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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3. 11. 14:35

일본인의 경우 남을 치켜세울 경우 조금은 과장된 표현을 좋아한다. 소니의 공동창업자인 모리타 아키오를 ‘경영의 神’으로 추앙하는 것 역시 약간의 과장된 표현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지만, 최근 일본 상계에 모리타 아키오 같은 인물이 없는 것을 한탄하는 일본 언론을 보면 神이라는 표현이 과장이 아닐 듯 싶다.

모리타 아키오는 14대 째 양조장을 운영해온 명문가의 장남으로 태어나 풍족한 어린 시절을 지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선조의 방탕한 생활로 무너진 양조장을 다시 새운 입지전적 인물이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아키오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경영수업을 시작했고, 중학시절에는 임원회의에 참석하기도 했다. 양조장 경영 수업을 받던 그에게 유일한 취미는 축음기 분해와 조립이었다. 신식여성이었던 그의 어머니가 음악을 좋아했기 때문에 최신 축음기를 집에서 쉽게 접해볼 수 있었다. 당시 집 한 채 값이었던 축음기를 분해·조립하던 그는 이후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경영학이 아닌 물리학을 선택하게 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그는 해군과학연구소에서 소니 공동창업자이며 일본인들에게 ‘영원한 이노베이터’로 추앙받는 이부카 마사루와 만나게 된다. 2차 세계대전 후 아키오는 양조장 경영을 거부하고, 동경 공과 대학 교수로 가기 위해 이삿짐을 싸던 순간 마침 신문 속에서 마사루의 소식을 보게 되었고, 그를 찾아가 의기투합해 만든 회사가 소니의 전신인 ‘동경통신공업’이다.

선구자적 독자 브랜드 정책

동경통신공업이 어느 정도 명성을 쌓아갈 시점, 아키오와 마사루는 전세계 시장으로의 진출을 위해서는 자사 브랜드가 필요하다고 판단, Sony라는 새로운 회사명을 만들어냈다. 다른 경쟁기업들이 OEM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황에 이미 세계 시장에 대한 도전을 준비했던 것이다. 2008년 마츠시타의 National 브랜드가 Panasonic으로 사명이 통합된 것을 보면 1950년대부터 독자적인 브랜드를 주장한 아키오의 식견은 탁월한 것이다. 1952년 트랜지스터로 라디오를 만들면 부피가 줄어들 것임을 예견한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라이센스를 구매한 후 WE사 근처에서 트랜지스터 기술을 배우기 시작한다. 이런 그를 WE사 직원들은 비웃었지만, 몇 년 후 그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최초로 만들며 이런 비웃음을 탄성을 바꿔버린다.

소니가 만든 트랜지스터 라디오는 선진국 소비자들에게 일본 제품이 이제 이류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알려주는 계기가 되었으며, 일본 기업들에게는 독자 브랜드로 세계 시장을 공략할 수 있다는 계기를 마련해준 것이다. 아키오는 수직적인 관계를 선호하는 명문대 출신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조직문화에 순응하는 스타일보다 고정관념에 도전할 줄 아는 사람을 좋아했다. 창의적인 생각이 기업을 변화시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소니의 미래는 직원들에게 달려있다고 생각했으며, 직원들을 동료이며, 도움을 주는 사람으로 취급했다.

그런 그는 소니의 노무직과 사무직과의 구별을 없앴으며, 자유로운 토론을 즐겨했다. 소니의 성장배경에 자유토론 분위기가 한몫했다는 평가는 그 때문이다. 오늘날 소니는 직원 한명 당 해마다 평균 8건의 건의를 받고 있다. 1960년 미국 법인을 설립한 후 그는 미국으로 가족을 이끌고 이주했다. 최고경영자가 미국시장을 꿰뚫고 있지 않으면 제품 개발과 판매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주말마다 열리는 파티와 각종 이벤트에 빠지지 않고 참여했다. 그는 영어로 미국인과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일본 기업인이며, 먼데일 전 부통령과 키신저 전 국무장관과 막역한 사이로 미일 무역마찰 때면 막후 중재자 역할을 맡아왔다. 그런 그였기에 Time지는 20세기를 빛낸 경제인 20인 중 한 사람으로 모리타 아키오를 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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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를 파는 기업으로 거듭나라

아키오는 제품이 아닌 문화를 팔지 않고서는 일류기업이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CBS사를 인수하고, 소니 레코드를 창립했으며, 1989년에는 콜롬비아 영화사를 사들였다. 일본 내에서는 1970년대 신용카드와 리스 사업에 진출했고, 1980년대에는 생명보험에, 1990년대에는 손해보험과 증권에, 2000년대에는 은행업까지 진출했다.

모리타 아키오가 바라던 가전에서 금융, 영화, 음악 분야까지 아우르는 소니 제국이 완성된 것이다. 문제는 그의 사후에 나타나고 있다. 2000년대 들어 주력사업으로 등장한 게임산업의 지속적인 적자로 소니 제국의 명성에 금이 가고 있으며, 소니의 성장세가 예전만 못하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1999년 사망한 그를, 아직도 일본인들이 그리워하는 것은 모리타 아키오와 같은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CEO가 현재 일본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 Beyond Promise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