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2. 15. 09:53
오바마 정부는 현 부시 행정부보다 보호주의 성향이 강한 통상 정책을 펼 것이라는 우려가 가라앉지 않고 있다. 향후 오바마 정부가 선택할 통상 정책의 방향을 짚어보고 그것이 한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 미칠 영향을 점검해 본다.
오바마는 자신의 대선 공약 첫머리에서 ‘미국의 무역은 미국의 경제 활성화와 미국인의 일자리 창출을 위한 것이며, 미국 경제를 위협하는 어떠한 협정도 지지하지 않을 것’ 임을 밝혀둔 바 있다. ‘자유무역이 국가전체의 후생을 극대화시키고 개인에게 최대의 소비 기회를 제공한다’는 교과서적 접근방식이 오히려 국가간 그리고 산업간 불균형이라는 부작용을 낳았다는 시각을 엿볼 수 있다. 신자유주의에 기반한 세계화와 낮은 무역장벽이 미국 경제의 전반적인 성장을 주도해온 것은 분명하지만, 이제는 국내 산업과 고용 시장의 현주소를 냉철히 되돌아봐야 할 때임을 역설한 것으로도 풀이된다.
오바마정부 통상정책이 보호주의 혐의를 받는 근거
오바마의 통상 관련 대선 공약들과 미 의회의 성향을 살펴보면 보호주의적 색채가 강하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첫째, 오바마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무역 불균형의 대표적 사례로 보고, 1994년 1월 발효된 이후 단 한 번도 시도된 적이 없었던 재협상에 대한 의지를 강력하게 천명한 바 있다. 미국에 10년간 850억 달러에 달하는 무역수지 적자(전체 무역적자의 약 20%), 300만 개에 이르는 제조업 일자리 상실(제조업 일자리의 약 17%) 등의 부작용을 안겨주었다는 판단인 것이다. 이는 미국 시장을 과도하게 열어준 후유증이며, 따라서 반드시 재협상을 통해 협정 내용을 대폭적으로 수정해야 한다는 것이 오바마의 입장이다. 그 동안 무책임하고 무분별하게 개방되어 온 미국 시장을 우선 추스리는 것이 국내 일자리 창출과 고용 환경 개선을 이끌어내는 첫걸음이라는 시각이다.
둘째, 오바마는 미국 국민의 일자리 보호 및 창출을 위해 기업 관련 조세정책을 조율할 것임을 강조한 바 있다. 우선, 일자리를 해외로 이전하는 기업들에 대한 조세 지원을 중단할 것임을 공약에 명시했다. 아울러, 본사를 미국 내에 유지하고 설비 확장 등의 노력을 통해 미국 내 일자리를 보호하거나 확충하는 기업, 미국인 노동자 비율을 높이는 기업에게는 ‘애국기업법(Patriot Employer Act of 2007)’을 통해 큰 폭의 세제 혜택을 줄 것을 약속하기도 했다. 미국 기업들의 해외 직접투자(Greenfield Investment) 위축을 초래할 수도 있는 정책이다.
셋째, 전통적으로 보호주의적 성향이 강한 민주당이 12년만에 상·하원을 모두 장악하였다. 노조와 서민·중산층을 지지기반으로 하고 있는 민주당은 부시 행정부가 불공정 무역을 방치한 것을 강하게 비판하며 FTA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을 고수하고 있다. FTA로 인해 악화된 빈부격차를 지적하며, 이제는 자유무역을 통한 자원의 효율적 배분과 후생수준의 개선보다 그 후생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지에 초점을 맞출 때임을 강조한다. 또한 협정 위반 시 이행 조치를 강화하기 위해 무역대표부(USTR) 내 담당부서의 인력을 증원하는 등 적극적인 무역구제 조치를 단행할 것임을 밝히고 있다.
넷째, 백악관과 의회를 민주당이 모두 장악함에 따라 향후 미국의 대외 통상정책 기조는 민주당이 2007년 5월 부시 행정부에 강한 압력을 행사해 합의한 신통상정책(New Trade Policy)의 기본 노선을 따를 가능성이 높아졌다. 신통상정책은 ‘경쟁력 약화에 직면한 미국 제조업 보호를 위해 무역협정을 손질해야 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며, 한국과 관련해서는 자동차와 농업, 의약 분야에 대한 개방 문제 등을 언급하고 있다. 신통상정책이 본격 추진되면 미국보다 자유무역주의의 수용 수위가 낮다고 판단되는 무역 흑자국들에 대해 시장개방 압력이 증대할 것으로 예상된다. 불공정하다고 판명되는 협정에 대해서는 무역분쟁도 불사하는 강경한 대응에 나설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보호주의적 성향 현실화될까
미국의 차기 행정부와 입법부 모두 보호주의적 성향이 강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러한 성향이 현실의 통상 정책으로 그대로 구현될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대선 공약이 그대로 실현되리라는 보장은 없으며 의회 다수당의 성향이 행정부의 운신을 제약하는 결정적인 요인도 아니기 때문이다. 대선 공약은 정책의 밑그림을 제공할 뿐이며, 그 실제 수위는 예상보다 높을 수도 낮을 수도 있다. 또한 정책 집행자의 시각 변화 가능성과 시기적·상황적 변수 등을 고려할 때 정책방향 자체가 크게 바뀌는 경우도 생기기 마련이다. 단적인 사례로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대통령 취임 전후 NAFTA에 대한 입장 변화를 들 수 있다.
1993년 1월 취임한 클린턴 대통령과 2009년 1월 취임하는 오바마 대통령이 처한 상황을 단순 비교하는 것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 현 경제위기의 시발점이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 사태로 시작된 도미노식 금융위기라는 점, 그리고 그 파장이 전세계로 미치고 있으며 수위와 지속기간 또한 대공황에 버금 갈 정도라는 점 등은 1990년대 초반의 걸프전 상황과 그 이후 지속된 미국 역사상 최대 호황기와는 대비되는 양상을 보이기 때문이다(<표 1>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대통령이 집권 초기에 처한 단기적인 정치경제적 상황은 여러가지 면에서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걸프전만큼이나 이라크 전쟁의 뒷수습 또한 중요한 국정 과제라는 점, 막대한 규모의 재정적자를 떠맡았다는 점, 경상수지가 악화된 상태에서 집권한다는 점, 경기 부양이 집권 초기의 최우선 과제라는 점, 민주당이 행정부와 의회를 모두 장악했다는 점 등이 그러하다. 한편 통상 관련 주요 인사들을 포함한 오바마 경제팀의 주요 면면들이 클린턴 행정부 당시 정책 입안 및 추진 과정에 관여한 사람들이었다는 점 또한 주목할 만하다(<표 2> 참조). 오바마의 전반적인 정책 기조가 클린턴의 그것을 따를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 전혀 근거없는 주장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대선 후보 시절 NAFTA를 강도 높게 비판했던 클린턴 대통령이 집권과 동시에 이를 적극 추진하여 1년만에 발효시킨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클린턴은 또한 대중국 화해정책에 정면으로 반하는 공약들을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재임기간 중 미-중 관계 정상화와 중국의 WTO 가입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바 있다. 클린턴의 NAFTA에 대한 입장 변화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 클린턴 스스로가 내심 NAFTA 체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으나 지지층 단속 차원에서 전략적으로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을 가능성이다. 둘째, 집권 후 과거 자신의 인식에 문제가 있었음을 자각하고 정책 방향을 바꾸었을 가능성이다. 오바마가 전자의 경우에 해당한다면 집권과 동시에 각종 FTA를 적극 추진할 것이다. 후자에 해당한다면 클린턴 정부에서 경력을 쌓은 내각 인사들의 영향을 받아 점차 보호무역주의의 수위를 낮추는 정책 기조를 보일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글로벌 위기 상황에서 무리한 보호주의 가능성 낮아
오바마 정부가 현 시점에서 보호무역주의로 나오기 힘든 또 다른 이유로 시기적인 문제를 들 수 있다. 경기침체기에 세계 각국이 자국의 위기 상황 극복을 우선시하여 보호주의적 입장을 취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글로벌 경제위기의 향방을 결정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에 있는 미국이 드러내놓고 보호무역주의를 주창하기는 쉽지 않다. 과거 1930년대 대공황 당시의 상황에서 얻은 뼈저린 교훈이 있기 때문이다.
대공황 초기에 미국은 스무트홀리 관세법(Smoot-Hawley Tariff Act)을 시발점으로 관세 인상, 수입 제한, 평가절하 등의 방법을 통해 수출 진흥을 꾀하고 국제수지 적자를 타국에 떠넘기는 근린궁핍화 정책(Beggar-Thy-Neighborhood Policy)을 취한 바 있다. 자국 우선주의에서 촉발된 극단적인 보호무역주의의 감행은 이후 다른 나라들의 경쟁적인 보복적 관세인상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세계 무역량이 급감하면서 각국의 수출 산업이 피폐해짐은 물론 국내 경기까지 위축되는 악순환이 진행되었다. ‘나 먼저 살겠다’는 각국의 노력이 모두를 공멸시키는 결과를 낳았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경기침체 시 보호무역주의의 폐해를 잘 알고 있는 미국이 현 글로벌 경기침체 상황에서 보호주의를 드러내놓고 주창할 가능성은 낮다. 과거 클린턴 행정부 당시 3번이나 발동된 바 있는 수퍼 301조와 같은 강력한 보호무역 조치가 부활할 가능성이 크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오바마는 오히려 근린궁핍화 정책의 견제를 위해 국제적 차원의 공조가 절실함을 거듭 피력한 바 있다. G20 워싱턴 공동선언의 자유무역 대의에 대한 공감대 형성과 APEC 정상회의의 반(反)보호무역 공조로 구체화된 위기의식 등이 대변하듯이, 미국뿐만 아니라 전세계 각국이 보호주의로 인한 세계경제 침체의 가속화를 예방하기 위해 국제적 차원에서 사전적 협력과 공조의 필요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현 시점에서 노골적인 보호무역주의 드라이브는 어느 나라도 감행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미국의 경우 글로벌적 금융위기의 원천이자 최대 피해국으로서 경기의 조기회복이 절실하고 갈수록 불어나는 재정적자 조정이 시급한 상황이다. 보호주의의 유혹을 완전히 뿌리치기 힘든 현실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미국이 공정무역이라는 슬로건 아래 간접적으로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고 국내 노동자들의 입지를 최대한 넓히는 전략을 시도할 가능성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공정무역 명분 아래 국제공조 필요성 부각시키며 보호주의적 실리 추구
오바마는 당선 확정 후 자신이 추구하는 통상정책의 기본 방향이 보호무역이 아닌 공정무역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보호무역(Trade Protectionism)이란 기업의 무역 행위에 대해 국가가 실리 차원에서 개입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공정무역(Fair Trade)이란 기업의 무역 행위로 인해 노동, 환경 등 공적 가치가 훼손되지 않도록 국가가 나서서 조율하는 것을 말한다. 결국 보호무역과 공정무역의 차이는 국가 개입의 목적과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있다. 즉 자국 산업과 일자리 보호 등 경제적 실리를 위한 것이라면 보호주의, 공적 가치의 훼손 방지를 위한 것이라면 공정무역의 정책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보호무역과 공정무역의 정의상 차이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실제 상황에 적용할 때는 논란의 소지가 있다. 국가가 공적 가치의 훼손을 이유로 국제 교역에 개입하지만, 실제 목적이 자국민들의 일자리를 보호하거나 특정 취약산업에 유리한 무역환경을 조성하는 등 실리를 추구하는 데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겉으로 드러나는 명목상의 정책만을 갖고 실제 의도를 파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결국 명목상의 정책과 그 이면의 실제로 의도하는 정책, 두 가지를 구분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단 보호무역주의가 대통령으로서 오바마의 명목상 정책이 될 가능성은 낮다. 오바마는 2005년 상원 입성 이후 4번에 걸쳐 참여한 FTA 비준안 투표에서 2005년 중미자유무역협정(CAFTA)을 제외한 세 번의 경우 모두 찬성표를 던진 바가 있다(<표 3> 참조). 특히 미-오만 FTA의 경우 민주당 상원의원 27명이 반대표를 던지고 12명만이 찬성표를 던졌는데, 오바마가 찬성 의원 중 한 명이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오바마는 CAFTA 비준안 반대의 이유로 협정 내용 중 노동, 환경 및 인권 관련 조항들에 문제가 있음을 들었다. 공정무역의 이념에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반대했다는 이야기이다. 대선 공약에서 드러나듯 실제로는 보호주의적인 무역정책을 추구함에도 불구하고, 명목상으로는 공정무역을 표방하는 오바마의 실리적인 입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종합해 볼 때, 오바마는 단기적(명목상)으로는, 협조적 국제주의에 기반한 공정한 무역질서를 확립시키려 노력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중장기적(실제 의도상)으로는, 국제적 공조를 통해 전세계적 경기침체 상황을 최대한 조기에 안정시키고 글로벌 경제질서 재편 과제를 어느정도 마무리지은 뒤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실리적인 노선을 추구할 것으로 예상된다. 궁극적으로는 WTO에 압력을 행사해 국제교역 질서 자체를 미국에 유리한 형태로 변화시키고 미국에 상대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하는 협정 내용을 견제하는 등 국제기준 강화를 구실로 한 보호무역주의가 고개를 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요컨대 오바마 정부는 일단 공정무역이라는 명분과 국제적 공조라는 틀을 유지해 나가면서 글로벌 경기의 회복을 기다린 후 점진적으로 보호주의를 시행해 나갈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전망된다.
오바마 통상 정책의 1순위 타깃은 중국
공정무역의 대의 아래 시행될 오바마 통상정책의 주 타깃은 미국의 입장에서 무역 불균형을 조장한다고 판단되는 중국, 유럽 및 중남미 국가들이 될 전망이다. 특히 최근 10년간 1조4,000억 달러에 이르는 무역 적자(동기간 누적 무역적자의 약 35%)를 안겨준 대 중국 무역이 가장 시급히 다루어져야 할 문제로 등장할 것으로 관측된다.
오바마는 지난 12월 13일 민주당 경선 토론회에서 ‘(중국과의) 관계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바뀌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과거와는 달리 이제는) 중국 상품에 대한 법적 대응을 강화해야 한다’ 고 주장했다. 부시 행정부가 외교적으로 호주, 인도 및 일본과의 연합을 통해 중국 포위 전략을 펼치는 반면, 중국 상품의 미국 진출에 대해 관대한 입장을 보이는 것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이다.
다자주의적 외교 철학을 가지고 있는 오바마는 미국 중심의 동맹관계를 통해 중국 및 북한을 비롯한 특정 국가들을 고립시키고 압력을 행사하며 패권적으로 군림하는 외교정책을 지양한다. 오히려 UN과 같은 국제기구들을 활용하는데 중점을 두며 정치적 갈등을 해소하는 접근을 선호한다. 따라서 부시와는 반대로 정치적으로는 중국을 포용하는 반면, 경제적으로는 강경하게 대하는 입장을 취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 중국의 막대한 경상수지 흑자가 중국 정부의 위안화 환율조작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으며, 이로 인해 미국과 글로벌 경제에 심각한 불균형이 초래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위안화 절상과 관련한 오바마의 입장은 2007년 본인이 적극 참여하여 도입한 ‘공정통화법(Fair Currency Act of 2007)’ 의 취지와 직접적으로 상통한다(<표 4> 참조). 공정통화법은 무역 상대국이 수출 보조금 지급 및 환율 조작 시 상계관세를 부과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는 중국이 수출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면서 내수를 통한 성장 비중을 높이는 방향으로 외환정책 등의 정책기조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아울러 중국을 포함한 비(非)시장경제에 대한 오바마의 통상압력 강화 의지를 나타낸다. 미국과 수출 보조금 및 농업자유화 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는 유럽과의 무역관계도 의식한 법안이다.
한편 ‘공정한 무역협정을 통해 양질의 노동과 환경 기준을 세계로 전파하고, 이러한 기준에 미달하여 무역의 가치를 훼손시키는 FTA에 반대한다’는 오바마의 공정무역 드라이브가 본격화되면 국제무역기구(WTO) 의 역할이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오바마는 이미 WTO에 압력을 넣어 강력한 노동 및 환경 기준을 국제무역협정에 포함시킬 것을 주장한 바 있다. 또한 WTO에 무역협정 집행(Trade Enforcement) 을 촉구하면서 협정 위반 시 제소 등을 통한 제재조치 단행에 역점을 두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바 있다. 부시 행정부 하에서 연평균 3건에 그쳤던 WTO 제소 건수가 클린턴 행정부 때에는 3배가 넘는 11건에 달했던 사례가 있다. 도하개발아젠다(DDA) 의 사례에서 드러나듯이 다자간 협정에 대한 합의 도출이 쉽지 않겠지만 전대미문의 글로벌 경기침체 상황에서 오바마의 공정무역 추진 의지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주목된다.
한국기업들은 간접 영향권에 들어 있어
향후 미국의 통상정책의 주 대상이 중국, 유럽 및 중남미 국가들에 집중되어 있는 만큼 한국이 받는 직접적인 영향은 우려만큼 크지 않을 전망이다. 미국이 취하는 통상정책의 방향보다는 오히려 글로벌 경기침체 회복의 속도와 과정이 한국 경제에 더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것이다. 공정무역을 주창하는 오바마가 강조하는 노동 및 환경 관련 국제기준은 한미 FTA협정 내용 상에 이미 반영되어 있다. 다만 공정무역에 대한 의지와는 관계없이 자동차 부문의 경우 상대적으로 미국의 적자 폭이 워낙 크기 때문에 어떻게든 활로를 찾기 위해 한국시장 개방 확대를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빅3를 위시한 미국 자동차의 국내 판매량은 특히 최근 큰 폭으로 떨어지고 있다(<그림 1> 참조).
미국은 정부 차원의 전폭적인 자금 지원으로 자동차 산업의 부도를 막고 구조조정을 통해 경영 정상화를 유도함으로써 경쟁력 회복을 노릴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의 입장에서도 미국 업체들의 생존이 유지됨으로써 미국 경제의 급격한 고용 및 총수요 붕괴가 가져올 수 있는 부정적인 영향을 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
한미 FTA 협정 자체는 오바마가 주창하는 공정무역 조건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지만 국제노동법 비준 현황으로 보면 국제기준을 다 충족하고 있지는 않은 상황이다(<표 5> 참조). 핵심 노동기준 관련 협약 비준 현황을 살펴보면 한국은 1997년부터 2001년까지 고용차별 및 아동노동 부문에 대해서는 국제기준을 충족시켰으나, 결사의 자유 등 전반적인 고용 환경에 있어서는 아직 국제규범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개별적인 자유무역협정 체결에 있어서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지만, 국제적 기준에는 미달된다는 의미이다. 특히 향후 공정무역의 중요성이 부각될 경우 해외에 생산기지를 두고 있는 기업들은 노동 및 환경 관련 주요 국제기준에 위배되지 않는 생산 활동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각별한 대비가 필요하다.
결국 한국 기업들의 입장에서는 정권교체를 맞는 미국의 정책을 필두로 새롭게 형성되는 국제 통상질서에 빠르게 적응하는 것이 관건이 될 것이다(<그림 2> 참조). 공정무역을 주창하는 오바마는 중장기적으로 보호주의적인 실리 추구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민주당이 장악하고 있는 의회는 명목상으로든 실제 집행상으로든 보호무역주의적인 정책 성향을 감추지 않을 것이다. 한편 경제 및 통상관련 주요 인사들은 호혜주의적인 성향을 보이며 백악관과 의회의 보호주의 색채를 희석시켜 줄 것이다.
대공황 시기과 비교될 정도로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는 전세계적 경기침체 상황에서 세계 어느 국가든 보호무역주의적인 정책의 유혹을 완전히 떨쳐버리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경제 위기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암묵적 합의를 바탕으로 당분간 상호주의와 국가간 무역장벽 해체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호혜적인 국제적 분위기가 조성될 것으로 전망된다. 글로벌 경기회복을 위해 공정무역의 대의 아래 국제적 공조의 절실함이 강조되는 상황에서 한국은 국제 공조에 주도적으로 참여함과 동시에 점진적인 보호주의를 꾀하는 미국의 통상정책에 대한 대비도 갖춰나가야 할 것이다. 특히 미국 통상정책의 타깃 국가들과 지역적·산업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한국 기업들의 선제적이고 세심한 대응이 긴요하다.
LG Business Insight 1019
오바마는 자신의 대선 공약 첫머리에서 ‘미국의 무역은 미국의 경제 활성화와 미국인의 일자리 창출을 위한 것이며, 미국 경제를 위협하는 어떠한 협정도 지지하지 않을 것’ 임을 밝혀둔 바 있다. ‘자유무역이 국가전체의 후생을 극대화시키고 개인에게 최대의 소비 기회를 제공한다’는 교과서적 접근방식이 오히려 국가간 그리고 산업간 불균형이라는 부작용을 낳았다는 시각을 엿볼 수 있다. 신자유주의에 기반한 세계화와 낮은 무역장벽이 미국 경제의 전반적인 성장을 주도해온 것은 분명하지만, 이제는 국내 산업과 고용 시장의 현주소를 냉철히 되돌아봐야 할 때임을 역설한 것으로도 풀이된다.
오바마정부 통상정책이 보호주의 혐의를 받는 근거
오바마의 통상 관련 대선 공약들과 미 의회의 성향을 살펴보면 보호주의적 색채가 강하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첫째, 오바마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무역 불균형의 대표적 사례로 보고, 1994년 1월 발효된 이후 단 한 번도 시도된 적이 없었던 재협상에 대한 의지를 강력하게 천명한 바 있다. 미국에 10년간 850억 달러에 달하는 무역수지 적자(전체 무역적자의 약 20%), 300만 개에 이르는 제조업 일자리 상실(제조업 일자리의 약 17%) 등의 부작용을 안겨주었다는 판단인 것이다. 이는 미국 시장을 과도하게 열어준 후유증이며, 따라서 반드시 재협상을 통해 협정 내용을 대폭적으로 수정해야 한다는 것이 오바마의 입장이다. 그 동안 무책임하고 무분별하게 개방되어 온 미국 시장을 우선 추스리는 것이 국내 일자리 창출과 고용 환경 개선을 이끌어내는 첫걸음이라는 시각이다.
둘째, 오바마는 미국 국민의 일자리 보호 및 창출을 위해 기업 관련 조세정책을 조율할 것임을 강조한 바 있다. 우선, 일자리를 해외로 이전하는 기업들에 대한 조세 지원을 중단할 것임을 공약에 명시했다. 아울러, 본사를 미국 내에 유지하고 설비 확장 등의 노력을 통해 미국 내 일자리를 보호하거나 확충하는 기업, 미국인 노동자 비율을 높이는 기업에게는 ‘애국기업법(Patriot Employer Act of 2007)’을 통해 큰 폭의 세제 혜택을 줄 것을 약속하기도 했다. 미국 기업들의 해외 직접투자(Greenfield Investment) 위축을 초래할 수도 있는 정책이다.
셋째, 전통적으로 보호주의적 성향이 강한 민주당이 12년만에 상·하원을 모두 장악하였다. 노조와 서민·중산층을 지지기반으로 하고 있는 민주당은 부시 행정부가 불공정 무역을 방치한 것을 강하게 비판하며 FTA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을 고수하고 있다. FTA로 인해 악화된 빈부격차를 지적하며, 이제는 자유무역을 통한 자원의 효율적 배분과 후생수준의 개선보다 그 후생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지에 초점을 맞출 때임을 강조한다. 또한 협정 위반 시 이행 조치를 강화하기 위해 무역대표부(USTR) 내 담당부서의 인력을 증원하는 등 적극적인 무역구제 조치를 단행할 것임을 밝히고 있다.
넷째, 백악관과 의회를 민주당이 모두 장악함에 따라 향후 미국의 대외 통상정책 기조는 민주당이 2007년 5월 부시 행정부에 강한 압력을 행사해 합의한 신통상정책(New Trade Policy)의 기본 노선을 따를 가능성이 높아졌다. 신통상정책은 ‘경쟁력 약화에 직면한 미국 제조업 보호를 위해 무역협정을 손질해야 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며, 한국과 관련해서는 자동차와 농업, 의약 분야에 대한 개방 문제 등을 언급하고 있다. 신통상정책이 본격 추진되면 미국보다 자유무역주의의 수용 수위가 낮다고 판단되는 무역 흑자국들에 대해 시장개방 압력이 증대할 것으로 예상된다. 불공정하다고 판명되는 협정에 대해서는 무역분쟁도 불사하는 강경한 대응에 나설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보호주의적 성향 현실화될까
미국의 차기 행정부와 입법부 모두 보호주의적 성향이 강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러한 성향이 현실의 통상 정책으로 그대로 구현될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대선 공약이 그대로 실현되리라는 보장은 없으며 의회 다수당의 성향이 행정부의 운신을 제약하는 결정적인 요인도 아니기 때문이다. 대선 공약은 정책의 밑그림을 제공할 뿐이며, 그 실제 수위는 예상보다 높을 수도 낮을 수도 있다. 또한 정책 집행자의 시각 변화 가능성과 시기적·상황적 변수 등을 고려할 때 정책방향 자체가 크게 바뀌는 경우도 생기기 마련이다. 단적인 사례로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대통령 취임 전후 NAFTA에 대한 입장 변화를 들 수 있다.
1993년 1월 취임한 클린턴 대통령과 2009년 1월 취임하는 오바마 대통령이 처한 상황을 단순 비교하는 것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 현 경제위기의 시발점이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 사태로 시작된 도미노식 금융위기라는 점, 그리고 그 파장이 전세계로 미치고 있으며 수위와 지속기간 또한 대공황에 버금 갈 정도라는 점 등은 1990년대 초반의 걸프전 상황과 그 이후 지속된 미국 역사상 최대 호황기와는 대비되는 양상을 보이기 때문이다(<표 1>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대통령이 집권 초기에 처한 단기적인 정치경제적 상황은 여러가지 면에서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걸프전만큼이나 이라크 전쟁의 뒷수습 또한 중요한 국정 과제라는 점, 막대한 규모의 재정적자를 떠맡았다는 점, 경상수지가 악화된 상태에서 집권한다는 점, 경기 부양이 집권 초기의 최우선 과제라는 점, 민주당이 행정부와 의회를 모두 장악했다는 점 등이 그러하다. 한편 통상 관련 주요 인사들을 포함한 오바마 경제팀의 주요 면면들이 클린턴 행정부 당시 정책 입안 및 추진 과정에 관여한 사람들이었다는 점 또한 주목할 만하다(<표 2> 참조). 오바마의 전반적인 정책 기조가 클린턴의 그것을 따를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 전혀 근거없는 주장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대선 후보 시절 NAFTA를 강도 높게 비판했던 클린턴 대통령이 집권과 동시에 이를 적극 추진하여 1년만에 발효시킨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클린턴은 또한 대중국 화해정책에 정면으로 반하는 공약들을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재임기간 중 미-중 관계 정상화와 중국의 WTO 가입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바 있다. 클린턴의 NAFTA에 대한 입장 변화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 클린턴 스스로가 내심 NAFTA 체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으나 지지층 단속 차원에서 전략적으로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을 가능성이다. 둘째, 집권 후 과거 자신의 인식에 문제가 있었음을 자각하고 정책 방향을 바꾸었을 가능성이다. 오바마가 전자의 경우에 해당한다면 집권과 동시에 각종 FTA를 적극 추진할 것이다. 후자에 해당한다면 클린턴 정부에서 경력을 쌓은 내각 인사들의 영향을 받아 점차 보호무역주의의 수위를 낮추는 정책 기조를 보일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글로벌 위기 상황에서 무리한 보호주의 가능성 낮아
오바마 정부가 현 시점에서 보호무역주의로 나오기 힘든 또 다른 이유로 시기적인 문제를 들 수 있다. 경기침체기에 세계 각국이 자국의 위기 상황 극복을 우선시하여 보호주의적 입장을 취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글로벌 경제위기의 향방을 결정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에 있는 미국이 드러내놓고 보호무역주의를 주창하기는 쉽지 않다. 과거 1930년대 대공황 당시의 상황에서 얻은 뼈저린 교훈이 있기 때문이다.
대공황 초기에 미국은 스무트홀리 관세법(Smoot-Hawley Tariff Act)을 시발점으로 관세 인상, 수입 제한, 평가절하 등의 방법을 통해 수출 진흥을 꾀하고 국제수지 적자를 타국에 떠넘기는 근린궁핍화 정책(Beggar-Thy-Neighborhood Policy)을 취한 바 있다. 자국 우선주의에서 촉발된 극단적인 보호무역주의의 감행은 이후 다른 나라들의 경쟁적인 보복적 관세인상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세계 무역량이 급감하면서 각국의 수출 산업이 피폐해짐은 물론 국내 경기까지 위축되는 악순환이 진행되었다. ‘나 먼저 살겠다’는 각국의 노력이 모두를 공멸시키는 결과를 낳았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경기침체 시 보호무역주의의 폐해를 잘 알고 있는 미국이 현 글로벌 경기침체 상황에서 보호주의를 드러내놓고 주창할 가능성은 낮다. 과거 클린턴 행정부 당시 3번이나 발동된 바 있는 수퍼 301조와 같은 강력한 보호무역 조치가 부활할 가능성이 크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오바마는 오히려 근린궁핍화 정책의 견제를 위해 국제적 차원의 공조가 절실함을 거듭 피력한 바 있다. G20 워싱턴 공동선언의 자유무역 대의에 대한 공감대 형성과 APEC 정상회의의 반(反)보호무역 공조로 구체화된 위기의식 등이 대변하듯이, 미국뿐만 아니라 전세계 각국이 보호주의로 인한 세계경제 침체의 가속화를 예방하기 위해 국제적 차원에서 사전적 협력과 공조의 필요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현 시점에서 노골적인 보호무역주의 드라이브는 어느 나라도 감행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미국의 경우 글로벌적 금융위기의 원천이자 최대 피해국으로서 경기의 조기회복이 절실하고 갈수록 불어나는 재정적자 조정이 시급한 상황이다. 보호주의의 유혹을 완전히 뿌리치기 힘든 현실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미국이 공정무역이라는 슬로건 아래 간접적으로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고 국내 노동자들의 입지를 최대한 넓히는 전략을 시도할 가능성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공정무역 명분 아래 국제공조 필요성 부각시키며 보호주의적 실리 추구
오바마는 당선 확정 후 자신이 추구하는 통상정책의 기본 방향이 보호무역이 아닌 공정무역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보호무역(Trade Protectionism)이란 기업의 무역 행위에 대해 국가가 실리 차원에서 개입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공정무역(Fair Trade)이란 기업의 무역 행위로 인해 노동, 환경 등 공적 가치가 훼손되지 않도록 국가가 나서서 조율하는 것을 말한다. 결국 보호무역과 공정무역의 차이는 국가 개입의 목적과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있다. 즉 자국 산업과 일자리 보호 등 경제적 실리를 위한 것이라면 보호주의, 공적 가치의 훼손 방지를 위한 것이라면 공정무역의 정책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보호무역과 공정무역의 정의상 차이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실제 상황에 적용할 때는 논란의 소지가 있다. 국가가 공적 가치의 훼손을 이유로 국제 교역에 개입하지만, 실제 목적이 자국민들의 일자리를 보호하거나 특정 취약산업에 유리한 무역환경을 조성하는 등 실리를 추구하는 데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겉으로 드러나는 명목상의 정책만을 갖고 실제 의도를 파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결국 명목상의 정책과 그 이면의 실제로 의도하는 정책, 두 가지를 구분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단 보호무역주의가 대통령으로서 오바마의 명목상 정책이 될 가능성은 낮다. 오바마는 2005년 상원 입성 이후 4번에 걸쳐 참여한 FTA 비준안 투표에서 2005년 중미자유무역협정(CAFTA)을 제외한 세 번의 경우 모두 찬성표를 던진 바가 있다(<표 3> 참조). 특히 미-오만 FTA의 경우 민주당 상원의원 27명이 반대표를 던지고 12명만이 찬성표를 던졌는데, 오바마가 찬성 의원 중 한 명이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오바마는 CAFTA 비준안 반대의 이유로 협정 내용 중 노동, 환경 및 인권 관련 조항들에 문제가 있음을 들었다. 공정무역의 이념에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반대했다는 이야기이다. 대선 공약에서 드러나듯 실제로는 보호주의적인 무역정책을 추구함에도 불구하고, 명목상으로는 공정무역을 표방하는 오바마의 실리적인 입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종합해 볼 때, 오바마는 단기적(명목상)으로는, 협조적 국제주의에 기반한 공정한 무역질서를 확립시키려 노력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중장기적(실제 의도상)으로는, 국제적 공조를 통해 전세계적 경기침체 상황을 최대한 조기에 안정시키고 글로벌 경제질서 재편 과제를 어느정도 마무리지은 뒤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실리적인 노선을 추구할 것으로 예상된다. 궁극적으로는 WTO에 압력을 행사해 국제교역 질서 자체를 미국에 유리한 형태로 변화시키고 미국에 상대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하는 협정 내용을 견제하는 등 국제기준 강화를 구실로 한 보호무역주의가 고개를 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요컨대 오바마 정부는 일단 공정무역이라는 명분과 국제적 공조라는 틀을 유지해 나가면서 글로벌 경기의 회복을 기다린 후 점진적으로 보호주의를 시행해 나갈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전망된다.
오바마 통상 정책의 1순위 타깃은 중국
공정무역의 대의 아래 시행될 오바마 통상정책의 주 타깃은 미국의 입장에서 무역 불균형을 조장한다고 판단되는 중국, 유럽 및 중남미 국가들이 될 전망이다. 특히 최근 10년간 1조4,000억 달러에 이르는 무역 적자(동기간 누적 무역적자의 약 35%)를 안겨준 대 중국 무역이 가장 시급히 다루어져야 할 문제로 등장할 것으로 관측된다.
오바마는 지난 12월 13일 민주당 경선 토론회에서 ‘(중국과의) 관계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바뀌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과거와는 달리 이제는) 중국 상품에 대한 법적 대응을 강화해야 한다’ 고 주장했다. 부시 행정부가 외교적으로 호주, 인도 및 일본과의 연합을 통해 중국 포위 전략을 펼치는 반면, 중국 상품의 미국 진출에 대해 관대한 입장을 보이는 것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이다.
다자주의적 외교 철학을 가지고 있는 오바마는 미국 중심의 동맹관계를 통해 중국 및 북한을 비롯한 특정 국가들을 고립시키고 압력을 행사하며 패권적으로 군림하는 외교정책을 지양한다. 오히려 UN과 같은 국제기구들을 활용하는데 중점을 두며 정치적 갈등을 해소하는 접근을 선호한다. 따라서 부시와는 반대로 정치적으로는 중국을 포용하는 반면, 경제적으로는 강경하게 대하는 입장을 취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 중국의 막대한 경상수지 흑자가 중국 정부의 위안화 환율조작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으며, 이로 인해 미국과 글로벌 경제에 심각한 불균형이 초래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위안화 절상과 관련한 오바마의 입장은 2007년 본인이 적극 참여하여 도입한 ‘공정통화법(Fair Currency Act of 2007)’ 의 취지와 직접적으로 상통한다(<표 4> 참조). 공정통화법은 무역 상대국이 수출 보조금 지급 및 환율 조작 시 상계관세를 부과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는 중국이 수출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면서 내수를 통한 성장 비중을 높이는 방향으로 외환정책 등의 정책기조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아울러 중국을 포함한 비(非)시장경제에 대한 오바마의 통상압력 강화 의지를 나타낸다. 미국과 수출 보조금 및 농업자유화 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는 유럽과의 무역관계도 의식한 법안이다.
한편 ‘공정한 무역협정을 통해 양질의 노동과 환경 기준을 세계로 전파하고, 이러한 기준에 미달하여 무역의 가치를 훼손시키는 FTA에 반대한다’는 오바마의 공정무역 드라이브가 본격화되면 국제무역기구(WTO) 의 역할이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오바마는 이미 WTO에 압력을 넣어 강력한 노동 및 환경 기준을 국제무역협정에 포함시킬 것을 주장한 바 있다. 또한 WTO에 무역협정 집행(Trade Enforcement) 을 촉구하면서 협정 위반 시 제소 등을 통한 제재조치 단행에 역점을 두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바 있다. 부시 행정부 하에서 연평균 3건에 그쳤던 WTO 제소 건수가 클린턴 행정부 때에는 3배가 넘는 11건에 달했던 사례가 있다. 도하개발아젠다(DDA) 의 사례에서 드러나듯이 다자간 협정에 대한 합의 도출이 쉽지 않겠지만 전대미문의 글로벌 경기침체 상황에서 오바마의 공정무역 추진 의지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주목된다.
한국기업들은 간접 영향권에 들어 있어
향후 미국의 통상정책의 주 대상이 중국, 유럽 및 중남미 국가들에 집중되어 있는 만큼 한국이 받는 직접적인 영향은 우려만큼 크지 않을 전망이다. 미국이 취하는 통상정책의 방향보다는 오히려 글로벌 경기침체 회복의 속도와 과정이 한국 경제에 더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것이다. 공정무역을 주창하는 오바마가 강조하는 노동 및 환경 관련 국제기준은 한미 FTA협정 내용 상에 이미 반영되어 있다. 다만 공정무역에 대한 의지와는 관계없이 자동차 부문의 경우 상대적으로 미국의 적자 폭이 워낙 크기 때문에 어떻게든 활로를 찾기 위해 한국시장 개방 확대를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빅3를 위시한 미국 자동차의 국내 판매량은 특히 최근 큰 폭으로 떨어지고 있다(<그림 1> 참조).
미국은 정부 차원의 전폭적인 자금 지원으로 자동차 산업의 부도를 막고 구조조정을 통해 경영 정상화를 유도함으로써 경쟁력 회복을 노릴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의 입장에서도 미국 업체들의 생존이 유지됨으로써 미국 경제의 급격한 고용 및 총수요 붕괴가 가져올 수 있는 부정적인 영향을 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
한미 FTA 협정 자체는 오바마가 주창하는 공정무역 조건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지만 국제노동법 비준 현황으로 보면 국제기준을 다 충족하고 있지는 않은 상황이다(<표 5> 참조). 핵심 노동기준 관련 협약 비준 현황을 살펴보면 한국은 1997년부터 2001년까지 고용차별 및 아동노동 부문에 대해서는 국제기준을 충족시켰으나, 결사의 자유 등 전반적인 고용 환경에 있어서는 아직 국제규범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개별적인 자유무역협정 체결에 있어서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지만, 국제적 기준에는 미달된다는 의미이다. 특히 향후 공정무역의 중요성이 부각될 경우 해외에 생산기지를 두고 있는 기업들은 노동 및 환경 관련 주요 국제기준에 위배되지 않는 생산 활동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각별한 대비가 필요하다.
결국 한국 기업들의 입장에서는 정권교체를 맞는 미국의 정책을 필두로 새롭게 형성되는 국제 통상질서에 빠르게 적응하는 것이 관건이 될 것이다(<그림 2> 참조). 공정무역을 주창하는 오바마는 중장기적으로 보호주의적인 실리 추구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민주당이 장악하고 있는 의회는 명목상으로든 실제 집행상으로든 보호무역주의적인 정책 성향을 감추지 않을 것이다. 한편 경제 및 통상관련 주요 인사들은 호혜주의적인 성향을 보이며 백악관과 의회의 보호주의 색채를 희석시켜 줄 것이다.
대공황 시기과 비교될 정도로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는 전세계적 경기침체 상황에서 세계 어느 국가든 보호무역주의적인 정책의 유혹을 완전히 떨쳐버리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경제 위기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암묵적 합의를 바탕으로 당분간 상호주의와 국가간 무역장벽 해체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호혜적인 국제적 분위기가 조성될 것으로 전망된다. 글로벌 경기회복을 위해 공정무역의 대의 아래 국제적 공조의 절실함이 강조되는 상황에서 한국은 국제 공조에 주도적으로 참여함과 동시에 점진적인 보호주의를 꾀하는 미국의 통상정책에 대한 대비도 갖춰나가야 할 것이다. 특히 미국 통상정책의 타깃 국가들과 지역적·산업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한국 기업들의 선제적이고 세심한 대응이 긴요하다.
LG Business Insight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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