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3. 30. 06:40
[Business]
최근 기상 이변으로 농작물 작황이 나빠지고, 이로 인한 곡물 가격 상승이 물가 상승을 견인하는 ‘애그플레이션’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농산물 가격이 상승추세를 이어 간다면 농산물의 상품적 가치, 농업의 투자적 가치는 과거와 달라질 것이다. 미래 먹거리 확보
차원에서도 농업을 보는 시각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기상 이변으로 농작물 작황이 나빠지면서 전세계적으로 국제 곡물 가격이 급등하고 이로 인해 물가가 상승하는 ‘애그플레이션(Agflation)’ 현상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애그플레이션이란 농업을 뜻하는 애그리컬쳐(Agriculture)와 물가 상승을 의미하는 인플레이션(Inflation)의 합성어로 국제 곡물 가격의 상승이 식품 가격 전반의 상승을 유발, 물가 인상을 초래하는 현상을 말한다.
이 용어가 처음 언론을 통해 알려진 것은 지난 2007년이었다. 기후 변화에 따른 생산량 감소와 신흥국의 소비 증가, 옥수수를 활용한 바이오 에탄올 수요 등이 맞물리면서 전세계적으로 곡물 재고가 감소하고 가격이 급등, 애그플레이션이라는 용어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후 2008년 중반까지 곡물 가격이 가파르게 상승하면서 애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졌으나, 금융위기로 수요가 감소하면서 곡물 가격이 한동안 떨어지는 듯 했다. 그러나 최근 농산물 가격이 급속하게 상승하여 최고가를 경신하면서 애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잉여(剩餘)의 시대에서 부족(不足)의 시대로
금년 3월 유엔식량농업기구(FAO, Food and Agriculture Organization of the United Nations)는 전 세계 식품가격지수(Food Price Index)가 236을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작년 6월 이후 8개월 연속 상승세를 보이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식품가격지수를 집계하기 시작한 1990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한 것이다. 애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던 2008년 6월의 213.5에 비해서도 크게 상승한 수치다. 국제 상품 시장에서 밀 가격은 최근 1년 새 58% 올랐고 옥수수는 87%나 급등했다. 육류도 같은 기간 20% 이상 상승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애그플레이션 현상이 발생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일시적인 기후변화나 국지적인 공급부족이 원인이라면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세계 식량 사정이 그렇지 못하다는 점이다. 전세계 곡물 시장은 지난 1950년 이후 원활한 공급 덕분에 60년 가까이 장기 하락세를 보여왔다. 그러나 2000년 대 중반 이후 서서히 상승세로 돌아서면서 국제 곡물 가격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과거 60년간을 ‘잉여(剩餘)의 시대’라고 한다면 이제는 ‘부족(不足)의 시대’로 전환되면서 애그플레이션이 일시적 현상이 아닌 추세적 상황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주요 원인은 중국, 인도 등 신흥국의 인구가 증가하고 생활 수준이 높아지면서 식량 수요는 급증하는데 반해 이를 생산이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최근 기상이변에 따른 공급감소, 유가 상승에 따른 운송비 상승이 더해지면서 가격 상승을 부채질하고 있다. 지난 30년 간 농기계 보급이 확산되고 관개시설이 개선되면서 단위 면적당 세계 곡물 생산량은 62% 정도 늘어났다. 그러나 이제는 급증하는 수요를 감당하기에 역부족이다. 전세계적으로 올해 곡물 수급은 5억 3000만 톤 정도 부족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국제식량정책연구소(IFPRI, International Food Policy Research Institute)는 지난해 말 멕시코 칸쿤에서 열린 기후변화협약 총회에서 향후 수십 년 간 기후변화로 인해 심각한 식량부족과 유례없는 농산물 가격 폭등이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러한 우려 속에서 주요 수출국들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농작물 수출을 억제하고, 비축을 늘리는 추세가 확산되고 있다. 지난해 러시아,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등이 밀 등 주요 곡물의 수출금지나 제한 조치를 취했으며, 미얀마 정부는 자국 식품의 가격 상승을 막기 위해 쌀 수출을 금지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주로 석유, 희소금속과 같은 천연자원에 대한 자원민족주의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았으나 이제는 식량 부족에 대한 대비책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미래 먹거리가 걱정되는 우리의 현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녹록하지 않다. 식량자급률은 낮아 국제 곡물 가격 변동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곡물 메이저에 대한 의존성도 높아 독자적인 조달 시스템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절실할 때 필요한 만큼의 식량을 확보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음을 의미한다.
● 최하위 수준의 식량 자급률
농림수산식품부에 따라면 우리나라의 곡물 자급률(사료용 포함)은 2009년 기준 26.7%에 불과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들 중 최하위 수준이다. 1990년대 우루과이라운드(UR) 이후 급격히 하락하면서 2005년 이후 계속 30% 미만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쌀(101.1%)를 제외하고 보리(44.3%), 콩(32.5%), 옥수수(4%), 밀(0.9%) 등의 자급률은 매우 낮은 상황이다. 쌀의 경우 생산량은 넘치는 데 식생활 변화로 소비량이 줄어들면서 재고량이 140만 톤에 달하고 있다. 곡물 수급의 불균형 상태가 심화되면서 쌀을 쌓아두고도 다른 곡물을 계속 수입해야 하는 실정이다. 이에 반해 2005년 기준 OECD 회원국들의 평균 곡물 자급률은 110%이며 호주와 캐나다의 곡물 자급률은 각각 275%, 174%나 된다.
낮은 식량 자급률로 인해 우리나라는 국제 곡물가격 변동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국제 식품가격이 상승하면 국내 가격은 더욱 크게 요동친다. 또한 러시아 등 주요 수출국이 식량 수출을 중단하거나 수출량을 제한할 경우 높은 가격을 주고도 식량확보가 어려워질 수 있는 상황이다.
● 수입도 곡물 메이저에 의존
낮은 식량 자급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국내 곡물 생산량을 확대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농지를 확보하고 농작물을 키우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에는 더 많은 기간을 투자해야 한다. 또한 식량 자급률을 높이기 위해 경제성 없는 농산물에 투자하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다. 국제무역이 자유화된 상태에서 경제성 없는 농산물을 유지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자급률만 높고 필요 시 수입할 곳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국내에 기상이변이 발생한다면 오히려 식량 부족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경제성 높은 농작물을 개발하는 노력과 더불어 필요할 때 언제나 수입할 수 있는 글로벌 조달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는 곡물 수입의 상당부분을 주요 곡물 메이저에 의존하고 있다. 2009년 기준 국내 수입 옥수수의 87%, 밀의 61%를 곡물 메이저를 통해 수입한다. 특히 세계 최대 곡물 유통업체인 미국의 카길(Cargil)은 국내 옥수수 수입 물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나라 곡물 수입 물량 가운데 4분의 3을 옥수수와 밀이 차지하는 것을 고려하면 그 비중이 얼마나 높은지 알 수 있다. 식생활이 서구화되면서 육류나 빵 소비가 증가, 사료용으로 쓰이는 옥수수와 빵의 주재료인 밀의 수입이 늘어난 결과다.
이와 같이 곡물 수입을 외국의 소수 몇 개 업체에 의존하다 보니 결국 가격 협상력이 약해지게 된다. 특히 곡물 메이저의 경우 전세계 곡물 유통망을 장악하고 곡물 가격을 좌지우지한다는 비판이 존재하는 점을 감안하면 이들 기업에 의존하는 우리의 식량 수급 시스템에 대한 우려가 더욱 커질 수 밖에 없다.
글로벌 관점에서 농업을 육성해 온 일본
일본의 곡물 자급률은 28% 수준으로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와 같이 애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을 법하다. 그러나 속내를 보면 큰 차이를 보인다. 일본은 농업에 있어서도 척박한 자국 내 상황을 탓하기 보다는 글로벌 시각을 가지고 준비해 왔다. 1970년대부터 젠노와 종합상사를 중심으로 글로벌 조달 시스템을 구축하고, 브라질 등 해외에 생산기지를 확보하고 있으며 식물공장 등 신농법을 개발해 농업 경쟁력을 강화하는 등 글로벌 관점에서 농업을 육성하고 있다.
① 글로벌 조달 시스템 구축
우리의 농협중앙회에 해당하는 젠노는 197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 대형 저장·유통 시설을 확보, 자체적으로 글로벌 조달 시스템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1988년에는 미국의 곡물 기업인 CGB(Consolidate Grain & Barge)를 인수하여 미국에 확고한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미쓰비시, 이토추, 마루베니 등 종합상사들도 다국적 곡물 메이저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곡물 유통 시장에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다. 미쓰비시는 1980년대 중반부터 미국 내 저장시설에 본격 투자, 독자적인 조달 시스템을 구축했으며 이토추상사는 중국에서 생산되는 곡물을 선점하기 위해 중국 최대 곡물기업인 중량그룹과 제휴하고 있다. 마루베니 상사도 중국 국영업체인 시노그레인과 합작회사를 설립하는 등 가격 변동폭이 큰 대두, 밀, 옥수수 등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② 해외 생산기지 확보
이와 같이 일본은 독자적인 글로벌 조달 시스템을 구축했을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해외 생산기지 확보에도 열을 올리고 있다. 과거 1960~70년대부터 해외 농장에 대한 직접 투자를 시도했으나, 그때는 경험부족으로 실패를 거듭했다. 그러나 지금은 글로벌 조달 시스템 구축을 통해 얻은 경험과 실력을 바탕으로 현지 농장 경영도 점차 확대하고 있다. 미쓰이물산은 브라질에 약 10만ha 규모의 농장을 매입해 운영하고 있으며, 여기에서 올리는 매출만 10억 달러에 육박하고 있다. 아직은 주로 식용으로만 수출하고 있지만 미래에는 현지에서 생산된 사탕수수를 활용하는 바이오에탄올 사업에도 진출할 계획이다.
③ 신농법 개발
또한 식물공장 등 새로운 농법을 이용한 일본 내 농업 경쟁력 향상에도 적극적이다. 1970년대부터 가격 등락이 큰 야채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 기후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는 식물공장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2008년에 식물공장이 이미 50개를 넘어섰다. 시장 규모도 100억 엔에 달한다. 최근에는 인공광을 이용한 완전 제어형 식물공장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며, 태양광이나 전기 배터리와 같은 신기술을 이용해 재배 비용을 낮추려는 시도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식물공장 보급을 확대하기 위해 2008년에만 146억 엔의 보조금을 지급했으며, 2011년에는 식물공장 수를 150여 개로 확대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
정부의 농업에 대한 시각 전환이 밑받침
이와 같이 일본이 우리와 비슷한 상황 속에서도 미래 먹거리 확보에 앞서갈 수 있었던 것은 정부의 농업에 대한 시각 전환이 큰 역할을 했다. 일본 정부는 글로벌 자유 무역 시대에 자국 농민 보호만으로는 더 이상 농업의 경쟁력을 유지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국민의 먹거리 확보라는 중대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판단을 했다. 이에 해외로 시각을 전환함으로써 글로벌 관점에서 새로운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일본의 노력에 대해 2009년 8월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는 ‘자국민의 식량 수요 충족이라는 소극적 차원의 식량 안보에 머무르고 있는 다른 아시아국가들과는 달리 일본은 해외에서 기회를 잡아 글로벌 공급을 직접 통제하겠다는 야심을 보이고 있다’고 분석했다.
최근 일본 정부는 농지법을 개정, 농민만 농지를 소유할 수 있다는 ‘경자유전(耕者有田)’ 원칙을 포기하고 기업도 농지를 소유할 수 있도록 했다. 이미 고령화로 경작을 포기한 농지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자국 내 농업 경쟁력을 유지, 강화하기 위해서는 기업의 참여가 절실하다고 느낀 것이다. 일본의 최대 유통업체인 이온은 농장을 경영하는 ‘아그라창조’라는 자회사를 설립하고 직접 농업 생산에 진출했다. 현재 약 2.6ha(2만 6000㎡)의 직영농장에서 엽채류와 옥수수, 양배추, 완두콩 등을 경작하고 있으며, 생산한 농산물을 자체브랜드(PB)로 판매 중이다. 향후 지속적으로 규모를 늘려 3년 후에는 15ha로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이러한 기업 참여는 일본 내 농업 경쟁력 강화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농업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필요
식량 가격은 우리 생활과 직결된다. 특히 70% 이상을 수입에 의존하는 상황에서 곡물 가격 상승은 물가 상승으로 이어져 우리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차라리 기름값이 오르면 차를 두고 대중교통을 이용한다지만, 먹거리는 가격이 오른다고 줄이기도 어렵다. 특히 생활비의 상당부분을 식료품 구입에 사용하는 서민 생활은 더욱 팍팍해질 수 밖에 없다. 유가 상승이 유전 개발을 가속화시키고 신재생 에너지라는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를 제공한 것처럼 애그플레이션도 농업의 체질을 크게 바꾸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농업을 농업의 시각으로만 바라 보아서는 근본적인 변화는 어려울 것이다. 농산물 가격 상승이 일시적 현상이 아닌 추세적 상황이 될 가능성이 높다면 농업을 단순히 하나의 상품을 생산하는 여러 산업 중 하나가 아니라 국가의 전략적 산업의 하나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국가적으로 현재의 농업 및 곡물 수급 정책을 재점검하고 대안을 되짚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정부에서도 지난 1월 농림수산식품부가 농수산물유통공사(aT)를 주축으로 미국에 국제곡물회사를 설립하고, 이를 기반으로 곡물 메이저에 견줄 수 있는 글로벌 기업을 육성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우리의 곡물 유통 사업은 곡물 메이저뿐만 아니라 일본에 비해서도 많이 부족하지만, 현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안을 찾아가야 할 것이다.
또한 기업 입장에서도 농업을 전통적인 1차 산업으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성장엔진으로서의 가능성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최근 세계적으로 물 부족 현상이 심화되면서 물 산업이 새롭게 조명되듯이 농업에 대한 시각 전환이 필요해 보인다. 농산물 가격이 상승추세를 이어 간다면 농산물의 상품적 가치, 농업의 투자적 가치는 과거와 달라질 것이다. 식물공장이나 유전자 기술 등 새로운 농업 기술을 통한 생산성 혁신 가능성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요즘 곡물 메이저들은 과거와 같이 곡물 유통에만 비즈니스를 한정 짓지 않고 있다. 생산뿐만 아니라 종자 사업에까지 참여하여 식량 산업 전반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곡물 메이저의 영향력이 너무 커져 농업 전반을 장악하게 되면 우리의 운신 폭은 더욱 좁아질 것이다. 글로벌 관점에서 어떻게 미래의 먹거리 경쟁에서 입지를 확보할 수 있을 지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 LG Business Insight 1137호
기상 이변으로 농작물 작황이 나빠지면서 전세계적으로 국제 곡물 가격이 급등하고 이로 인해 물가가 상승하는 ‘애그플레이션(Agflation)’ 현상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애그플레이션이란 농업을 뜻하는 애그리컬쳐(Agriculture)와 물가 상승을 의미하는 인플레이션(Inflation)의 합성어로 국제 곡물 가격의 상승이 식품 가격 전반의 상승을 유발, 물가 인상을 초래하는 현상을 말한다.
이 용어가 처음 언론을 통해 알려진 것은 지난 2007년이었다. 기후 변화에 따른 생산량 감소와 신흥국의 소비 증가, 옥수수를 활용한 바이오 에탄올 수요 등이 맞물리면서 전세계적으로 곡물 재고가 감소하고 가격이 급등, 애그플레이션이라는 용어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후 2008년 중반까지 곡물 가격이 가파르게 상승하면서 애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졌으나, 금융위기로 수요가 감소하면서 곡물 가격이 한동안 떨어지는 듯 했다. 그러나 최근 농산물 가격이 급속하게 상승하여 최고가를 경신하면서 애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잉여(剩餘)의 시대에서 부족(不足)의 시대로
금년 3월 유엔식량농업기구(FAO, Food and Agriculture Organization of the United Nations)는 전 세계 식품가격지수(Food Price Index)가 236을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작년 6월 이후 8개월 연속 상승세를 보이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식품가격지수를 집계하기 시작한 1990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한 것이다. 애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던 2008년 6월의 213.5에 비해서도 크게 상승한 수치다. 국제 상품 시장에서 밀 가격은 최근 1년 새 58% 올랐고 옥수수는 87%나 급등했다. 육류도 같은 기간 20% 이상 상승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애그플레이션 현상이 발생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일시적인 기후변화나 국지적인 공급부족이 원인이라면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세계 식량 사정이 그렇지 못하다는 점이다. 전세계 곡물 시장은 지난 1950년 이후 원활한 공급 덕분에 60년 가까이 장기 하락세를 보여왔다. 그러나 2000년 대 중반 이후 서서히 상승세로 돌아서면서 국제 곡물 가격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과거 60년간을 ‘잉여(剩餘)의 시대’라고 한다면 이제는 ‘부족(不足)의 시대’로 전환되면서 애그플레이션이 일시적 현상이 아닌 추세적 상황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주요 원인은 중국, 인도 등 신흥국의 인구가 증가하고 생활 수준이 높아지면서 식량 수요는 급증하는데 반해 이를 생산이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최근 기상이변에 따른 공급감소, 유가 상승에 따른 운송비 상승이 더해지면서 가격 상승을 부채질하고 있다. 지난 30년 간 농기계 보급이 확산되고 관개시설이 개선되면서 단위 면적당 세계 곡물 생산량은 62% 정도 늘어났다. 그러나 이제는 급증하는 수요를 감당하기에 역부족이다. 전세계적으로 올해 곡물 수급은 5억 3000만 톤 정도 부족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국제식량정책연구소(IFPRI, International Food Policy Research Institute)는 지난해 말 멕시코 칸쿤에서 열린 기후변화협약 총회에서 향후 수십 년 간 기후변화로 인해 심각한 식량부족과 유례없는 농산물 가격 폭등이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러한 우려 속에서 주요 수출국들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농작물 수출을 억제하고, 비축을 늘리는 추세가 확산되고 있다. 지난해 러시아,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등이 밀 등 주요 곡물의 수출금지나 제한 조치를 취했으며, 미얀마 정부는 자국 식품의 가격 상승을 막기 위해 쌀 수출을 금지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주로 석유, 희소금속과 같은 천연자원에 대한 자원민족주의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았으나 이제는 식량 부족에 대한 대비책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미래 먹거리가 걱정되는 우리의 현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녹록하지 않다. 식량자급률은 낮아 국제 곡물 가격 변동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곡물 메이저에 대한 의존성도 높아 독자적인 조달 시스템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절실할 때 필요한 만큼의 식량을 확보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음을 의미한다.
● 최하위 수준의 식량 자급률
농림수산식품부에 따라면 우리나라의 곡물 자급률(사료용 포함)은 2009년 기준 26.7%에 불과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들 중 최하위 수준이다. 1990년대 우루과이라운드(UR) 이후 급격히 하락하면서 2005년 이후 계속 30% 미만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쌀(101.1%)를 제외하고 보리(44.3%), 콩(32.5%), 옥수수(4%), 밀(0.9%) 등의 자급률은 매우 낮은 상황이다. 쌀의 경우 생산량은 넘치는 데 식생활 변화로 소비량이 줄어들면서 재고량이 140만 톤에 달하고 있다. 곡물 수급의 불균형 상태가 심화되면서 쌀을 쌓아두고도 다른 곡물을 계속 수입해야 하는 실정이다. 이에 반해 2005년 기준 OECD 회원국들의 평균 곡물 자급률은 110%이며 호주와 캐나다의 곡물 자급률은 각각 275%, 174%나 된다.
낮은 식량 자급률로 인해 우리나라는 국제 곡물가격 변동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국제 식품가격이 상승하면 국내 가격은 더욱 크게 요동친다. 또한 러시아 등 주요 수출국이 식량 수출을 중단하거나 수출량을 제한할 경우 높은 가격을 주고도 식량확보가 어려워질 수 있는 상황이다.
● 수입도 곡물 메이저에 의존
낮은 식량 자급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국내 곡물 생산량을 확대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농지를 확보하고 농작물을 키우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에는 더 많은 기간을 투자해야 한다. 또한 식량 자급률을 높이기 위해 경제성 없는 농산물에 투자하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다. 국제무역이 자유화된 상태에서 경제성 없는 농산물을 유지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자급률만 높고 필요 시 수입할 곳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국내에 기상이변이 발생한다면 오히려 식량 부족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경제성 높은 농작물을 개발하는 노력과 더불어 필요할 때 언제나 수입할 수 있는 글로벌 조달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는 곡물 수입의 상당부분을 주요 곡물 메이저에 의존하고 있다. 2009년 기준 국내 수입 옥수수의 87%, 밀의 61%를 곡물 메이저를 통해 수입한다. 특히 세계 최대 곡물 유통업체인 미국의 카길(Cargil)은 국내 옥수수 수입 물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나라 곡물 수입 물량 가운데 4분의 3을 옥수수와 밀이 차지하는 것을 고려하면 그 비중이 얼마나 높은지 알 수 있다. 식생활이 서구화되면서 육류나 빵 소비가 증가, 사료용으로 쓰이는 옥수수와 빵의 주재료인 밀의 수입이 늘어난 결과다.
이와 같이 곡물 수입을 외국의 소수 몇 개 업체에 의존하다 보니 결국 가격 협상력이 약해지게 된다. 특히 곡물 메이저의 경우 전세계 곡물 유통망을 장악하고 곡물 가격을 좌지우지한다는 비판이 존재하는 점을 감안하면 이들 기업에 의존하는 우리의 식량 수급 시스템에 대한 우려가 더욱 커질 수 밖에 없다.
글로벌 관점에서 농업을 육성해 온 일본
일본의 곡물 자급률은 28% 수준으로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와 같이 애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을 법하다. 그러나 속내를 보면 큰 차이를 보인다. 일본은 농업에 있어서도 척박한 자국 내 상황을 탓하기 보다는 글로벌 시각을 가지고 준비해 왔다. 1970년대부터 젠노와 종합상사를 중심으로 글로벌 조달 시스템을 구축하고, 브라질 등 해외에 생산기지를 확보하고 있으며 식물공장 등 신농법을 개발해 농업 경쟁력을 강화하는 등 글로벌 관점에서 농업을 육성하고 있다.
① 글로벌 조달 시스템 구축
우리의 농협중앙회에 해당하는 젠노는 197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 대형 저장·유통 시설을 확보, 자체적으로 글로벌 조달 시스템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1988년에는 미국의 곡물 기업인 CGB(Consolidate Grain & Barge)를 인수하여 미국에 확고한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미쓰비시, 이토추, 마루베니 등 종합상사들도 다국적 곡물 메이저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곡물 유통 시장에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다. 미쓰비시는 1980년대 중반부터 미국 내 저장시설에 본격 투자, 독자적인 조달 시스템을 구축했으며 이토추상사는 중국에서 생산되는 곡물을 선점하기 위해 중국 최대 곡물기업인 중량그룹과 제휴하고 있다. 마루베니 상사도 중국 국영업체인 시노그레인과 합작회사를 설립하는 등 가격 변동폭이 큰 대두, 밀, 옥수수 등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② 해외 생산기지 확보
이와 같이 일본은 독자적인 글로벌 조달 시스템을 구축했을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해외 생산기지 확보에도 열을 올리고 있다. 과거 1960~70년대부터 해외 농장에 대한 직접 투자를 시도했으나, 그때는 경험부족으로 실패를 거듭했다. 그러나 지금은 글로벌 조달 시스템 구축을 통해 얻은 경험과 실력을 바탕으로 현지 농장 경영도 점차 확대하고 있다. 미쓰이물산은 브라질에 약 10만ha 규모의 농장을 매입해 운영하고 있으며, 여기에서 올리는 매출만 10억 달러에 육박하고 있다. 아직은 주로 식용으로만 수출하고 있지만 미래에는 현지에서 생산된 사탕수수를 활용하는 바이오에탄올 사업에도 진출할 계획이다.
③ 신농법 개발
또한 식물공장 등 새로운 농법을 이용한 일본 내 농업 경쟁력 향상에도 적극적이다. 1970년대부터 가격 등락이 큰 야채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 기후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는 식물공장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2008년에 식물공장이 이미 50개를 넘어섰다. 시장 규모도 100억 엔에 달한다. 최근에는 인공광을 이용한 완전 제어형 식물공장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며, 태양광이나 전기 배터리와 같은 신기술을 이용해 재배 비용을 낮추려는 시도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식물공장 보급을 확대하기 위해 2008년에만 146억 엔의 보조금을 지급했으며, 2011년에는 식물공장 수를 150여 개로 확대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
정부의 농업에 대한 시각 전환이 밑받침
이와 같이 일본이 우리와 비슷한 상황 속에서도 미래 먹거리 확보에 앞서갈 수 있었던 것은 정부의 농업에 대한 시각 전환이 큰 역할을 했다. 일본 정부는 글로벌 자유 무역 시대에 자국 농민 보호만으로는 더 이상 농업의 경쟁력을 유지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국민의 먹거리 확보라는 중대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판단을 했다. 이에 해외로 시각을 전환함으로써 글로벌 관점에서 새로운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일본의 노력에 대해 2009년 8월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는 ‘자국민의 식량 수요 충족이라는 소극적 차원의 식량 안보에 머무르고 있는 다른 아시아국가들과는 달리 일본은 해외에서 기회를 잡아 글로벌 공급을 직접 통제하겠다는 야심을 보이고 있다’고 분석했다.
최근 일본 정부는 농지법을 개정, 농민만 농지를 소유할 수 있다는 ‘경자유전(耕者有田)’ 원칙을 포기하고 기업도 농지를 소유할 수 있도록 했다. 이미 고령화로 경작을 포기한 농지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자국 내 농업 경쟁력을 유지, 강화하기 위해서는 기업의 참여가 절실하다고 느낀 것이다. 일본의 최대 유통업체인 이온은 농장을 경영하는 ‘아그라창조’라는 자회사를 설립하고 직접 농업 생산에 진출했다. 현재 약 2.6ha(2만 6000㎡)의 직영농장에서 엽채류와 옥수수, 양배추, 완두콩 등을 경작하고 있으며, 생산한 농산물을 자체브랜드(PB)로 판매 중이다. 향후 지속적으로 규모를 늘려 3년 후에는 15ha로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이러한 기업 참여는 일본 내 농업 경쟁력 강화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농업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필요
식량 가격은 우리 생활과 직결된다. 특히 70% 이상을 수입에 의존하는 상황에서 곡물 가격 상승은 물가 상승으로 이어져 우리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차라리 기름값이 오르면 차를 두고 대중교통을 이용한다지만, 먹거리는 가격이 오른다고 줄이기도 어렵다. 특히 생활비의 상당부분을 식료품 구입에 사용하는 서민 생활은 더욱 팍팍해질 수 밖에 없다. 유가 상승이 유전 개발을 가속화시키고 신재생 에너지라는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를 제공한 것처럼 애그플레이션도 농업의 체질을 크게 바꾸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농업을 농업의 시각으로만 바라 보아서는 근본적인 변화는 어려울 것이다. 농산물 가격 상승이 일시적 현상이 아닌 추세적 상황이 될 가능성이 높다면 농업을 단순히 하나의 상품을 생산하는 여러 산업 중 하나가 아니라 국가의 전략적 산업의 하나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국가적으로 현재의 농업 및 곡물 수급 정책을 재점검하고 대안을 되짚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정부에서도 지난 1월 농림수산식품부가 농수산물유통공사(aT)를 주축으로 미국에 국제곡물회사를 설립하고, 이를 기반으로 곡물 메이저에 견줄 수 있는 글로벌 기업을 육성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우리의 곡물 유통 사업은 곡물 메이저뿐만 아니라 일본에 비해서도 많이 부족하지만, 현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안을 찾아가야 할 것이다.
또한 기업 입장에서도 농업을 전통적인 1차 산업으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성장엔진으로서의 가능성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최근 세계적으로 물 부족 현상이 심화되면서 물 산업이 새롭게 조명되듯이 농업에 대한 시각 전환이 필요해 보인다. 농산물 가격이 상승추세를 이어 간다면 농산물의 상품적 가치, 농업의 투자적 가치는 과거와 달라질 것이다. 식물공장이나 유전자 기술 등 새로운 농업 기술을 통한 생산성 혁신 가능성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요즘 곡물 메이저들은 과거와 같이 곡물 유통에만 비즈니스를 한정 짓지 않고 있다. 생산뿐만 아니라 종자 사업에까지 참여하여 식량 산업 전반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곡물 메이저의 영향력이 너무 커져 농업 전반을 장악하게 되면 우리의 운신 폭은 더욱 좁아질 것이다. 글로벌 관점에서 어떻게 미래의 먹거리 경쟁에서 입지를 확보할 수 있을 지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 LG Business Insight 11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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