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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6. 21. 11:27
1. 리처드 브랜슨(Richard Charles Nicholas Branson)
출생: 1950년 7월 18일, 영국 출생
학력: 고등학교 중퇴
경력: 현 버진그룹(Virgin Group) 회장
        2000년 영국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 수여
        1984년 버진 애틀랜틱 항공사 사장
        1971년 버진 레코드 설립
        1966년 고등학교 시절, 잡지 『스튜던트(Student)』발행
 
목숨을 건 열기구 여행, 배를 이용한 대서양 횡단, 슈퍼맨 복장으로 케이블 타고 고층빌딩 내려오기, 걸프전쟁 발발 직전 바그다드로 가 인질 구조 비행 감행, 취미는 고공낙하 같은 익스트림 스포츠……

이러한 이력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아마도 그 사람은 모험가이거나 별난 행동으로 자신을 알리고자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 주인공은 바로 전 세계 30개국 360여 개의 사업을 보유한 영국 버진그룹의 리처드 브랜슨 회장이다.

비록 가진 것은 없었으나 도전정신만은......
선천성 난독증(難讀症)이란 장애를 갖고 태어난 리처드 브랜슨 회장은 부모의 유산 없이 맨손으로 자신의 회사를 세워 성공한 기업인으로 손꼽힌다. 그는 32억 달러(약 3조 2천억 원)의 재산을 가진, 영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부자이다.

리처드 브랜슨 회장이 지금과 같은 명성과 부를 이루게 된 데에는 그의 어머니의 역할이 컸다. 리처드 브랜슨에게 있어 어머니는 강한 독립심과 도전정신을 갖게 하는 기원이었다. 일례로 그의 어머니는 네 살이었던 그를 집에서 5km 정도 떨어진 곳에 두고는 집까지 혼자 돌아오게 했으며, 열 두 살이었던 그에게는 80km나 떨어진 곳에서 자전거를 타고 집에 찾아오게도 하였다.

사업에 뛰어들어 성공을 이루다
선천성 난독증으로 인해 그의 학창시절 성적은 늘 최하위권이었다. 때문에 공부보다 스포츠에 더 열중한 그였지만 무릎 부상으로 운동을 할 수 없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결국 리처드 브랜슨은 열 여섯 살 때 학교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사업에 뛰어들게 된다. 한편 그가 학교를 그만 둘 당시 학교 교장이 ‘브랜슨은 백만장자가 되거나 감옥에 갈 것이다’고 예언했다고 한다. 이는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그의 첫 사업은 『스튜던트(Student)』란 학생 잡지였다. 난독증 때문에 편집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그는 광고와 판매 등을 책임졌다. 잡지는 학교생활에서 존재하는 불합리한 관행 등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수익을 크게 내지는 못했다. 리처드 브랜슨은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1971년 동료들과 함께 음반 우편 할인판매를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한 버진(Virgin, 처음 시작한다는 의미) 레코드가 현재의 버진그룹의 이름이 되었다.

한편 우편 판매 모델의 한계를 직감한 리처드 브랜슨은 경쟁사와의 차별화를 고민하던 중,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됐다. 기존 음반판매 업체들은 오로지 음반을 판매한다는 생각이었으나 고객들은 음악 자체를 즐긴다는 것이었다. 그는 발견한 사실을 근거로 매장을 판매 장소만이 아닌 편안한 분위기에서 음악을 들으며 담소를 나룰 수 있는 장소로 만들었다. 그는 ‘상품’이 아니라 ‘즐거움’을 판다는 비즈니스 모델을 창조한 것이다. 이 모델은 소비자들을 빠르게 끌어들였고, 사업은 성공할 수밖에 없었다.

리처드 브랜슨은 이런 성공을 바탕으로 나이트클럽, 영화 배급, 게임 소프트웨어, 호텔 그리고 항공 사업까지 사업을 확장하였다. 특히 항공 사업 진출은 당시 영국의 브리티시 항공이 있었기 때문에 무모하다는 비판이 많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도전정신이 있었다. 단 한 대의 비행기로 사업을 시작한 버진 애틀란틱 항공은 일등석 대신 비즈니스 클래스 요금대의 ‘어퍼 클래스(Upper Class)’를 경쟁사 1등석 이상의 서비스로 제공했다. 이런 혁신적 서비스를 통해 회사는 각종 상을 휩쓸며 버진이란 브랜드를 크게 알렸을 뿐 아니라 영국 제2의 항공사가 되었다.

괴짜 CEO로 거듭나다
이 후 리처드 브랜슨은 버진이란 동일한 브랜드를 인터넷, 식품, 금융, 콘돔사업 등으로 확장했다. 그가 이렇게 사업을 확장하는 이유는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버진 레코드 경영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그에게 있어 인생은 그 자체가 즐거움이며, 이는 ‘상품이 아니라 즐거움을 판다’는 그의 경영 철학과 일맥상통한다. 그에게 있어 사업 확장은 곧 인류에게 즐거움을 제공하는 것과 같다.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 사업을 한 적은 없다. 단지 사업을 하면서 즐겁게 일하면 돈은 자연스레 굴러들어온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래서 나는 종종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재미있는지 그리고 그 일로 행복한지 자문해보곤 한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명예나 재산보다 훨씬 중요하기 때문이다. 또 뭔가가 더 이상 재미가 없어질 때는 왜 그런지 생각해본다. 그리고 계속 재미가 없으면 그 일을 그만둔다. 휴식도 좋고 휴일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하든 간에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스스로 즐겨야 한다. 일을 통해 영감과 만족감을 얻어야 한다.”

이러한 경영철학 때문에 그는 ‘엔터테이너 CEO’ 혹은 ‘히피 자본가’로 불린다. 일례로 리처드 브랜슨은 ‘버진 콜라’ 홍보를 위해 뉴욕 타임스퀘어에 탱크를 타고 들어가 코카콜라 간판에 대포를 쏘는 이벤트를 벌이기도 했다. 또 열기구를 타고 세계일주를 두 번이나 시도했다 실패하자 또 다시 목숨을 걸고 도전하기도 했으며, 웨딩 업체인 ‘버진 브라이드’를 시작할 때는 웨딩드레스 차림에 여장을 하고 나타나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파격적인 행동은 단순 기행이 아닌 치밀하게 계획된 브랜드 전략의 일환이다. 리처드 브랜슨이라는 이름 자체를 버진이라는 기업을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만든 것이다. 이는 『타임』이 리처드 브랜슨을 이미지의 마법사로, 버진을 롤스로이스 이래 영국 최고의 브랜드로 평가한 것과 마케팅의 대가 필립 코틀러 교수가 리처드 브랜슨을 당대 최고의 마케터라 칭송한 것, 그리고 액센츄어 컨설팅사가 조사한 세계적 경영구루(guru) 50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된 것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겉으로 보기에 화려해 보이는 그의 이러한 행동은 보이지 않는 이면의 내적 성찰과 행동들에 바탕한다. 리처드 브랜슨은 메모광이기도 하다. 일상생활에서 순간순간 발생하는 아이디어를 기록한 노트만 해도 100권이 넘는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고자 할 때 이 노트들을 훑어보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리처드 브랜슨은 “지금의 나를 성공으로 인도한 것은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었다.”는 말로 자신의 성공 스토리를 요약해 말할 정도로 자기 자신에 대한 명확한 정체성을 가지고 행동하는 CEO이다. 2006년 엘 고어와의 만남을 통해 최근에는 환경문제와 기업의 사회책임활동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그가 모든 일에 승승장구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탈루 혐의로 교도소에 수감되기도 했고, 이혼경력도 있다. 사업 측면에서 망한 사업도 많았고, 현재도 매출감소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회사도 있다. 하지만 그는 이런 것을 감추려 하지 않으며, 실패에 대해 매우 관대하다. 이러한 그의 철학이 조직을 움츠려 들게 하지 않으며, 구성원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촉매제가 되고 있다.

도전정신과 즐거움을 앞세운 리처드 브랜슨은 사업에 대한 일반인들의 통념을 깬 괴짜 CEO로, 새로운 스타일의 리더십을 보여준 경영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 야마다 아키오(山田 昭男)
출생: 1931년 중국 상하이 태생
학력: 일본 기후현 오가키 중학교졸
경력: 극단 미라이좌(未來座) 무대 감독
        1965년 미라이공업(未來工業) 설립
        1989년 오주호조 훈장 수상
        1999년 오가키시 공로상 수상
        2001년 소코교쿠지츠쇼 훈장 수상
 
연간 휴일 140일(일본 평균 120일), 정년 70세, 월급은 동종업계보다 10% 높은 수준, 800여 명의 전 직원이 정규직, 하루 근무시간은 7시간 15분(일본 법정근로시간 8시간), 영업목표도 야근도, 보고도 없는 그리고 5년마다 회사 경비로 해외여행을 하는 회사가 있다. 바로 샐러리맨의 천국이라 불리는 일본의 중소업체 미라이공업이다.

미라이공업은 세계적인 대기업 마쓰시다(松下)를 누르고 스위치박스 사업에서 승승장구하는 회사이다. 과연 샐러리맨들의 천국이라 불리는 미라이공업의 경영자는 어떤 사람일까? 미라이공업의 설립자이자 사장인 야마다 아키오를 만나보자.

연극 활동으로 아버지에게 쫓겨나
1931년 중국 상하이 태생인 야마다 아키오는 1965년 선친이 세운 전기설비 자재업체에서 전무로 일하다 해고를 당한다. 해고 사유는 괘씸죄이다. 당시 야마다 아키오는 연극에 심취하여 극단 미라이좌(未來座)를 설립하고 단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그런 그를 경영에 게으르다는 이유로 해고하였고, 졸지에 야마다 아키오는 퇴직금도 못 받고 회사에서 쫓겨 나게 되었다. 그 후 그는 극단 동료 3명과 극단 이름을 따서 미라이공업(未來工業)을 설립하게 된다.

긍정적인 희망, 믿음을 가진 야마다
미라이공업 창업 당시 주력으로 설정한 스위치 박스는 글로벌 기업인 마쓰시다가 시장을 압도적으로 지배하는 제품이었다. 하지만 야마다 아키오는 항상 고객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보다 편리하고, 좋은 기능의 제품을 만들 수 있다면 마쓰시다를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는 ‘항상 생각하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직원들의 창의적 아이디어를 유도하였다. 일년 내내 직원들의 아이디어를 모집하고 어떤 내용을 적어내든 직원들에게 500엔(약 4,300원)을 지급했으며, 적어낸 아이디어가 채택되어 제품으로 응용되면 최고 5만 엔(약 430,000원)의 포상금을 지급하였다. 이렇게 직원들의 창의력을 극대화하여 탄생한 아이디어 상품만 해도 18,000여 개, 그 중 90% 이상이 특허로 등록되었다. 값싼 제품이 아닌, 보다 가치 있는 제품으로 고객의 마음을 사로 잡은 것이다.

볼펜 던져 과장 뽑기
야마다 아키오는 회사의 모든 사원을 믿고, 그들에게 일을 맡기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으며, 회사가 직원들을 감동시키면 직원들은 남들과의 경쟁이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직원들의 작은 노력이 모여 궁극적으로는 회사의 성장으로 이어진다고 하는 철학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미라이공업은 성과주의란 것이 없다. 다만, 철저한 연공서열 만이 있을 뿐이다. 원래 61세였던 정년도 70세로 상향조정하며 사실상 종신고용을 선언하였다. 실제로 미라이공업에서 직급은 허울에 불과할 뿐이다. 일례로 1991년 상장할 당시, 상장기업에 어울리는 조직을 만들라는 대장성의 요구가 있었을 때, 이름 적힌 종이를 선풍기를 돌려 날린 후 가장 멀리 간 쪽지부터 과장을 시켰으며, 그 후에는 볼펜을 던져 과장을 정하기도 하였다. 미라이공업에서는 780명 직원 모두가 직급으로 나눠진 사이가 아닌 순수한 동료일 뿐이다.

기업 경영도 연극 연출처럼
연극을 사랑하는 야마다 아키오는 현재 자신의 급여 90%를 극단에 후원하고 있다. 그가 생각하는 경영은 연극과 같다. 연기를 하는 무대 위 배우에게 연출자가 모든 걸 걸듯, 경영자 역시 사원이라는 배우에게 기업의 모든 걸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사원 스스로 감동하여 열심히 일을 한다면, 기업은 성장한다는 것이다. 그의 경영관 하에서는 채찍은 없고 오로지 당근만 있을 뿐이다. 창업 이래 한번도 도장을 찍어본 적이 없다는 야마다 아키오는 심지어 일본 내 30여 개 미라이공업 사업장 중에 5군데 밖에 가본 적이 없다고 한다.

현재 일본 제조업의 평균 영업이익률이 3% 수준이지만, 미라이공업의 영업이익률은 2000년 이후 10% 이하로 떨어져 본 적이 없다. 미라이공업이 샐러리맨의 천국이라는 것을 종업원 스스로 알기 때문에 일년에 140일을 쉬더라도 나머지 225일 근무에 직원들은 최선을 다해 일한다. 야마다 아키오의 직원에 대한 신뢰가 최고의 자율 경영으로 빛을 발휘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3. 마이클 오리어리(Michael O’Leary)
출생: 1961년 3월 20일생
학력: Trinity College 경영학 학사 (1983년)
경력: 1983년~1985년 SKC(Stokes Kennedy Crowley) Tax consultant로
        근무 
        1985년~1987년 News agent’s business 회사 운영 
        1987년 Ryan air 입사
        1991년~1994년 Deputy Chief Executive of Ryan air
        1994년 Ryan air CEO 취임  

2007년 4월, 유럽 3위의 단거리 저가항공사인 라이언에어(RYAN AIR)가 편도 비행기 티켓을 10파운드(약 2만원)란 파격적인 가격에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이로써 유럽 저가항공사들의 가격인하 경쟁이 다시 불붙기 시작했다. 항공사 간 저가요금 경쟁에 불을 지핀 라이언에어는 아일랜드에 본사를 둔 기업으로 CEO는 마이클 오리어리(Michael O’Leary)다.

일부에서는 마이클 오리어리의 전형적인 박리다매식 경영이 곧 수명을 다할 것이라 했지만, 라이언에어의 실적은 계속 좋아지고 있다. 또한 마이클 오리어리의 거침없는 언변과 화끈한 성격, 청바지에 운동화 차림 등이 화제가 되고 있다.

시골 농부의 아들에서 항공사의 CEO로
마이클 오리어리는 아일랜드의 전형적인 농촌마을 캔터크(Kanturk)에서 6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킬데어(Kildare) 지방에서 유년기를 보낸 마이클 오리어리는 1979년 트리니티 칼리지(Trinity College) 경영학과에 입학했으며, 그의 삼촌이 운영하는 바에서 일하며 학비를 충당했다. 대학 시절 그의 성적은 우수한 편이 아니었는데, 1983년 졸업 당시 그의 학점은 겨우 2.1점이었다고 한다. 때문에 일부 언론에서는 마이클 오리어리가 대학에서 낙제점을 받아 졸업하지 못했다고 오보를 내기도 하였다.

한편 그는 SKC(Stokes Kennedy Crowley 후에 KPMG로 개명)에서 세무 컨설턴트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딘 후 신문판매사업에 뛰어들어 성공을 하게 된다. 마이클 오리어리가 SKC 근무 당시 고객이었던 라이언에어의 창업자 토니 라이언(Tony Ryan)은 오리어리를 눈 여겨 보고 라이언에어의 세금 및 투자 문제를 총괄하는 총재무책임자로 영입하였다. 이로써 마이클 오리어리와 라이언에어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라이언에어의 경영정상화로 주목
1985년 25명의 종업원으로 시작한 라이언에어는 저가항공기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했지만, 곧 유동성 위기 등의 비효율적인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이에 마이클 오리어리는 전통적인 항공사의 비즈니스 모델로는 사업 확장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저가항공사 사우스웨스트항공을 모델로 면밀히 연구하였다. 그 후 마이클 오리어리는 2년 만에 라이언에어의 경영을 정상화시켰으며, 지금도 라이언에어의 승승장구를 이끌고 있다.

효율을 위해서라면
마이클 오리어리의 최고의 가치는 효율이다. 그는 이동 시간을 줄이기 위해 2004년부터 자신의 벤츠 자동차에 택시 간판을 부착하고 합법적으로 더블린(Dublin)의 버스 전용 차로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각 언론사는 636백만 파운드(약 1조 2천억 원)의 재산가인 그에 대해 가십 기사를 냈으며, 급기야 2005년 아일랜드 교통국에서는 마이클 오리어리에 대한 우려의 성명을 내기도 하였다.

한편 마이클 오리어리는 저가항공사들에게 엄격한 이산화탄소 배출량 규제를 요구하는 영국 환경단체들을 겨냥해 집단 히스테리를 부리고 있다는 독설을 내뱉기도 하였다.

마이클 오리어리의 효율 우선 경영은 무리한 착륙시도 같은 안전 사고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2005년에는 로마에서 무리한 착륙을 시도해 당국자들을 긴장하게 만들었으며, 2006년 6월에는 아일랜드 코크(Cork) 공항 상공에서 라이언에어 여객기가 1차 착륙시도 실패 후 정상적인 ‘우회(detour)’ 절차 대신 조그만 원을 그리며 몇 십분 동안 낮은 비행을 해 지역 주민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이에 대해 영국 『가디언』은 ‘이번 사태는 여객기가 착륙해서 재이륙할 때까지의 시간을 최소화해 회전율을 높이려는 라이언에어의 전략 탓’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라이언에어의 성공신화는 계속 된다
철저한 계획, 획기적인 비용 절감 그리고 경쟁자들의 비판에 흔들리지 않는 마이클 오리어리의 냉혹한 태도는 저가항공사의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일부 우려를 불식시키며 순항을 이어가고 있다. 2007년에도 고유가와 저가항공업계의 경쟁심화 등의 악재에도 불구하고 꾸준한 성장을 거듭하였다. 2000년 연 7백만 명이었던 승객 수는 2005년 3천만 명을 돌파했으며, 2007년에는 5천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기내 서비스 매출과 공항 렌터카 서비스 수익도 꾸준히 증가하는 등 라이언에어의 성장은 계속되고 있다.

공격적인 가격 정책과 거침없는 독설로 항공업계 경쟁사들과 관계 당국에게 거만하다는 비평을 받고 있는 마이클 오리어리지만, “핵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우리의 성공신화는 계속될 것”이라고 외치는 그의 실적은 당당하기만 할 뿐이다


4. 캐빈 로버츠(Kevin Roberts)
출생: 1949년 영국 Lancaster 태생
학력: Lancaster Royal Grammar School 중퇴
경력:
1969~72: Mary Quant Cosmetics, Brand Manager
1972~75: Gillette, International New Products Manager, Europe
1975~82: Procter & Gamble, Group Marketing Manager
1982~89: Pepsi Cola, Regional Vice President, Middle East 및
             President and Chief Executive Officer, Canada
1989~96: Lion Nathan, Director and Chief Operating Officer
1997~현재: Saatchi & Saatchi Chief Executive Officer Worldwide

P&G의 마케팅 매니저, 중동지역 펩시콜라 사장, 펩시콜라 캐나다 사장을 거쳐 세계적인 광고대행사 ’사치앤드사치(Saatchi & Saatchi)’를 이끌어 가는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인 캐빈 로버츠(Kevin Roberts). 그는 현재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겸임교수와 아일랜드 리머릭대학, 뉴질랜드 와이카토 경영대학원의 교수를 맡으면서 경영 이론보다는 학생들에게 감성과 창의력을 강조하고 있다. 소위, 괴짜 CEO계의 원조라고 불리는 케빈 로버츠는 괴짜 행동뿐 아니라, 그 만의 리더십과 명확한 비전 제시로 자신의 명성을 확고히 만들고 있다.

아이디어 가득한 CEO
1987년 펩시콜라 캐나다 법인의 행사장, 당시 새로 임명된 법인장이 짧은 연설을 마친 후 갑자기 기관총을 들어 무대 위 무언가를 향해 난사하기 시작하였다. 행사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지만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다. 새 법인장이 겨냥한 표적은 바로 무대 위에 설치된 경쟁업체 코카콜라의 자판기였다. 상식을 깬 새 법인장의 이벤트는 당연히 핫 이슈로 떠올랐고, 구전효과에 힘입어 캐나다 시장에서의 펩시콜라 시장점유율도 높아졌다.

이 사건의 주인공이 바로 캐빈 로버츠이다. ‘람보’라는 별명을 얻은 괴짜 CEO 캐빈 로버츠는 사건이 있은 2년 후, 호주의 주류 회사인 라이온네이선(Lion Nathan)의 최고 운영 책임자(COO)로 가게 된다. 캐빈 로버츠는 라이온네이선을 호주를 선도하는 음료회사로 만들었으며 중국시장에도 진출시켰다.

한편 라이온네이선에서도 캐빈 로버츠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라이온네이선 재무분석팀과의 첫 만남 당시, 캐빈 로버츠는 동물원에서 진짜 사자 한 마리를 빌려 회의실로 들어갔다. 그가 사자를 회의실로 가져간 이유는 간단하다. 회사 이름에 사자(Lion)가 들어가는데 회의에 사자가 빠지면 섭섭하다는 것이다. 라이온네이선의 직원들은 그가 회사를 떠난 뒤에도 10년이 넘도록 그 사자와 그의 첫인상을 잊을 수 없었다고 한다.

불가능은 없다
캐빈 로버츠가 사자를 회의실로 데리고 간 궁극적인 이유는 ‘상식을 뛰어넘는 발상을 한다면, 이 세상에 불가능한 일은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고등학교 중퇴 후, 1969년에 런던의 유명한 패션하우스 ‘메리퀀트’(Mary Quant)에서 첫 직장 생활을 시작하였다. 미니스커트의 창시자인 디자이너 메리 퀀트는 당시 유럽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었는데, 패션을 몰랐던 캐빈 로버츠가 메리퀸트에 입사할 수 있었던 것은 프랑스어와 스페인어를 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 후 그는 질레트와 P&G를 거쳐 1987년에는 펩시콜라 캐나다의 CEO로 그리고 라이언네이선을 거쳐 1997년부터 지금까지 사치앤드사치(Saatchi & Saatchi)를 이끌고 있다.

그가 고교 중퇴의 학력임에도 불구하고 글로벌 기업으로 이직을 하고 승승장구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 필적하는 실적을 당당하게 내기 때문이다. 1997년 심각한 재정적자 위기에 빠진 사치앤드사치에 부임한 캐빈 로버츠는 임금 삭감이나 구조조정보다는 앞으로 1년 안에 업계 선두로 키워갈 수 있는 최고의 아이디어를 만들어 보자는 부임연설을 하였다. 그리고 1년 후 사치앤드사치는 칸 국제 광고제상을 독식했을 뿐만 아니라, 대형 광고 고객사인 P&G, 도요타, 아디다스 등을 유치하였다.

러브마크로 대표되는 감성 경영
그가 사치앤드사치의 부활을 위해 창조해 낸 새로운 아이디어는 바로 ‘사랑’이었다.
‘브랜드는 죽었다’는 고민에서 탄생한 마케팅 신개념인 ‘러브마크’는 소비자와 감성적인 연결을 이뤄내는 제품과 서비스, 경험을 의미한다. 기저귀의 흡수력이 좋다는 광고보다는 아기의 건강한 발육을 돕는다는 광고를 만들고, 때가 잘 빠진다는 세제 광고보다는 자사의 세제 때문에 여성들의 여가 시간이 많아진다는 광고를 만드는 것이다. 그가 바라는 자신의 모습 역시 직원에게 사랑 받는 CEO라고 한다. 솔선수범하는 성격 좋은 코치가 되어 회사가 가족이 되고, 친구가 되어 쉽게 배반할 수 없는 근무환경을 만드는 것이 최선의 결과로 이어진다는 생각이다.

창의력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캐빈 로버츠는 동물원보다는 정글에서 일하는 스타일이다. 정말로 사자가 어떻게 사냥을 하는 지 알고 싶으면, 동물원보다는 정글로 나가서 사자의 생태를 관찰해야 한다는 논리이다. 실제로 중국 소비자들의 특성을 알기 위해 7명의 연구 인력이 중국 전역을 2만5,000마일이나 여행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런 노력으로 제품 디자인을 바꾼 일도 있는데 바로 세제통의 구조이다. 중국 시장에선 세제통이 크고 무거워 소비자들이 잘 들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내고 세제 용기에 큰 맥주통에 달려있는 것과 같은 작은 꼭지를 만들어 누구나 필요한 만큼만 덜어 쓸 수 있는 제품을 만들었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책상 앞에 앉아서는 쉽게 나오지 않을 아이디어일 것이다. 혁신적인 사고를 위해 하루에 30분 이상 직원들이 공상에 빠지도록 독려한다는 그는 이 시대 최고의 괴짜 CEO 중의 한 명일 것이다.


5. 쿠타라기 겐(久多良木 健)
출생: 1950년 8월 8일 동경 태생
학력: 도쿄 전기통신대학교 학사
경력: 2007년 소니 컴퓨터엔터테인먼트 회장
        2006년 소니 컴퓨터엔터테인먼트(SCEI) 사장
        2003년 소니 글로벌 부회장
        1997년 소니 부사장
        1975년 소니 입사

진화론의 관점에서 돌연변이란 변화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기업이란 시스템 안에서의 변화, 즉 돌연변이는 쉽게 용납되지 않는다. 몇 년 전 히트 친 광고 카피처럼 모두가 ‘Yes’라고 할 때, 홀로 ‘No’를 외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듯 말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종종 돌연변이와 ‘NO’라고 외칠 수 있는 그런 괴짜를 필요로 한다. 어떤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관철할 수 있는 그런 괴짜를. 오늘 만나 볼 쿠타라기 겐 회장이 바로 그런 사람 중 한 사람일 것이다.

진정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해라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일본 패망과 함께 대만에서 거주하던 쿠타라기 겐의 가족은 삶의 기반을 잃고 동경으로 이주하게 된다. 쿠타라기 겐의 아버지는 대만에서 서점을 운영하면서도, 가업을 이어 일본 동경에서 인쇄업도 해 왔는데, 쉬는 날 없이 인쇄를 해야만 했다. 가업을 잇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쿠타라기 겐의 아버지는 인쇄업은 자신의 대에서 끝내겠다며, 쿠타라기 겐에게는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라고 하였다. 한편 쿠타라기 겐은 어렸을 때 키도 작고 건강하지 못했는데, 이런 신체적 이유로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고 자랐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그를 봐주던 생활 지도교사는 그에게 협동심도 없고, 독불장군 같다는 지적을 했다고 한다.

나만의 사업을 하고 싶다
쿠타라기 겐은 자신의 진로에 대해 고민하던 중 자신은 다른 사람에게 고용되어 일하는 것은 체질에 맞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대학 졸업과 동시에 자신만의 사업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1970년대 중반 대학을 갓 나온 사회 초년생이 그것도 명문대 출신도 아닌 기업가가 빠른 성공을 이루기는 어려웠다. 이에 쿠타라기 겐은 영업사원으로 정해진 계단을 착실히 밟기보다는 대기업의 막강한 자원을 발판으로 스스로 대규모 사업을 전개하겠다는 비전을 품고 소니를 선택한다. 당시 소니는 전통적인 일본기업과는 달리 탁월한 기술력을 앞세워 급성장하는 회사였고, 학력 차별이나 족벌의 경영 참여가 없는 회사였다.

문제아의 선봉으로 디지털의 잠재력을 발견하다
쿠타라기 겐은 소니에 입사는 했지만, 회사 내 블랙리스트 상위권에 위치한 문제아였다. 회사에 싫은 소리를 하게 될 때 늘 선봉에 섰고, 1980년대 중반 아날로그 기술이 득세할 때 개념조차 생소한 디지털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모든 이들의 비난을 사기도 했다. 이 시기 소니에서 디지털 기술이 사용되는 제품은 CD 플레이어뿐이었다. 디지털을 외치고 다니는 쿠타라기 겐에게 한 선배는 소니에서 그런 말을 하면 전출 당할 수 있다는 경고하기도 했다. 입사 9년 차였던 1984년, 쿠타라기 겐은 여러 개발부서를 전전하다 정보처리연구센터로 부서를 옮기는데, 거기서 3D 컴퓨터 기술인 ‘시스템 G’를 알게 된다. 쿠타라기 겐은 2차원 게임이었던 닌텐도의 패미콤이 유행하던 그 시기에 3D 게임에 대한 막연한 사업 실현을 꿈꾸게 된다.
 
플레이스테이션의 아버지
게임 산업이 미래의 희망이라는 쿠타라기 겐의 생각은 소니에서 완전히 무시를 당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일단은 닌텐도의 새로운 게임기에 소니의 CD 기술을 지원하는 프로젝트를 구상하게 된다. 그러나 소니의 게임사업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닌텐도는 소니와의 계약을 파기하고, 1991년 필립스와 손을 잡는다.

이에 대다수 경영진은 이 계약 파기를 계기로 소니가 게임사업에서 손을 떼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쿠타라기 겐은 위기를 기회로 활용한다. 소니를 배신한 닌텐도를 이길 수 있는 기술이 이미 개발되었다며, 당시 소니 회장 오가 노리오를 설득해 독자적인 3D 게임 프로젝트인 플레이스테이션 사업 추진 승인을 받는다. 그로부터 2년 반이 지난 1994년 12월에 쿠타라기 겐의 프로젝트 결과물인 플레이스테이션이 출시된다. 플레이스테이션은 출시되자마자 7,000만대 이상이 판매되었고, 1999년 출시된 플레이스테이션2는 1년에 1,800만대 이상 판매되어, 소니 수익의 50%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장난감으로 치부 받았던 쿠타라기 겐의 아이디어가 회사의 주 수익원으로,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상품 중 하나로 탄생한 것이다.

한편 쿠타라기 겐은 2006년 출시한 플레이스테이션3의 판매부진과 닌텐도 DS 등의 약진으로 최근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일개 개발부서장에서 소니 역사상 최연소 사장으로 그리고 무시당했지만 꿋꿋하게 자신의 아이디어를 사업화하겠다는 비전을 끝내 실현한 그의 괴짜 같은 추진력은 전설로 남을 것이다.
- 포스코 경영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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