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면 성실은 미친짓이다” 거꾸로 본 창조경영
21세기에 가장 불쌍한 사람은 근면성실하기만 한 사람이다. 왜? 근면, 성실해서 되는 일들은 이제 기계가 다 대신해주기 때문이다. 기업에서 구조조정할 때, 가장 먼저 정리되는 부서는 근면성실하기만 한 부서다. 그런 종류의 일들은 이제 아웃소싱으로 해결하는 편이 훨씬 경제적이다. 우리가 1960, 1970년대에 중동달러를 벌기 위해 나갔던 것처럼, 우리보다 훨씬 근면 성실한 외국인 노동자들이 줄 서서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도 기업의 CEO들은 직원들에게 여전히 근면, 성실하라고 한다. 고속성장의 산업화 시대에서 성공을 경험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아침형 인간’은 가라
21세기를 20세기적으로 경영하는 한국식 언밸런스(unb alance)의 압권은 ‘아침형 인간’이다. 남들보다 먼저 일어나면 성공한다는 이야기에 이 땅의 사내들은 흥분하여 다시 허리띠를 부여잡는다. “그래. 우리는 새벽종이 울리면 너도 나도 일어났어. 맞아. 그래야만 해.” 이제까지 참고 인내하는 삶을 살아온 사내들은 오래된 ‘새벽의 추억’을 되살린다. 성공은 하고 싶은데, 아는 방식이라고는 근면성실한 것 밖에 없다. 아, 그러나 내가 이미 알고 있는 방식으로는 절대 성공하지 못한다. 그 방식이 옳다면 이미 성공했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해하지 말자. 근면, 성실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참고 인내하는 방식으로 근면, 성실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사는 게 재미있으면, 일하는 게 재미있으면 근면, 성실하지 말라고 해도 근면, 성실해진다. 순서를 바꾸라는 이야기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는 거짓말이다. 인내가 쓰면, 열매도 쓰다. 도대체 열매의 단 맛을 겪어 봤어야 그 단맛을 즐길 것 아닌가. 21세기는 지금 행복한 사람이 나중에도 행복하다. 지금 사는 게 재미있는 사람이 나중에도 재미있게 살 수 있다. 21세기의 핵심가치는 ‘재미’다. 노동기반사회의 핵심원리가 근면, 성실이라면 지식기반사회를 구성하는 핵심원리는 재미다. 새로운 지식은 재미있을 때만 생겨난다.
지식은 정보와 정보들의 관계다. 저 유명한 러시아 심리학자 루리아(Luria)의 실험을 예로 들어보자. ‘도끼, 망치, 나무, 톱’. 이 네 가지 중에서 하나를 빼라면 당신은 무엇을 빼겠는가? 대부분의 고등교육을 받은 이들은 나무를 뺀다. 다른 것들은 도구이고, 나무만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는 ‘도구’와 ‘대상’이라는 하는 ‘추상적 지식(abstract knowledge)’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똑같은 질문을 러시아 벌목공들에게 던지면 이들은 잠시 고민하다가 망치를 뺀다. 왜? 나무 없는 도구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다 필요하겠지만 구태여 하나를 빼라면 상대적으로 불필요한 망치를 빼겠다는 것이다.
벌목이라고 하는 것은 ‘실천적 지식(practical knowle dge)’이다. ‘도끼, 망치, 나무, 톱’이라는 동일한 정보들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관계 짓는 추상적 지식과 실천적 지식, 이 두 가지는 전혀 다른 지식체계다.
21세기는 이렇게 전혀 다른 지식체계들 간의 경쟁이다. 누가 먼저 정보와 정보들의 관계를 뒤흔들어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 내는가에 따라 생존이 결정된다.
■‘재미’를 부활시켜라
정보와 정보들의 관계, 즉 지식은 인지체계다. 연역법과 귀납법에 기초한 인지체계는 외부충격 없이는 절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사례에서 법칙으로, 혹은 법칙에서 사례로 끝없이 순환하기 때문이다. 한동안 유행했던 컴퓨터와 인간의 뇌를 비교하는 연구가 오늘날 더 이상 관심을 끌지 못하는 까닭도 ‘새로운 것’의 출현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컴퓨터의 알고리즘에서 새로운 것은 나오지 않는다. 정보와 정보의 관계를 뒤흔들어 새로운 것을 나오게 하는 것은 정서적 충격이다. 이를 퍼스(Peirce)는 ‘유추법’이라 했다.
창의적 인간들의 공통된 특징은 정서적 충격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천재로 알려진 이들의 대부분은 성격이 괴팍하거나, 정신질환에 시달리거나 동성연애자들이다. 혹은 변태적 취미를 숨어서 즐기기도 한다. 남들과는 다른 정서적 경험이 새로운 인지체계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위대한 예술작품의 배후에는 항상 이런 종류의 고통스러운 경험이 숨겨져 있다. 하지만 창의적 존재가 되겠다고 느닷없이 동성연애자가 되거나 변태적 취미를 찾아 나설 수는 없는 일이다.
고통과 같은 부정적 정서만이 인지체계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재미와 감동과 같은 긍정적 정서도 그 효과는 동일하다. 근대성은 재미와 감동이라는 긍정적 정서의 억압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이전 세대의 천재들은 괴롭고 고독했다. 그러나 21세기는 억압되었던 재미와 행복이라는 가치의 복원에서 출발한다. 최근 한 연구에 의하면, 미국의 잘 알려진 천재들은 한결같이 ‘가벼운 조증(hypermania)’을 앓고 있다고 한다. 즐거워서 어쩔 줄 모른다는 이야기다.
한국사회의 창조적 전환은 재미라는 가치의 복원에서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까지 재미있으면 죄의식을 느끼도록 사회화되었다. 행복하면 죄의식을 느끼도록 의식화되었다. 그러니 ‘창조경영’, ‘창의적 발상’을 이야기하면서도 ‘아침형 인간’이 될 것을 강요하는 황당한 모순에 빠지는 것이다.
창조경영을 이야기하면서 근면, 성실을 주장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기뻐 즐거워 어쩔 줄 모르는 축제적 삶이 우리의 미래를 구원해준다. 가슴 벅찬 감동의 예술적 경험만이 귀납법과 연역법의 무한 순환에서 우리를 구원해준다. 일터는 예술가의 작업장이 되어야 한다. 아침형 인간은 가라!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12/07/2007120702125.html
'Business > ~2007'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래 조직의 성공 키워드 (0) | 2007.12.10 |
---|---|
“CEO들이여, 예술을 즐겨라” (0) | 2007.12.09 |
How to Build a B2B Brand (0) | 2007.12.03 |
A Better Way to Deliver Bad News (0) | 2007.12.03 |
물류시설 투자회사 ‘AMB’하미드 모하담 회장 (0) | 2007.12.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