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잡스가 개발한 애플 II가 퍼스널 컴퓨터 시장에서 승승장구를 거두며 IBM의 목을 조르기 시작하자, 다급해진 IBM은 애플에 대응할 수 있는 묘안이 필요했다. 그러나 당시 IBM의 주력 비즈니스는 메인 프레임이었고, 주력 시장을 퍼스널 컴퓨터 시장으로 옮길 계획은 없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차도살인(借刀殺人) 방법이다. IBM이라는 최강의 브랜드를 빌려주는 대신, PC는 조립할 수 있도록 표준을 자신이 세우는 것이다. 애플과 같은 거대 기업의 출현을 제거하기 위해 여러 기업에 자신이 원하는 사양의 제품을 생산하도록 한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근사한 계획이었지만, 이후 IBM은 이 정책이 커다란 미스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거대한 시장을 놓쳤고, 애플보다 강력한 경쟁자를 키웠기 때문이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IBM은 IBM 호환 PC 프로젝트의 상당 부분을 빌 게이츠에게서 조언을 얻었다. 빌 게이츠는 하늘이 준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비즈니스로 연결한다. 그는 당시 최고의 CPU라고 평가받던 모토롤라 CPU는 대신 말을 잘 들을 만한 인텔 8086 CPU의 변형 모델인 8088을 선택하도록 한다. 그리고 OS는 알려진 대로 MS-DOS의 전신인 ‘Q-DOS’를 구매해 라이선스만 판매하는 방식으로 IBM에 판매한다.
1980년대는 IT 기업에게 혼돈의 시대였다. 산업 표준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각 사마다 독자적인 플랫폼을 서둘러 개발했고, 호환성 문제로 투자가들이 선뜻 제품을 구매하기 힘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IBM 호환 PC는 투자자들에게 서광과도 같았다. IBM은 이 정책으로 애플이라는 강자를 잡을 수 있었지만, 인텔과 MS라는 새롭고 강력한 적을 만드는 역효과도 가져온다. 빌 게이츠는 인텔이라는 강력한 하드웨어 동업자를 쥐고 흔들 수 있게 되었고, 인텔은 MS와 합작해 CPU 시장에서 선두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잡는다.
IBM이 키운 ‘Intel’
인텔(Intel)의 미래를 결정지은 8086은 사실 인텔이 크게 신경을 기울여 개발한 제품이 아니다. 인텔은 16비트 CPU보다는 32비트 CPU인 8800 개발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32비트 CPU 개발에 성공하면 당시 주류를 이루고 있는 8비트, 16비트 CPU를 단숨에 제압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고, 32비트 CPU 개발에 막대한 인력을 투입했지만, 결과물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32비트 CPU 개발이 부진한 상황에서 인텔 전 직원이 나가 설립한 자일로그(Zilog)에서 개발한 Z80 CPU가 시장점유율을 높여가자 그에 대한 대응책으로 서둘러 만든 것이 8086 CPU다.
나름대로 인텔의 사운이 걸린 8800 CPU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한 인력을 빼기 힘들어, 전기 엔지니어였던 스테판 모스에게 개발을 전적으로 일임한다. 당시 8비트 CPU는 설계에는 한 명이 필요했지만, 16비트 CPU는 적어도 3~4명에서 10여 명에 이르는 개발인력을 필요로 했고, 32비트 CPU인 80386의 경우 100여 명의 개발 인력이 투입되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얼마나 인텔의 기대치가 낮았는지 알 수 있다. 시장에 출시된 8086은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그저 그런 CPU 중 하나로 평가되었지만, IBM을 만나면서 상황은 크게 달라진다. 이후 PC 시장의 폭발적인 확대로 인텔은 성공 일로를 달리게 되었고, 80386, 80486의 연이은 성공으로 경쟁자와의 차이를 벌린다.
Intel이 키운 ‘AMD’
인텔과 AMD는 그 뿌리가 같다. AMD 역시 인텔처럼 페어차일드 반도체(fairchild Semiconductor) 직원들이 나와 설립된 회사다. AMD 설립은 1969년으로 인텔보다 단지 1년 늦다. 그러나 인텔이 설립과 동시에 CPU를 제작할 수 있었던 반면, AMD는 1975년 인텔의 라이선스를 획득한 이후에나 가능했다.
AMD와 인텔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인텔의 밥 노이스(Bob Noyce)와 고든 무어(Gorden Moore)가 창업을 한다고 발표하자 투자자들이 줄을 선 반면, AMD는 투자가를 구하기가 힘들었다. 이유는 AMD 설립자인 스타급 개발자가 아닌 제리 샌더스(W.Jerry sanders III)라는 마케팅 담당자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페어차일드 시절 전설적인 영업 수단을 발휘하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투자자들은 인텔에 투자했기 때문에 동일 업종인 AMD에 투자를 꺼려했다. 이런 문제점을 일거에 타개해준 이는 인텔의 밥 노이스다. 밥 노이스가 AMD가 인텔의 경쟁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꿰뚫어 보았지만, 약간의 모험을 즐기기로 하며 AMD의 첫 번째 투자가가 된다. 이후 밥 노이스가 투자한 회사라고 소문이 나면서 초기 창업 자금 모금에 성공한다. 물론 현재처럼 가장 강력한 경쟁자로 살아남을지는 밥 노이스도 몰랐을 것이다. 그렇다고 밥 노이스가 무턱대고 게임을 즐긴 것은 아니었다. 당시 강화된 반독점법 때문에 시장에 적어도 동일 제품을 생산하는 2개 이상의 기업이 필요했기 때문에 인텔이 AMD를 선택한 것이다. 이후 AMD는 오랫동안 인텔의 주요 하청 업체(클론)로 인텔의 CPU를 생산하기도 했다. AMD가 실제 CPU를 처음으로 생산한 것은 1975년 인텔에서 라이선스를 받은 이후다. AMD는 설립 초기 5년간은 신제품이 아닌 다른 메이커의 반도체 복제품을 생산했으며, 제품 특성을 약간 개량해 부가가치를 높이는 정책을 펼친다.
인텔을 부동의 1위로 올려 놓은 ‘Intel Inside’
AMD와 인텔이 협상 과정에서 조금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기는 했지만, 커다란 무리 없이 유지될 것 같던 상황이 급변하게 된 것은 1995년 인텔의 반도체 수익 급감 때문이다. 인텔은 더 이상 수익이 나지 않는 반도체 산업을 포기하기로 결정하고, CPU 시장에 총력을 기울일 것을 결정한다. 어려운 결정에 힘을 더해준 것은 80386 CPU의 성공이다. 인텔은 80386부터 한때 10개에 이르던 하청 업체에 몫을 나눠주기보다는 자신이 수익을 독점하기를 원했다. 결국 인텔과 AMD는 결별의 수순을 맞이한다. 많은 PC 업체의 성장으로 이제 더 이상 인텔은 IBM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진 것도 한몫했다.
사실 1990년대는 CPU 춘추전국시대였다. 인텔이 IBM을 등에 업고 시장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현재처럼 독점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지는 않았다. PC 시장이 급성장하기 시작하자 많은 반도체 회사들이 CPU 시장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그중 대표적인 기업으로 인텔 호환 CPU를 생산하던 AMD, 사이릭스, 넥스젠이 있고, 알파칩을 생산하던 DEC 등을 꼽을 수 있다. 인텔은 이후 AMD가 더 이상 386, 486 CPU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지만, 법원은 인텔의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 단순 숫자로 표기된 방식으로 특허권을 보장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인텔은 더 이상 기존 제품 표기 방법으로는 호환 칩의 난립을 막을 수 없다는 판단하에 시장을 뒤집어엎을 수 있는 새로운 마케팅 정책을 수립한다.
1993년, 80586 프로세스에 펜티엄이라는 고유 브랜드를 붙이고, PC 제조 기업에는 자사 로고를 부착한 PC를 판매할 경우 가격 인센티브를 제공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일반인들이 몰라도 전혀 상관 없는 CPU에 대한 직접적인 광고를 실시해 “CPU는 Intel이 최고”라는 공식을 주입한다. CPU는 PC 안에 숨어 있기 때문에 사용자들은 그 차이를 그동안 느낄 수 없었지만, 이 광고를 기점으로 소비자들이 인텔제품이 장착된 PC를 찾게 된 것이다. Intel Inside 정책을 통해 인텔은 시장에 난립하던 많은 호환 칩 기업을 대거 정리할 수 있었다.
AMD, 애슬론으로 반격 시작
인텔의 라이선스 정책 파기로 타격을 입은 AMD가 선택한 것은 독자적인 CPU 개발 능력 향상과 인텔 CPU를 모방한 제품 개발에 주력한다는 것이다. 486 모델은 기존 인텔의 설계 방식을 그대로 모방했고, 586부터는 독자적인 기술로 개발하기 시작한다. AMD가 인텔을 위협할 정도의 기술력을 갖추기 시작했다고 평가받는 것은 1996년 당시 인텔 펜티엄보다 빠른 처리 속도를 자랑하던 넥스젠(Nexgen)을 인수한 후다. 넥스젠 인수 후 발표한 K-6 제품은 성능과 가격 면에서 인텔의 경쟁자라는 시장의 평가를 받기 시작했고, 이후 데스크톱 최초의 1GHz 돌파 역시 인텔이 아닌 AMD의 몫이었다.
펜티엄 III가 발표된 시점 AMD의 최고의 역작으로 평가받는 애슬론(Athlon)을 출시한다. 이후 펜티엄 4에 대항하기 위해 개발한 애슬론 XP의 경우 인텔을 넘어섰다는 평가를 받는다. AMD 최고의 기회는 2004년 인텔의 실수 때문에 발생한다. 인텔이 출시한 프레스캇은 내부 명령어 숫자를 줄임으로서 4GHz 이상의 속도를 자신했지만, 발열과 소음 때문에 최악의 CPU로 평가받았고, 성능 면에서는 애슬론 64에 비해 뒤처진다는 평가를 받는다. AMD는 이 당시 시장점유율이 40%에 육박하는 수준까지 성장하기도 했다.Core를 늘려라기존 방식으로는 속도 향상에 한계에 부닥친 인텔은 CPU 설계의 새로운 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한다. 이제 단순한 속도 숫자 놀이보다 실질적인 속도 향상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기술력으로 내부 클럭을 향상시키는 것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새로운 펜티엄 프로젝트를 포기하고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내는데 바로 멀티 코어(Multi Core) 기술이다. 인텔이 AMD에게 시장을 잠식당하자 급작스럽게 발표한 듀얼 코어(Dual Core)는 사실 새로운 기술이 아니다. CPU 하나에 2개의 코어가 들어간 것이 아니라 2개의 CPU를 병렬로 연결한 것뿐이다. 이 방식은 불량률이 줄어들고 커다란 기술 개발도 필요하지 않았지만, 멀티 코어 시장을 선점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후 2006년 발표한 코어 2 듀오(Core 2 Duo)는 실질적인 2개의 코어가 하나의 CPU 안에 들어가 있는 방식이며, 이때부터 AMD의 기술력을 앞서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얼마 안 돼 인텔은 쿼드 코어(Quad Core) 기술을 발표하는데, 이거 역시 코어 2 듀오를 2개 연결한 것일 뿐이다. 그렇지만 쿼드 코어 기술을 발표함으로서 시장을 또다시 선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서로의 강점인 기술력과 마케팅으로 상호 무장해이 두 기업의 무한 경쟁은 사용자들을 즐겁게 한다. 경쟁이 치열하면 치열할수록 사용자가 얻는 혜택이 크기 때문이다. CPU 시장 역시 자본력이 지배하는 시장이다. 인텔이 경쟁 우위임은 분명하다. 인텔은 적어도 4개의 CPU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할 수 있는 개발 인력과 자본력이 있지만, AMD는 1~2개의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할 수 있는 개발 인력과 자본력밖에 없다. 이는 인텔이 실수만 하지 않으면, AMD에게는 커다란 기회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고 AMD가 쉽게 물러날 것 같지는 않다. 많은 기업들이 인텔의 독주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최근 이 두 기업의 평가는 예전과 달라졌다. 기술력에서 오랫동안 인텔이 우위였지만, 최근에는 AMD의 기술력과 별 차이가 없고 듀얼 코어처럼 기술력보다 마케팅 능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에 반해 AMD는 인텔 대비 20% 저렴한 마케팅 정책을 펼쳐온 것과 비교해 최근에는 핵심 기술이 뛰어난 기업으로 평가받고 있다. AMD가 인텔과 비교해 현재는 열세인 것은 분명하지만, 인텔이 한순간의 방심으로 선두 자리를 내놓을 수 있기 때문에 전쟁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 Beyond Promise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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