 뿐만 아니라 CMO(Contract Manufacturing Organization, 제조 대행 기업)로서 생산 대행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 2006년 전체 매출은 약 2억 2천만 달러로 전년 대비 25% 성장하였고, 20%를 웃도는 영업 이익률을 기록하고 있다. 제약사가 소유하는 CRO의 다른 예로는 2005년 세계 4위의 제네릭 회사인 Actavis에 의해 인수된 인도의 Lotus Labs를 들 수 있다. Lotus는 인수된 이후 기존 CRO 사업을 계속하면서, Actavis가 필요로 하는 R&D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인도의 Suven Life Sciences와 같이 CRO로 시작하여 제약사로 성장하는 사례도 볼 수 있다. 이 회사는 1984년 설립 후 정밀화학 중간체 사업을 하다가 1990년대 초반 CMO로 사업모델을 전환하였고, 2000년대 초반부터 CRO 사업도 시작하여 세계 유수의 제약사인 Eli Lilly 등을 고객으로 확보하였다. 이 회사의 2006년 매출은 2,500만 달러로, 전년 대비 30%의 성장을 이루었다. Suven은 매출의 약 20%를 R&D에 투자하여 자체의 R&D 파이프라인도 가지고 있다. 자체 연구개발이 결실을 맺기 시작하면 다른 제약사에 판권을 팔거나 자체 마케팅/영업을 하는 제약사의 모습을 갖출 것이다.
인도와 중국, CRO의 큰 손으로 부상
R&D 아웃소싱은 과거에는 선진국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R&D 비용과 속도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인도, 중국 등 개발도상국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임상시험의 경우, 인도나 중국에서 시행하면 가격 경쟁력뿐만 아니라 임상기간 단축의 이점까지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가장 먼저 확대되기 시작했다. 이들 나라의 제약 산업이 제네릭 위주의 사업에서 신약 R&D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전환하고, 지적 재산권 보호에 대한 정책적 노력이 가시적 성과를 얻으면서 선도화합물 최적화 등의 ‘연구’ 단계 아웃소싱 또한 증가하고 있다.
인도의 CRO 산업은 1990년대 후반에 시작되어 최근 급격히 성장하고 있다. 전세계CRO 산업규모가 2000년대에 연평균 14%의 성장률을 보인데 반해, 인도의 CRO 산업규모는 연평균 70%대의 성장을 계속해 왔다. 2006년 인도 CRO 산업규모는 약 2억 달러이고, 이는 지속적으로 성장하여 2010년에는 10억 달러를 초과할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의 CRO 사업은 1990년대 중반에 시작되었고, 산업규모는 4,000~6,300만 달러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인도에 비해서는 아직 뒤쳐져 있지만, A.T. Kearney의 보고서에서 가장 선호되는 임상시험 아웃소싱 지역으로 선정되는 등 입지가 점점 강화되고 있다.
인도와 중국이 CRO 사업에서 지닌 강점은 가격 경쟁력과 풍부한 인력 및 높은 시장 잠재력이다. 화학 박사학위를 가진 연구인력의 연봉이 미국에서는 9만~ 11만 달러인 반면, 중국에서는 2만~2만 5천 달러이다. 풍부한 환자군이 뒷받침 되는 만큼 임상시험 비용도 저렴하다. 인도의 경우 선진국에 비해 1/2 이하의 비용으로 임상시험을 진행할 수 있다.
전세계 제약 매출을 집계하여 보고하는 IMS Health에 의하면, 2006년 기준 세계 제약 시장에서 차지하는 중국의 시장규모는 9위이고, 인도는 14위이다. 인구와 경제성장률을 고려할 때 이 순위는 꾸준히 올라갈 것으로 예상되어 CRO로서뿐만 아니라 의약품 소비국으로서 인도, 중국의 중요성도 점차 커지고 있다.
인도, 중국이 신약연구에서 강점을 가지는 부분은 화학(Chemistry) 분야이다. 따라서 임상시험 외에 이들 나라에 주로 아웃소싱되는 분야는 선도화합물 최적화 단계이다. 인도는 세계적인 제네릭 개발국가인 만큼 제형 기술이나 약물 전달 기술 등이 중국에 비해 뛰어나고, IT 역량이 뛰어나 임상데이터 관리에 있어서도 강점을 지닌다. 영어를 공식언어로 사용하는 것도 큰 강점으로 꼽을 수 있다. 중국은 인도에 비해서는 유전체학 부문에 좀 더 높은 역량을 보유하여, 인간의 유전자 정보를 밝혀낸 ‘인간 게놈 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또한 전임상 단계에 있어서도 인도에 비해 강점을 지닌다.
아직 미국, 유럽의 제약사들이 인도, 중국의 역량을 충분히 활용하지 않고 있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지적 재산권 보호 이슈이다. 인도는 2005년, 중국은 2004년부터 국제적 수준(TRIPS, Agreement on Trade Related Aspects of Intellectual Property Rights, 무역 관련 지적 재산권 협정)에 부합하는 지적 재산권 보호를 위한 법률을 입안하였다. 이에 따라 지적 재산권 보호가 큰 개선을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만족할 만한 수준은 못 되어, 2007 Annual Special 301 Report에서 여전히 Priority Watch List(우선감시대상국 리스트)에 올라 있다. Annual Special 301 Report는 미국 무역대표부에서 국가 별 지적 재산권 보호 정도를 평가하여 Priority Watch List, Watch List(감시대상국 리스트) 등으로 분류하는 보고서이다. 향후 인도, 중국의 지적 재산권 보호 체제가 더욱 정착되고 정부정책의 투명성이 제고되면 이들 국가에서의 CRO 사업 전망은 한층 밝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국내 CRO 산업 경쟁력 취약
R&D 단계 중 국내에서 비교적 강점을 지니는 부문은 선도화합물 최적화 및 전임상 분야이다. 또한 제네릭 개발 위주의 사업모델로 제형연구, 약물전달연구, 생물학적 동등성 연구 등의 경험이 비교적 많은 편이다. 선도화합물 최적화 단계는 지적 재산권 보호에 있어 매우 중요한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 만들어진 데이터가 물질특허 등록에 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도, 중국에 비해 수십 년 앞선 지적 재산권 보호 제도를 갖고 있는 우리 나라가 차별화할 수 있는 부분으로 보인다.
최근 국내의 임상시험 수준도 크게 개선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02년 17건에 불과하던 다국적 제약사들의 국내 임상시험 건 수는 2006년 108건으로 크게 늘었다. 국내 제약사들의 임상시험 또한 2002년 38건에서 2006년 110건으로 증가했다. 국내 임상시험 전문 CRO인 씨앤알리서치에 의하면 국내 CRO 산업규모는 500억 원 정도이고, 해마다 30% 이상의 고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다국가 임상시험을 포함한 임상시험 승인건수가 증가하면서 이 같은 성장세는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국내 CRO는 아직 규모나 사업범위 면에 있어 해외 CRO에 비해 경쟁력이 약한 편이다. 대부분의 CRO 기업이 임상시험 위주의 사업을 영위하고 있어 임상시험 이외의 R&D 단계에 대한 아웃소싱도 흔치 않고, 해외 진출도 활발하지 않아 국내 제약사가 해외에서 제품 허가를 받기 위해서는 해외의 CRO를 이용해서 임상시험을 수행해야 하는 실정이다.
글로벌시장을 겨냥한 차별적 사업모델 필요
국내 제약사들이 새로운 수익 창출 대안으로서 CRO 사업을 고려할 때, 국내 임상시험 시장만을 겨냥해서 기존의 국내 CRO 업체들과 경쟁하는 것은 바람직한 전략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국내 대형 제약사들의 경우 CRO 업체들에 비해 자금력이 좋고 이미 인도, 중국 등에 지사를 설립한 사례도 많다. 따라서 과감하게 인도, 중국 등에 진출하여 그들과 우리의 강점을 융합하는 전략을 채택하여야 할 것이다. 진출 방법으로는 지사를 이용한 자체 설립, 인도, 중국 CRO의 인수합병, 선진 CRO와의 파트너쉽 구축 등을 고려할 수 있다.
사업모델 면에서는, 자체적으로 강점을 가지는 R&D 단계에 집중하여 ‘니치 서비스’ 모델로 먼저 사업을 시작하고, 점차적으로 사업범위를 확대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된다. 사업범위의 확장을 위해서는 한국, 인도, 중국이 공통적으로 부족한 분야인 바이오 의약품 R&D 관련 기술을 습득하는 등 끊임 없이 기술적 발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CRO 경험이 없는 국내 제약사 입장에서, 고객을 확보하고 성공 케이스를 축적해 나가는 것이 용이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경우 단순히 ‘서비스 제공자’의 역할만을 하는 것보다는 ‘협력 관계 구축’의 계약형태가 더 유리할 수 있다. 협력 관계 구축의 경우 CRO가 신약개발 프로젝트에 따르는 위험을 일정 부분 공유하고, 프로젝트의 성공 여부에 따라 지적 재산권을 공유하거나 기술료를 추가로 받게 된다. 서비스를 제공 받는 제약사 및 바이오텍 회사 입장에서는 위험을 분산하는 효과가 있고, CRO 입장에서는 장기적 수익 창출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제약사에서 설립한 CRO의 경우 국내외에서 영업/마케팅 기반을 갖고 있으므로 판권 공유를 통해 직접 판매를 함으로써 제품 포트폴리오 강화의 기회로 삼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다.
CRO 사업은 수익창출 대안이 될 뿐만 아니라 자체 R&D 역량을 제고할 수 있는 수단과 해외시장 진출의 기회를 제공한다. 따라서, 동일한 사업모델로 국내에서만 과당경쟁을 벌이고 있는 우리의 제약사들이 주목할 만하며, 이를 위한 정부의 정책적, 경제적 지원 또한 필요하다고 하겠다.
- LG 경제연구원 2007.11.21
약제비 적정화 방안, 한미 FTA 등 정책변화로 최근 국내 제약 업계는 사업 환경 전반에 걸쳐 중대 위기를 맞고 있다. 약가 인하 및 지적 재산권 보호가 더욱 강조되는 정책 변화 속에서, 국내 제약사들이 제네릭(복제약) 중심의 사업모델만으로 지속적인 성장을 유지하기가 매우 어려워질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수익 창출 대안을 발굴하고 사업모델을 개선해야 하는데, 그 대안의 하나로 CRO(Contract Research Organization, 연구개발 대행 기업)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R&D 생산성 저하로 각광받는 CRO
제약 업계의 위기는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전세계 제약 업계는-연 매출이 수백 억 달러에 달하는 다국적 제약사부터 소규모 바이오텍 회사에 이르기까지- 정부의 약가 인하 정책, 더욱 엄격해진 의약품 허가 과정, R&D 생산성 저하 등으로 인해 큰 위협을 받고 있다. 이에 제약사들은 전 가치사슬(Value Chain)에 걸쳐 효율성 향상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그 일환으로 아웃소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제약 업계의 아웃소싱이 다른 산업분야와 큰 차이를 보이는 점은 핵심분야인 R&D에 있어서도 활발하게 아웃소싱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제약 산업의 경우 타 산업분야와 달리 제품 당 R&D 과정이 매우 길고 높은 비용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한 개의 의약품을 개발하는 데 드는 R&D 비용은 1970년대 1억 4천만 달러에서 2000년대에는 8억 달러로 크게 늘어났다. 전체 R&D 기간(판매허가 기간 포함)도 1970년대 11년에서 1990년대 14년으로 증가하였다. 미국은 전체 R&D 기간을 줄이기 위해 1992년부터 신약허가 업무를 담당하는 FDA(식품의약품안전청)의 업무 인력을 증원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지만, 임상시험의 수, 기간 및 참여 환자수의 증가 때문에 전체 기간은 크게 줄어들지 않고 있다.
의약품의 물질특허는 제품 허가 시점이 아닌 특허 출원 시점을 기준으로 기간을 산정한다. 따라서 전체 R&D 기간이 길어져서 제품 허가가 늦어질수록 제네릭의 공격 없이 독점적으로 제품을 판매할 수 있는 기간이 짧아진다. 제약 R&D에 있어 비용뿐만 아니라 속도가 매우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제약 산업의 R&D 단계에 대해서는 <그림 1> 참조).
또한 급속한 기술 발전에 따라 R&D에 필요한 모든 역량과 기술을 한 회사가 소유하는 것이 힘들어졌다. 새로운 기술이 소개될 때마다 제약사가 관련 인력을 채용하고 고가의 실험기구를 모두 구입하는 것은 너무 위험이 크고 비용 부담 또한 적지 않다. 그러다 보니 각 제약사는 자체의 강점을 지니고 있는 핵심 R&D 부문은 내부적으로 수행하고 나머지 부문은 R&D 아웃소싱을 전담하는 연구개발 대행 기업, 즉 CRO에 의존하여 비용, 속도 면에서 더 높은 효율성을 추구하게 되었다.
이러한 추세에 따라, 1970년대 임상시험 대행 업무 위주로 시작된 CRO의 업무범위는 질환 타겟 선정 및 검증, 선도화합물 발굴 및 최적화, 제형 개발, 임상데이터 수집 및 통계 분석, 허가 업무 지원 등 R&D의 전 단계로 매우 다양해졌다. 그 결과 최근 CRO 시장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세계 CRO 시장규모는 2000년 이후 연평균 14%로 성장하여 2006년 약 140억 달러에 달했고, 향후에도 지속적으로 성장하여 2010년에는 24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그림 2> 참조).
CRO의 다양한 사업모델
CRO의 사업모델은 크게 ‘풀 서비스(Full Service)’ 모델과 ‘니치 서비스(Niche Service)’ 모델로 나눌 수 있다. 비교적 역사가 짧거나 규모가 작은 CRO들의 경우 R&D 단계 중 특정 부문에 대한 전문성 또는 특정 질환, 특정 지역에서의 전문성을 기반으로 하는 ‘니치 서비스’ 모델로 시장에 참여한다. 이들은 대형 CRO에 비해 유연하고, 개별 프로젝트에 더 심도 있게 집중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니치 서비스’ 모델의 CRO들은 역사와 규모가 축적됨에 따라 사업범위를 점차 확대해 ‘풀 서비스’ CRO로 발전해 나가기도 한다.
Quintiles, Paraxel 등의 대규모 CRO들은 1980년대 초반에 설립되어 여러 건의 기업인수를 거쳐 크게 성장했다. 이들은 전임상, 임상시험, 임상데이터 관리 등의 ‘개발’ 관련 서비스를 모두 제공하고, 때로는 영업/마케팅 업무까지 지원한다. 각국의 지사 또는 파트너사를 이용한 대규모 다국가 임상시험 경험 및 다수의 의약품 허가 경험 등을 주요 강점으로 하지만, 잦은 인수합병 및 큰 조직 규모에서 비롯되는 업무 효율성 저하의 문제점을 안고 있다.
‘니치 서비스’를 시작으로 사업범위를 확대해 나가는 CRO의 예로 중국의 Wuxi PharmaTech을 들 수 있다. 2001년 상하이에 설립된 Wuxi는 세계 Top 20 제약사 중 18개와 계약을 체결하면서 현재 중국 제일의 CRO로 떠올랐다. Wuxi는 설립 초기, 질환 타겟을 조절하여 치료효과를 낼 수 있는 물질을 발굴하고 그 구조를 변화시켜 치료 효과와 타켓 선택성을 최적화하는 ‘선도화합물 발굴 및 최적화’ 서비스에 집중하였다.
세계 최대 제약사의 하나인 Merck와의 계약 내용을 예로 들면, 선도화합물 최적화 단계를 위한 새로운 ‘화합물 은행(Chemical Library)’을 만들기로 합의하였다. 사업 경험이 축적됨에 따라 Wuxi는 공정개발 및 약품원료(API, Active Pharmaceutical Ingredient) 생산 등으로 업무 범위를 확대하였다. 최근 3년간 Wuxi의 연평균 매출 증가율은 83%, 영업이익 증가율은 41%에 달하고 있다. 2006년 매출 7천만 달러, 영업이익 1천만 달러를 기록한 이 회사의 2007년 상반기 매출은 6천 4백만 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129%의 성장을 이루었고, 영업이익은 1천 3백만 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343% 성장하는 등 성장세가 시간이 흐를수록 가속화되고 있다.
불분명해지는 제약사와 CRO의 경계
CRO와 제약사 간의 경계가 무너지는 경우도 나타나고 있는데, 인도의 Biocon Limited가 대표적인 예이다. 제약사인 Biocon은 ‘연구’ 단계(선도화합물 최적화)에 집중하여 서비스를 제공하는 Syngene 및 ‘개발’ 단계(임상시험)에 집중하여 서비스를 제공하는 Clinegene을 자회사로 설립하였다. Biocon은 자체 R&D를 통해 의약품을 출시할 뿐만 아니라 CMO(Contract Manufacturing Organization, 제조 대행 기업)로서 생산 대행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 2006년 전체 매출은 약 2억 2천만 달러로 전년 대비 25% 성장하였고, 20%를 웃도는 영업 이익률을 기록하고 있다. 제약사가 소유하는 CRO의 다른 예로는 2005년 세계 4위의 제네릭 회사인 Actavis에 의해 인수된 인도의 Lotus Labs를 들 수 있다. Lotus는 인수된 이후 기존 CRO 사업을 계속하면서, Actavis가 필요로 하는 R&D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인도의 Suven Life Sciences와 같이 CRO로 시작하여 제약사로 성장하는 사례도 볼 수 있다. 이 회사는 1984년 설립 후 정밀화학 중간체 사업을 하다가 1990년대 초반 CMO로 사업모델을 전환하였고, 2000년대 초반부터 CRO 사업도 시작하여 세계 유수의 제약사인 Eli Lilly 등을 고객으로 확보하였다. 이 회사의 2006년 매출은 2,500만 달러로, 전년 대비 30%의 성장을 이루었다. Suven은 매출의 약 20%를 R&D에 투자하여 자체의 R&D 파이프라인도 가지고 있다. 자체 연구개발이 결실을 맺기 시작하면 다른 제약사에 판권을 팔거나 자체 마케팅/영업을 하는 제약사의 모습을 갖출 것이다.
인도와 중국, CRO의 큰 손으로 부상
R&D 아웃소싱은 과거에는 선진국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R&D 비용과 속도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인도, 중국 등 개발도상국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임상시험의 경우, 인도나 중국에서 시행하면 가격 경쟁력뿐만 아니라 임상기간 단축의 이점까지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가장 먼저 확대되기 시작했다. 이들 나라의 제약 산업이 제네릭 위주의 사업에서 신약 R&D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전환하고, 지적 재산권 보호에 대한 정책적 노력이 가시적 성과를 얻으면서 선도화합물 최적화 등의 ‘연구’ 단계 아웃소싱 또한 증가하고 있다.
인도의 CRO 산업은 1990년대 후반에 시작되어 최근 급격히 성장하고 있다. 전세계CRO 산업규모가 2000년대에 연평균 14%의 성장률을 보인데 반해, 인도의 CRO 산업규모는 연평균 70%대의 성장을 계속해 왔다. 2006년 인도 CRO 산업규모는 약 2억 달러이고, 이는 지속적으로 성장하여 2010년에는 10억 달러를 초과할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의 CRO 사업은 1990년대 중반에 시작되었고, 산업규모는 4,000~6,300만 달러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인도에 비해서는 아직 뒤쳐져 있지만, A.T. Kearney의 보고서에서 가장 선호되는 임상시험 아웃소싱 지역으로 선정되는 등 입지가 점점 강화되고 있다.
인도와 중국이 CRO 사업에서 지닌 강점은 가격 경쟁력과 풍부한 인력 및 높은 시장 잠재력이다. 화학 박사학위를 가진 연구인력의 연봉이 미국에서는 9만~ 11만 달러인 반면, 중국에서는 2만~2만 5천 달러이다. 풍부한 환자군이 뒷받침 되는 만큼 임상시험 비용도 저렴하다. 인도의 경우 선진국에 비해 1/2 이하의 비용으로 임상시험을 진행할 수 있다.
전세계 제약 매출을 집계하여 보고하는 IMS Health에 의하면, 2006년 기준 세계 제약 시장에서 차지하는 중국의 시장규모는 9위이고, 인도는 14위이다. 인구와 경제성장률을 고려할 때 이 순위는 꾸준히 올라갈 것으로 예상되어 CRO로서뿐만 아니라 의약품 소비국으로서 인도, 중국의 중요성도 점차 커지고 있다.
인도, 중국이 신약연구에서 강점을 가지는 부분은 화학(Chemistry) 분야이다. 따라서 임상시험 외에 이들 나라에 주로 아웃소싱되는 분야는 선도화합물 최적화 단계이다. 인도는 세계적인 제네릭 개발국가인 만큼 제형 기술이나 약물 전달 기술 등이 중국에 비해 뛰어나고, IT 역량이 뛰어나 임상데이터 관리에 있어서도 강점을 지닌다. 영어를 공식언어로 사용하는 것도 큰 강점으로 꼽을 수 있다. 중국은 인도에 비해서는 유전체학 부문에 좀 더 높은 역량을 보유하여, 인간의 유전자 정보를 밝혀낸 ‘인간 게놈 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또한 전임상 단계에 있어서도 인도에 비해 강점을 지닌다.
아직 미국, 유럽의 제약사들이 인도, 중국의 역량을 충분히 활용하지 않고 있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지적 재산권 보호 이슈이다. 인도는 2005년, 중국은 2004년부터 국제적 수준(TRIPS, Agreement on Trade Related Aspects of Intellectual Property Rights, 무역 관련 지적 재산권 협정)에 부합하는 지적 재산권 보호를 위한 법률을 입안하였다. 이에 따라 지적 재산권 보호가 큰 개선을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만족할 만한 수준은 못 되어, 2007 Annual Special 301 Report에서 여전히 Priority Watch List(우선감시대상국 리스트)에 올라 있다. Annual Special 301 Report는 미국 무역대표부에서 국가 별 지적 재산권 보호 정도를 평가하여 Priority Watch List, Watch List(감시대상국 리스트) 등으로 분류하는 보고서이다. 향후 인도, 중국의 지적 재산권 보호 체제가 더욱 정착되고 정부정책의 투명성이 제고되면 이들 국가에서의 CRO 사업 전망은 한층 밝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국내 CRO 산업 경쟁력 취약
R&D 단계 중 국내에서 비교적 강점을 지니는 부문은 선도화합물 최적화 및 전임상 분야이다. 또한 제네릭 개발 위주의 사업모델로 제형연구, 약물전달연구, 생물학적 동등성 연구 등의 경험이 비교적 많은 편이다. 선도화합물 최적화 단계는 지적 재산권 보호에 있어 매우 중요한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 만들어진 데이터가 물질특허 등록에 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도, 중국에 비해 수십 년 앞선 지적 재산권 보호 제도를 갖고 있는 우리 나라가 차별화할 수 있는 부분으로 보인다.
최근 국내의 임상시험 수준도 크게 개선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02년 17건에 불과하던 다국적 제약사들의 국내 임상시험 건 수는 2006년 108건으로 크게 늘었다. 국내 제약사들의 임상시험 또한 2002년 38건에서 2006년 110건으로 증가했다. 국내 임상시험 전문 CRO인 씨앤알리서치에 의하면 국내 CRO 산업규모는 500억 원 정도이고, 해마다 30% 이상의 고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다국가 임상시험을 포함한 임상시험 승인건수가 증가하면서 이 같은 성장세는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국내 CRO는 아직 규모나 사업범위 면에 있어 해외 CRO에 비해 경쟁력이 약한 편이다. 대부분의 CRO 기업이 임상시험 위주의 사업을 영위하고 있어 임상시험 이외의 R&D 단계에 대한 아웃소싱도 흔치 않고, 해외 진출도 활발하지 않아 국내 제약사가 해외에서 제품 허가를 받기 위해서는 해외의 CRO를 이용해서 임상시험을 수행해야 하는 실정이다.
글로벌시장을 겨냥한 차별적 사업모델 필요
국내 제약사들이 새로운 수익 창출 대안으로서 CRO 사업을 고려할 때, 국내 임상시험 시장만을 겨냥해서 기존의 국내 CRO 업체들과 경쟁하는 것은 바람직한 전략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국내 대형 제약사들의 경우 CRO 업체들에 비해 자금력이 좋고 이미 인도, 중국 등에 지사를 설립한 사례도 많다. 따라서 과감하게 인도, 중국 등에 진출하여 그들과 우리의 강점을 융합하는 전략을 채택하여야 할 것이다. 진출 방법으로는 지사를 이용한 자체 설립, 인도, 중국 CRO의 인수합병, 선진 CRO와의 파트너쉽 구축 등을 고려할 수 있다.
사업모델 면에서는, 자체적으로 강점을 가지는 R&D 단계에 집중하여 ‘니치 서비스’ 모델로 먼저 사업을 시작하고, 점차적으로 사업범위를 확대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된다. 사업범위의 확장을 위해서는 한국, 인도, 중국이 공통적으로 부족한 분야인 바이오 의약품 R&D 관련 기술을 습득하는 등 끊임 없이 기술적 발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CRO 경험이 없는 국내 제약사 입장에서, 고객을 확보하고 성공 케이스를 축적해 나가는 것이 용이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경우 단순히 ‘서비스 제공자’의 역할만을 하는 것보다는 ‘협력 관계 구축’의 계약형태가 더 유리할 수 있다. 협력 관계 구축의 경우 CRO가 신약개발 프로젝트에 따르는 위험을 일정 부분 공유하고, 프로젝트의 성공 여부에 따라 지적 재산권을 공유하거나 기술료를 추가로 받게 된다. 서비스를 제공 받는 제약사 및 바이오텍 회사 입장에서는 위험을 분산하는 효과가 있고, CRO 입장에서는 장기적 수익 창출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제약사에서 설립한 CRO의 경우 국내외에서 영업/마케팅 기반을 갖고 있으므로 판권 공유를 통해 직접 판매를 함으로써 제품 포트폴리오 강화의 기회로 삼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다.
CRO 사업은 수익창출 대안이 될 뿐만 아니라 자체 R&D 역량을 제고할 수 있는 수단과 해외시장 진출의 기회를 제공한다. 따라서, 동일한 사업모델로 국내에서만 과당경쟁을 벌이고 있는 우리의 제약사들이 주목할 만하며, 이를 위한 정부의 정책적, 경제적 지원 또한 필요하다고 하겠다.
- LG 경제연구원 2007.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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