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1955년 인도 첸나이
학력: 인도 마드라스 크리스천대학 화학 전공
인도경영대(IIM) MBA
1978년 도미, 예일대 경영대학원 MBA
경력: 보스톤컨설팅그룹(BCG)에서 중국, 러시아, 인도 등 전략 분야 담당
모토로라, ABB에서 전략기획 부문 부사장 역임
1994년 펩시 합류(수석부사장 전략기획부문) 이후 CFO 역임
2006년 10월 펩시 CEO 취임
2007년 5월 CEO 및 회장 역임
주목 받는 여성 CEO
세계를 움직이는 여성 CEO 중 가장 많은 연간 매출액을 자랑하는 CEO는 누구일까? 바로 펩시의 인드라 누이이다. 2006년과 2007년 『포천』이 발표한 ‘미국 재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기업인 50’에서 1위, 2008년 2월 미국 경제 전문지 『포브스』가 발표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CEO Top10’에 선정된 인드라 누이의 행보에 재계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펩시는 2007년 한 해 동안 투자수익률 9.4%를 기록하며 S&P 지수 연간투자수익률인 2.6%를 훨씬 상회하였는데, 특히 인드라 누이가 펩시 CEO로 임명된 2006년 10월 이후의 누적 투자수익률은 13.1%에 달한다. 또한 연간 매출액은 394억 7,000만 달러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CEO Top10’ 순위에 이름을 올린 다른 여성 CEO들 중 가장 많은 액수이기도 하다.
인도 출신 여성으로서 미국 핵심기업의 CEO가 되다
1955년 인도 첸나이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인드라 누이는 힌두교였으나, 가톨릭 학교에 진학하여 토론과 운동, 기타 연주에 이르기까지 학업과 병행하여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마드라스대학 시절에는 여성 록밴드를 결성해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후 인드라 누이는 콜카타에 있는 인도경영대학원(IIM)과 예일대에서 MBA를 취득한다.
졸업 후 인드라 누이는 보스턴 컨설팅 그룹을 거쳐 모토로라와 ABB에서 전략기획 부사장을 역임한 후 1994년 펩시의 수석 부사장으로 가게 된다. 펩시에서 그녀의 전략기획 능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2004년에 만년 2위에 머물던 펩시가 코카콜라를 제치고 음료업계에 1등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녀의 탁월한 전략 때문이었다. 그 후 인드라 누이는 2006년 10월 펩시 최초의 여성 CEO가 된다.
CEO가 된 인드라 누이는 감성이 있는 리더로 직접 직원들에게 팝송을 들려 주기도 하고 종종 직원들을 대상으로 이벤트를 열기도 했다. 하지만 일할 때만큼은 철두철미 해 리더의 기질을 고루 갖춘 리더라 평가 받고 있다.
한편 인드라 누이는 “(미국에서) 여자로 외국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누구보다고 더 영리해져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이는 그녀가 인정받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누이의 전략적, 글로벌 관점과 펩시 성공의 신화창조
펩시는 1990년대 중반 이후 피자헛, 타코벨 등 실적이 부진한 외식사업들을 분사화하고 대신 생수, 스포츠 음료, 과일로 만든 스낵 등 사업다각화 및 기업 이미지 제고의 성공적인 ‘재구조화(reshaping)’를 추진해 왔는데, 이러한 전략적 움직임의 중심에 바로 인드라 누이가 있었다.
인드라 누이는 CEO가 된 후에도 미국 중심의 사업구조를 글로벌 영역으로 확장하고, 임원진을 예전의 두 배인 29명으로 늘리는 등 과감한 전략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2007년에는 펩시의 사업 포트폴리오에서 건강 식품의 비율을 높여가는 과정으로 콩 음료 및 유기농 주스를 생산하는 ‘Naked Juice’ 라는 회사를 13억 달러에 인수하기도 하였다.
이에 지난해 펩시의 글로벌 사업들은 22% 성장하였고, 이들 사업이 현재 펩시 전체 매출액의 40%(약 150억 달러)를 구성하고 있다. 향후에도 펩시의 글로벌 사업들은 긍정적인 성장을 할 전망이다. 이러한 펩시의 성장은 2007년 미국 시장의 전반적인 정체 가운데 보인 놀라운 성과라 할 수 있다.
‘목적을 가지는 성과창출(Performance with Purpose)’
인드라 누이의 경영철학은 ‘목적을 가지는 성과창출’이다. 이는 미국기업이 사회적이고 도덕적인 가치를 추구하면서 기업 활동을 해야 한다는 메시지이다. 그녀는 2008년 다보스 포럼에서 세계의 빈곤 지역들에서 물이 없어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언급하면서 물과 자원을 아끼는데 기업들이 앞장서야 한다고 연설하였다. 또한 그녀는 세계적 기업들은 이제 웬만한 국가 경제와 맞먹는 경제 규모를 가지고 있으며, 이윤추구만 할 때를 지나 글로벌 이슈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과 행동을 보일 때라고 강조하였다. 이에 펩시도 자원의 효율적 사용과 보전을 기업가치로 추구하고, 좀 더 건강한 식음료 판매로 고객을 더욱 건강하게 지키면서 기업 이익을 달성하는 것이 목표라고 하였다.
경영환경의 불확실성과 누이의 도전
현재 미국 경제는 침체 중이며, 따라서 펩시 역시 가장 힘든 시기를 맞고 있다. 물론 투자자들은 오랜 기간 펩시의 저돌적인 글로벌 사업 역량과 지속적이고도 안정적인 성장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왔고, 2007년 4분기 실적도 매출액 17% 증가 및 영업이익 9% 증가 등으로 아직까지는 좋은 편이다.
하지만 옥수수와 식용유 등 주요 재료의 가격은 치솟고 있으며, 유기농 주스의 비싼 가격은 예산에 민감한 소비자들의 지갑을 열 수 있을지 불안한 상황이다. 게다가 코카콜라는 칼로리 제로 콜라, 비타민 워터 등으로 또 다른 콜라 전쟁을 예고하고 있다.
이렇게 경영환경의 어려움이 예상되는 가운데, 기업의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과 이익추구의 목표달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인드라 누이가 이번에는 어떠한 전략을 펼칠지 주목된다.
2. 앤 멀케이 (Anne Mulcahy)출생: 1952년 10월 21일
학력: Marymount College 학사(영문학/저널리즘 전공)
경력: 현 Xerox 회장 겸 최고경영자
2000년 Xerox 사장
1998년 Xerox 수석부사장
1997년 Xerox 최고인사담당자(CSO)
1992년 Xerox 인사부분 부사장
1976년 Xerox 영업사원으로 입사
Ranking: 2005년~2007년 Fortune 선정 ‘미국재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50인중 2위’
2006년 Wall Street Journal 선정 ‘세계가 주목할 여성 50인’
2006년 Time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제록스(Xerox)를 살린 여인
2001년 8월 파산 직전의 제록스에 최고경영자로 임명되어 ‘제록스의 기적’을 일으킨 앤 멀케이. 그녀는 『Fortune』이 선정한 미국재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순위에서 2005년부터 2007년까지 3년 연속 2위를 차지하고, 『Wall Street Journal』이 발표한 세계가 주목할 여성 50인에 선정되는 등 미국 IT업계 최고의 여성경영자로 주목받고 있다.
한 때 거대한 공룡이었던 제록스는 2000년까지 7분기 연속 적자를 기록하였고, 부채는 171억 달러에 달했으며, 주가는 63달러에서 4.4달러로 추락한 상태였다. 이의 해결책으로 제록스 이사회는 최고경영자 내정자로 경영훈련을 받아오던 임원을 탈락시키고, 시장담당 대표였던 앤 멀케이를 최고경영자 직무대행에 선임하는 모험을 택했다.
멀케이 회장은 30% 인원감원 등의 구조조정을 통해 제록스를 복사기 제조업체에서 탈피하여 종합문서솔루션회사로 거듭나게 하는데 성공하였다.
제록스와 함께한 32년
앤 멀케이는 영문학과 저널리즘을 전공한 뒤 24세에 제록스 복사기 판매원으로 입사하였다. 입사 후 16년 동안 영업부문에서 일했으며, 그 후 인사부문 부사장, 시장담당 대표 등을 역임하였다.
그녀가 제록스에 근무한 32년이라는 세월 때문에 제 살을 깎는듯한 구조조정과 혁신을 실행해야 하는 최고경영자로서 적임자가 아니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제록스에 대한 애정과 열정으로 파산 직전의 제록스를 부활시키기 위해 과감한 구조조정을 단행하였다.
강력한 구조조정과 결단력
멀케이 회장은 회사를 살리기 위해 즉시 구조조정에 착수했다. 판매사업부를 재조정하고 10억 달러의 연간비용을 줄였으며, 직원 수를 30% 감원하였다. 이러한 강력한 구조조정 중에도 연구개발비를 매출 대비 6% 수준으로 유지했으며, 직원들과의 대화 채널을 항상 열어놓고 직원들을 독려하였다.
한편 1997년부터 4년간 매출을 과다계상하고 세전순익을 부풀린 혐의를 깨끗이 인정하였다. 조기에 신뢰를 회복하고 경영 정상화에 집중하는 것이 낫다는 앤 멀케이 회장의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이러한 그녀의 결단을 통해 제록스는 2002년 4분기에 주당 1센트의 순익을 달성하며 3년 만에 처음으로 연간 기준 흑자를 기록하였다.
앤 멀케이의 회사 회생비결
앤 멀케이 회장은 ‘모방’을 통한 비즈니스 모델의 ‘재창조’를 통해 제록스를 종합문서솔루션회사로 거듭나게 하였다. 모토로라와 GE의 6시그마를 조직에 적용하였고, 솔루션 회사로의 성공적인 전환을 이룬 IBM의 노하우를 모방했으며, 트렌드를 따라 복사기 제품을 흑백에서 컬러로,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빠르게 전환시켰다.
2004년 앤 멀케이 회장은 강력한 리더십과 탁월한 재무수완을 통해 기업을 정상화한 공을 인정받아 『Business Week』가 선정한 올해의 최고 CEO에 올랐다. 그녀의 수상에 미국 재계는 그 흔한 MBA 경력도 없이 열정 하나로 기적을 이뤄냈다며, 그녀에게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녀는 2006년 『Wall Street Journal』과의 인터뷰에서 성공적인 경영 비결을 3C-컬러복사(Color), 고객우선(Customers), 비용절감(Costs)-로 요약했다. 3C를 내세워 회사를 혁신하였으며, 이를 위해 아래의 5가지 원칙을 실천하였다.
1. 고객 및 직원과 함께 하라.
2. 혁신이 없는 경영진은 내보내라.
3. 감독 당국의 조사에는 있는 그대로 응하라.
4. 과거의 사업모델이 효력을 상실했음을 인정하라.
5. 직원들에게 회생에 대한 확신을 심어줘라.
최근 『New York Times』는 재즈 6중주처럼 완벽하게 조화를 이뤄내는 팀 화합형 CEO를 ‘3세대 CEO’라 분류하고, 대표적인 3세대 CEO로 앤 멀케이 회장을 언급하였다. 앞으로 앤 멀케이 회장이 이끄는 제록스의 변화가 기대된다
3. 멕 휘트먼(Meg Whitman)
출생: 1956년 미국 뉴욕
학력: 프린스턴대학교 경제학 학사, 하버드대학교 MBA
경력: 1979-81 P&G 브랜드매니저
1981-89 Bain & Company 컨설턴트
1989-92 Walt Disney 마케팅 담당 부사장
1992-95 Stride Rite(신발제조업체) 사장
1995-97 Florists’ Transworld Delivery(FTD, 꽃 배달 서비스) 대표이사 사장
1997 Hasbro(장난감전문회사) 아동사업부문 총괄
1998-08.3 eBay 대표이사 사장, 현재, eBay 이사회 멤버
수상: 2001 『비즈니스위크』 선정 톱 경영인 25인
2004, 2005 『포천』 선정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경영자 1위(2년 연속 수상)
2005 『월스트리트저널』 선정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위
2008 『포브스』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00인 포함(22위)
온라인 벼룩시장의 여왕, 멕 휘트먼
IT 역사 25년 동안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CEO는 누구일까? 고민할 여지도 없이 이베이(eBay)의 마미(mommy), 멕 휘트먼이다.
1998년 3월 멕 휘트먼은 44세의 나이로 온라인 경매사이트 이베이의 CEO에 취임하였다. 휘트먼의 취임 이후 이베이는 매출 70배, 직원 500배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우면서, 미국 자본주의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무명의 벤처회사 이베이를 세계적인 인터넷 기업으로 성장시킨 휘트먼은 인터넷을 통해 부와 명성을 모두 이룬 온라인 벼룩시장의 여왕이 되었으며, 이러한 놀라운 성과에 힘입어 2004년과 2005년 『포천』이 선정한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CEO 1위 자리에 올랐다. 1998년부터 6년 연속 1위에 오른 휴랫팩커드의 칼리 피오리나 회장을 제치고 새로운 여제로 등극한 것이다.
도전의식 강한 엘리트 코스 출신의 커리어 우먼
멕 휘트먼은 1957년 미국 뉴욕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사업으로 자주 집을 비운 탓에 그녀는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자랐다. 주부였지만 도전의식이 강한 어머니로부터 규율과 격식을 중시한 강인한 교육을 받은 그녀는 프린스턴대학교 경제학과와 하버드 MBA를 이수하며 엘리트 코스를 밟는다. 대학교 입학 당시 의학 쪽에 관심이 많은 그녀였지만, 매일 『월스트리트저널』을 읽으며 비즈니스 분야에도 관심을 가졌다. 또한 어머니를 닮아 그녀 역시 도전의식이 강해 다양한 사회생활에 있어서도 두려움을 갖지 않았다.
MBA 이후 멕 휘트먼은 P&G에서 브랜드 매니저로 그리고 베인 & 컴퍼니에서 컨설턴트로, 월트 디즈니에서는 마케팅 부사장으로 재직하는 등 다양한 경력을 갖게 된다. 한편 그 후 그녀는 어린이 신발제조회사인 스트라이드 라이트와 꽃 배달 서비스회사인 플로리스트 트랜스월드 딜리버리 그리고 장난감 제조회사인 하스브로에서 CEO직을 두루 섭렵하였다.
부드러운 카리스마, ‘마미 CEO’
온화한 미소가 돋보이는 멕 휘트먼은 여전사(女戰士) 스타일과는 다른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지녔다. 그녀는 따뜻한 미소와 편안한 느낌을 주는 어머니 즉 ‘마미 CEO’라는 독특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 이베이 창업자인 오미디아르는 멕 휘트먼과의 첫만남 이후 그녀에 대해 “강한 결단력의 소유자이지만 타인을 지배하고자 하는 성향이 없는 경영자이다.”라고 평가하였다. 『유에스뉴스 앤드 월드리포트』 또한 ‘결코 보스처럼 굴지 않으면서도 임직원들을 훌륭하게 이끄는 경영자로서 다스리지 않는 경영자이자 경영하지 않는 경영자다’라고 평한 바 있다. 그녀 스스로도 엄마로서의 경험 덕분에 다른 사람들과 툭 터놓고 얘기하는 것에 어려움이 없다고 하면서, 신뢰감을 형성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남자보다 훨씬 낫다고 자부한다.
듣기를 즐겨라 - 경청의 리더십
다양한 일을 경험하면서 그녀는 ‘과거의 지식을 믿지 말고 자신의 아집을 경계하라’는 철학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철학으로 멕 휘트먼은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릴 때 자기 주장을 강하게 피력하기 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든다. 회사 구성원들의 의견을 청취하고 새로운 정보를 끊임없이 받아들여 사고의 폭을 넓혀나가는 것이 멕 휘트먼식 리더십의 특징이다.
한편 이베이는 매달 고객 20명을 초대하는 행사를 여는데, 멕 휘트먼은 이 행사에 거의 빠짐없이 참가하여 고객들의 의견을 경청하였다. 또한 그녀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많은 아이디어를 얻었다. 온라인 장터에서 활동하는 수많은 판매자와 구매자들은 경영전략의 큰 줄기를 결정하는 핵심 참모들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소통은 전자상거래 그리고 커뮤니티의 핵심이다. 정치가가 유권자를 파악하듯 우리는 이용자들의 감성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을 통해 온라인 커뮤니티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또한 그녀는 고객이 원하는 일이라면 사업계획도 과감히 바꾸었는데, 내부 검토가 끝난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고객들이 결제 시에 페이팔(Paypal) 시스템을 선호한다는 것을 알고 결제사이트 페이팔을 인수하기도 하였다.
숫자로만 말한다 - 데이터를 통한 치밀한 경영관리
멕 휘트먼은 ‘측정할 수 없는 것은 관리할 수 없다(if you can’t measure it, you can’t control it)’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철저한 데이터 분석을 기반으로 상황에 대한 맞춤형 대응전략을 내놓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이트를 방문하는지, 그 중 몇 퍼센트가 회원으로 등록하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머무는지, 어느 날이 사이트가 가장 분주한지 그리고 고객들은 어떤 점을 불편해하는지 등 모든 것을 분석하였다.
‘다이아몬드 반지는 6분에 한 개, 스포츠카는 3시간에 한 대씩 매물로 나오고’ 혹은 ‘6월에는 월요일이 가장 한가하고, 11월에는 금요일이 가장 바쁘다’는 식의 매우 구체적인 분석을 통해 자료를 만들었으며, 이를 사업전략 수립에 활용하였다.
인간적인 따뜻함
멕 휘트먼에게는 1998년 이베이 사장 부임 당시 29명의 직원을 대할 때나, 오늘날 전 세계 만 명이 넘는 직원을 대할 때나 변하지 않는 자신만의 경영철학이 있다. 바로 ‘인간적인 따뜻함’이다. 그녀는 “나에게 사람보다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이베이를 사랑하고 그 안의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그러면 회사가 곧 내 삶이 되고, 더욱 신중하고 철저하게 경영전략을 세울 수 있습니다.”라고 항상 말해왔다.
일례로 멕 휘트먼이 임원들과 인도로 출장을 가던 중 한 임원이 테헤란 상공에서 극심한 복통을 호소하자 그녀는 가장 가까운 도시에 비상착륙을 지시하고, 아픈 임원과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또한 그녀는 아픈 임원이 안정을 되찾기 전까지 곁을 지켰으며, 안정을 되찾아 보다 큰 병원으로 후송되고 나서야 비로소 나머지 임원들과 비행기를 타고 다시 인도로 향했다고 한다.
끊임없이 세상과 소통하는 멕 휘트먼
군림하지 않고 소비자와 끊임없이 소통하는 멕 휘트먼의 리더십 스타일은 불확실성 시대에 매우 적절한 리더십 스타일이라 할 수 있다.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가 ‘자신의 주장을 앞세우기 좋아하는 경영자는 실패할 확률이 높다’고 지적한 것처럼, 소비자들의 변덕스러운 기호가 상품이나 서비스의 성패를 좌우하는 상황에서 최고경영자의 독선은 실패를 불러올 가능성이 크다.
최근 멕 휘트먼은 자신의 10년 약속을 지키며, 이베이 CEO직을 사퇴하였다. “CEO는 회사의 참신한 전략과 성장을 위해 10년 이상 재직해서는 안 된다.”라고 공언하였던 자신의 신념을 실천에 옮긴 것이다. 이제 그녀는 공화당 대선 후보의 경제정책을 수립하는 역할을 맡아 실리콘밸리의 여왕에서 정치인으로의 변신을 통해 제2의 인생을 시작할 것이다. 부드러운 카리스마의 멕 휘트먼이 정치라는 새로운 도전을 통해 어떻게 변신해 나갈지 사뭇 기대가 된다.
4. 안드리아 정(Andrea Jung, 鍾彬嫻, Zhōng Bīnxián)
학력: 프린스턴대학교 영문학 학사
경력: 1999~現 Avon Products Inc. CEO & Chairman
1996 Avon Products 제품 마케팅 담당 사장
1994 Avon Products 글로벌 마케팅 담당 사장
1991 Neiman Marcus 부사장
1987 I. Magnin 선임 부사장 역임
1985 J. W. Robinson 상품개발 매니저
1979 Bloomingdale 부사장 및 상품개발 매니저
* 현 GE 및 Apple 사외이사
수상: 『포천』 선정 500대 기업을 이끄는 여성 CEO 9위
『포브스』 선정 ‘여성 기업인 10’
『월스트리트 저널』 선정 ‘주목할만한 세계 50대 여성 기업인’
『타임』 선정 ‘가장 영향력 있는 글로벌 경영인 25’
『U.S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 선정 ‘2007년 미국을 이끄는 리더’
‘여성을 위한 기업’
여성을 위한 기업(the Company for Women)을 모토로 ‘여성’을 위한 제품을 만들고, ‘여성’ 중심의 경영활동을 하며, ‘여성’을 위한 사회참여를 하는 회사가 있다. 바로 ‘2008 포천 500대 기업을 이끄는 여성 CEO’ 5위에 오른 안드리아 정(Andrea Jung)이 이끄는 세계적인 화장품 회사 ‘에이본 프로덕츠(Avon Products)’이다.
에이본 프로덕츠는 1992년부터 지속적으로 ‘핑크리본 캠페인(유방암 예방 캠페인)’을 지원하는 대표적인 기업이다. 단일 기업으로는 최대 규모인 5억 8,000만 달러 이상의 유방암 퇴치기금을 조성했을 뿐만 아니라, 여성 장학금 지원, 가정폭력 퇴치운동, ‘Avon Award to Woman’ 등의 사회공헌 프로그램을 통해 여성에 대한 에이본 프로덕츠의 확고한 의지를 보여 주고 있다.
여성을 위한 기업을 이끄는 ‘여성’
에이본 프로덕츠의 CEO 안드리아 정은 1959년 홍콩계 건축가인 아버지와 중국계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캐나다에서 출생했지만 아버지가 MIT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그녀의 주요 성장무대는 미국 메사추세츠 주가 된다. 어릴 때부터 뛰어난 피아노 실력과 우수한 성적으로 다방면에 두각을 나타낸 안드리아 정은 이후 사회 생활에서도 화려한 경력을 쌓는다. 1979년 프린스턴대학교 영문학과를 3년 만에 수석 졸업했으며, 32살의 나이로 고급 백화점 니만 마커스의 최연소 부사장으로 승진하였다. 뿐만 아니라 1999년에는 41살의 나이로 에이본 프로덕츠 CEO 자리에 오르게 된다.
CEO가 된 후 그녀는 짧은 시간 안에 에이본 프로덕츠를 화려하게 변신시키며, 500% 이상의 경이적인 주가 상승률을 기록하였다. 이로써 그녀는 에이본 프로덕츠의 진정한 선봉자이자 세계 여성 인권 향상의 최고봉에 서게 되었다. 한편 안드리아 정은 최근 GE 및 Apple의 사외이사로 지명되기도 했다.
에이븐 프로덕츠의 구원투수
에이본 프로덕츠는 『포천』이 선정한 500대 기업 중 하나로, 1886년에 설립되어 현재까지12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화장품 직접 판매 회사이다. 창립 당시에는 ‘캘리포니아 퍼퓸회사’가 사명이었는데, 1928년 창업자이자 당시 CEO인 데이비드 홀 맥커넬(David H. McConnell)이 셰익스피어의 출생지인 ‘스트렛포드-어폰-에이본(Stratford-upon-Avon)’을 방문한 것을 계기로 ‘에이본’이란 신제품을 출시하면서 사명을 변경하게 된다.
에이본 프로덕츠는 1950년대에 방영된 ‘딩동, 에이본입니다(Ding-Dong, Avon Calling)’라는 TV 광고로 엄청난 유명세를 탔다. 이 광고를 통해 에이본 프로덕츠는 ‘직판 코스메틱’ 업체의 대명사라 불릴 정도로 큰 명성을 얻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라틴 아메리카, 영국, 독일 등지로 활동 무대를 넓혀 나갔다.
그러나 1970년에서 1980년대에 걸쳐 단행한 에이본 프로덕츠의 비관련 다각화 전략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에이본 프로덕츠에 먹구름을 드리우게 하였다. 기업의 몸집이 커지면서 내부적으로는 관료주의의 만연으로 골머리를 썩게 되었고, 외부적으로는 고객들에게 ‘어머니나 할머니들이 쓰는 저가 화장품’이라는 낡은 이미지로 인식되게 되었다. 당연히 매출은 곤두박질쳤고, 주가는 5달러 이하로 떨어져 경영활동의 모든 지표들이 적신호를 나타냈다. 급기야 에이본 프로덕츠는 적대적 인수의 제1 타깃으로 거론되었고, 이에 이사회에서는 비장의 카드로 ‘안드리아 정’을 선택한다.
역사적 위기의 순간에 사령탑을 맞게 된 안드리아 정은 ‘역사와 전통’보다는 ‘새로운 비전’을 선택했다. 그녀는 기존의 에이본 프로덕츠 이미지로는 더 이상 소비자들에게 어필할 수 없고, 이는 곧 회사의 몰락으로 직결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이에 그녀는 회사 형편이 극도로 악화된 상황에서도 1억 달러가 넘는 ‘연구비 증대’를 단행하였고, ‘저가 화장품’이라는 꼬리표를 떼는 작업에 열중하였다. 수익이 나지 않는 품목은 30% 가까이 과감하게 구조조정하고, 판매 사원의 평균 연령을 40대에서 20대로 낮춤으로써 타깃 고객층을 바꾸는 쇄신작업을 수행한 것이다.
또한 안드리아 정은 에이본 프로덕츠의 핵심인력이 고객을 상대하는 판매원들임을 직시하고, 젊은 여성 판매원들의 특징을 살린 뷰티배시(Beauty Bashes), 즉 화장품 파티를 통한 제품 홍보와 판매를 수행하여 기존의 직접 판매 관행에서 탈피하였다. 이와 더불어 그들에게 뷰티배시를 통해 판매한 매출의 40%를 돌려줌으로써 적극적인 판매 참여를 유도하고, 마케팅 전문업체와 제휴하여 MTV, 보그 등 젊은 여성 계층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광고를 대대적으로 전개함으로써 판매원들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그 결과 에이본 프로덕츠는 성장률 두 자리 수 대로 진입하게 된다.
그러나 2005년 금융위기와 사스 파동으로 전 세계 기업들이 몸살을 앓던 그 때, 에이본 프로덕츠도 다시 한번 위기에 처하게 된다. 매출액 성장률이 다시 한 자리 수인 5%대로 떨어졌고, 수익률도 평행선을 그었다. 이 때 안드리아 정의 공격적인 경영활동은 또 다시 빛을 발하게 된다. 그녀는 위기의 순간에서도 물러서기 보다는 본인이 ‘중국계’인 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모두가 사스 때문에 기피하는 중국으로 과감한 투자를 감행하였다. 이를 통해 에이본 프로덕츠는 두 자리 수의 성장률과 40%의 주가 신장을 기록하였다.
도전과 열정, 인내의 리더십
안드리아 정이 위기의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고 미래를 향해 전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녀가 경험한 인내와 좌절에서 얻게 된 2가지 교훈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대학교 졸업 후 블루밍 데일의 견습사원으로 취직했던 그녀는 보잘것없는 일이 주어지는 것에 실망해 퇴사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그녀의 부모님들이 “우리 가족에게 포기란 없다. 참고 견디어 이겨내야 한다.”고 조언하면서 그녀에게 인내의 중요성을 각인시켜 주었다. 그 인내의 교훈은 그녀가 지금의 자리까지 어려운 고비를 지혜롭게 넘길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한편 1999년 그녀가 에이본 프로덕츠의 CEO가 되기 전, CEO 물망에 올랐다 떨어졌다. 당시 이사회 멤버였던 『타임』의 앤 부어(Ann Moore) CEO가 그녀에게 “자신의 시계가 아니라 인생의 나침반을 쫓아라.”라는 조언으로 흔들리는 그녀를 붙잡아 주었다. 이는 안드리아 정에게 보다 긴 안목을 가질 수 있게 해 주었고, 결국 CEO의 자리에 올라 기업 회생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안드리아 정은 ‘리더십’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2006년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 MBA 강연 내용 중 발췌)
첫째, 기업의 위에서부터 실천함으로써 실행되는 청렴
둘째, 일과 회사에 대해 끝까지 책임을 지고 임하는 열정
셋째, 가장 힘든 시기에도 놓치지 않고 가져가야 할 구성원에 대한 존중
넷째, 자리와 상관없이 잘못에 대해 인정하며, 이로부터 교훈을 얻는 자세
다섯째, 내가 하는 일과 하는 행동에 대한 자신감
여섯째,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버리고,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새롭게 만들어 가는 도전
일곱째, 사회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기업인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
이처럼 안드리아 정의 리더십은 미래에 과감히 도전하는 열정과 더불어 기업의 뿌리가 구성원과 사회임을 균형 있게 인식하는 데서 비롯된다. 특히 안드리아 정에게 있어 구성원과 사회는 바로 ‘여성’으로 귀결된다. 그 어느 때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강조되고 있는 요즘, 에이본 프로덕츠의 역사와 전통을 미래 성장동력으로 회생시킨 안드리아 정이 세계 여성의 권익 신장을 위해 어떤 행보를 할 지 예의주시해 봄직하다.
5. 수잔 아놀드 (Susan E. Arnold)
학력: 펜실베니아대학교 학사(1976)
피츠버그대학교 MBA(1980)
경력: 2007년 P&G 글로벌 비즈니스 부문 총괄사장
2007년 ~ 월트디즈니 이사
2006년 P&G Beauty & Health Care 부회장
2004년 P&G Beauty Care 부회장
1999년 P&G Personal Beauty Care에서 글로벌 부문장
1990년 P&G 캐나다 화장품 사업부 매니저
1980년 P&G 입사, 브랜드 어시스턴트 담당
수상: 『Fortune』 2007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CEO 7위 (2006년 10위, 2005년 17위)
『Wall Street Journal』 세계에서 주목할 만한 50인의 여성 (2002년~)
P&G 170년 역사 최초의 여성 사장
수잔 아놀드는 2007년 P&G 글로벌 비즈니스 부문 사장에 취임하면서, P&G의 170년 역사 속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승진한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수잔 아놀드 사장이 맡고 있는 글로벌 비즈니스 부문은 미용 및 화장제품, 건강용품, 가정용품 등 3개 부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2007년에는 P&G 매출의 42%에 달하는 290억 달러를 기록하였다.
원래 P&G에서의 미용제품 분야는 소외된 사업이었으며, 그만큼 매출도 적었다. 그러나 2004년 수잔 아놀드가 미용제품 분야의 총괄을 맡게 되면서 매출이 크게 성장하였다. 그녀가 총괄한 첫 해부터 매출이 15%, 순이익이 23% 증가하였고, 현재는 190억 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미용분야에서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사업부가 되었다. 현재 P&G의 미용제품 분야는 Olay, Cover Girl, Clairol을 포함해 최근 합병한 Wella까지 130개의 매우 다양한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다.
수잔 아놀드 사장은 P&G에서 글로벌 생산을 총괄하고 있는 로버트 맥도날드(Robert A. McDonald) 사장과 함께 P&G의 현 CEO 래프리(A.G.Lafley) 회장의 뒤를 이을 가장 가능성 있는 CEO 후보로 평가되고 있다. 한편 수잔 아놀드 사장은 2007년부터 월트디즈니의 이사회에 참여하였는데, 월트디즈니의 CEO 로버트 아이거 회장은 수잔 아놀드 사장을 이사회에 영입하면서 “그녀가 가진 브랜드 포트폴리오 확장능력과 소비자의 니즈를 읽는 감각이 월트디즈니의 글로벌 전략에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하며 수잔 아놀드 사장의 ‘전략개발’, ’브랜드 개발’, ’제품혁신’ 능력을 높이 평가하였다.
입사 후 25년 동안 P&G 미용 사업부의 최고 전문가로 성장
1980년 P&G에 입사한 수잔 아놀드는 Ivory 비누 사업부에서 첫 업무를 시작하였다. 현재 P&G의 CEO인 래프리가 아놀드의 첫번째 상사였다. 1983년에는 주방세제 Cascade, 1986년에는 세탁세제 Tide, 1987년에는 비누세제 사업부 광고를 담당하였고, 1990년에 P&G가 Cover Girl과 Clairol 염색약을 보유한 Noxell을 인수하면서 캐나다 사업부를 지휘하였다. 1993년 다시 미국으로 온 그녀는 방향제∙화장품 사업부 부문장을 거쳐 1997년에는 세제사업부 부문장을, 2002년에는 미용∙화장용품 부문장을 역임하였으며, 2004년 미용부문 부회장에 오르게 된다. 1980년 입사 시절부터 2004년 미용부문 부회장에 오르기까지 25년간 미용제품 분야에서 일한 수잔 아놀드 사장은 그야말로 미용제품 분야의 진정한 전문가라 할 수 있다.
한편 수잔 아놀드가 화장품 사업부를 맡고 있던 당시 P&G 미용사업부는 당시 저가화장품 이미지를 가지고 있던 Olay 화장품을 두고 고민하였다. 기존의 Olay 브랜드를 포기하고, 새로 브랜드를 만들 것인가, 아니면 Olay 화장품에 투자를 해서 새롭게 변신시킬 것이냐를 두고 결단을 내려야 했다. 수잔 아놀드는 Olay 브랜드에 더욱 집중 투자하여 미용, 가정용품, 고가 화장품 분야로 브랜드를 확장하였다. 특히 소비자들이 Olay 제품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저가 화장품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2000년에 혁신적인 노화방지크림을 출시하면서 브랜드 이름을 없앤 미스터리 마케팅은 매우 유명한 마케팅 사례이다. 현재 Olay는 P&G의 대표 브랜드로서 20억 달러의 매출을 거두고 있다.
열정과 에너지를 가진 P&G의 차세대 CEO
수잔 아놀드는 대학교 졸업 후 엑센추어 컨설팅에 입사했었다. 프로세스 엔지니어링 부서에서 고객사 공급체인 비용을 절감시키는 방안에 대한 프로젝트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고객사의 현황을 분석하던 중 제품 리포지셔닝 계획에 개선이 필요한 것을 알고 몇 주를 고민한 끝에 새로운 마케팅 전략을 수립하게 되었다. 수잔 아놀드의 상사는 맡고 있는 프로젝트의 범위가 아니라는 이유로 그녀의 제안을 무시했으나, 수잔 아놀드는 이 과정에서 자신이 마케팅 분야에 뛰어난 열정과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회사를 찾게 된다. 그곳이 바로 P&G이다.
수잔 아놀드 사장은 자신이 P&G같은 오랜 역사를 가진 다국적기업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소비자가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읽어내는 능력과 브랜드파워를 확장하고 끊임없이 브랜드를 혁신시키고자 하는 강한 몰입감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결단을 내려야 하는 경영자의 역할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과 쾌활한 성격도 도움이 되었다.”고 말한다.
수잔 아놀드 사장은 P&G의 차기 CEO 자리를 염두에 두고 있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항상 “나는 내가 지금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다음에 무엇이 있을지 생각하는 데는 시간도 에너지도 쓰지 못한다. 나는 P&G의 미래를 밝히는 별이 아니라 매일 조금씩 내 앞에 놓여진 길을 전진할 뿐이다.”라고 말한다. 최고의 정점에 서 있는 그녀가 P&G의 최고 경영진으로서 그녀만의 시장을 읽어내는 감각을 통해 어떤 탁월한 전략으로 어떠한 혁신을 이룰지 기대할 수밖에 없을 듯 하다.
6. 안젤라 브랠리(Angela Braly)
출생: 1962년 텍사스 달라스
학력: Texas Tech University 학사,
Southern Methodist University 석∙박사(법학)
경력: 현 웰포인트 최고경영자 겸 이사회 멤버
2005년~2007년 웰포인트 법률고문 겸 공보담당자
2003년~2005년 웰포인트 미주리 지사장
1999년~2003년 RightCHOICE Managed Care Inc. 법률고문
~1999년 Lewis, Rice & Fingersh, L.C 파트너 변호사
수상:『Fortune』 2007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CEO 4위
『Forbes』 2007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00명 중 16위
『월스트리트저널(WSJ)』 2007 가장 주목할만한 여성 50인 중 1위
월가의 가장 주목 받는 여성 CEO
지난해 미국 최대 의료보험사인 웰포인트의 새로운 최고경영자(CEO)가 발표되자 월가는 크게 술렁였다. 유력한 후보였던 데이비드 콜비 최고재무책임자와 존 와츠 판매책임자를 제치고 법률가 출신의 40대 여성, 안젤라 브랠리가 최고경영자로 지목되었기 때문이다.
안젤라 브랠리가 웰포이트의 CEO가 된지 일년이 지난 지금, 그녀를 두고 벼락출세라고 떠들어대던 소리들은 어느새 사그라졌다. 안젤라 브랠리는 2007년 『Fortune』과 『Forbes』, 『월스트리트저널(WSJ)』 등이 선정한 영향력 있는 여성 CEO로 단연 주목을 받았으며, 美 의료보험 비즈니스를 이끌만한 인물로 평가 받고 있다.
워커홀릭 변호사에서 4만2천명을 이끄는 CEO로
안젤라 브랠리는 9년 전까지만 해도 잘나가는 변호사였다. 텍사스 공대와 서던메소디스트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의 로펌회사 루이스 라이스 앤 더 핑거시에서 10여 년 동안 파트너 변호사로 일했다.
안젤라 브랠리와 의료보험업계와의 만남은 1999년 우연히 이루어졌다. 보험업체 라이트초이스와 헬스링크의 합병 과정에서 거액의 세금 분쟁을 그녀가 맡게 된 것이다. 비영리 건강관리기금을 설립해 세금 문제를 뛰어넘자는 그녀의 의견은 비록 판결에서 거부당했지만, 그녀의 끈기와 논쟁력을 눈 여겨 본 라이트초이스는 그녀를 전임 법률고문으로 기용하게 된다.
그 후 2003년, 라이트초이스가 웰포인트에 인수되면서 자연스럽게 그녀도 웰포인트의 일원이 되었으며, 미주리 주 지사장을 맡게 되었다. 또한 2004년 경쟁사인 앤섬과의 합병 과정에서 큰 몫을 해내면서 안젤라 브랠리는 2005년 인디애나폴리스 본사의 법률고문 겸 공보담당자가 되었다. 이 기간에 그녀는 뉴욕 웰초이스와 65억 달러에 이르는 합병 과정을 잘 조율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여러 합병건을 통해 능력을 인정받은 안젤라 브랠리였지만, 2007년 웰포인트가 차기 CEO 선정 작업에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거의 거론되지 않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외부에서 마땅한 인물을 찾지 못한 웰포인트 이사회가 내부로 시선을 돌리면서 그녀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투자자들의 우려가 있었지만 이사회는 신뢰감과 열정을 지닌 안젤라 브랠리를 선택하게 된다.
가장 논쟁적인 비즈니스의 수호자
의료보험은 미국 내 가장 민감한 이슈 중 하나로, 미국 정부는 낮은 보험 가입률과 보장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해 공공의 역할을 강화하고 있다. 지난해 아놀드 슈왈츠제네거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연방 지원을 통해 모든 시민에게 의료보험을 제공하겠다는 확대 방안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한편 안젤라 브랠리는 美 최대 의료보험사의 CEO로서 업계의 이익을 위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말하며, 캘리포니아 주지사의 계획을 비판하였다. 민간보험의 효율성이야말로 미국인의 건강 수준을 높이는 열쇠라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 이윤추구가 목적인 사보험업계를 악당으로 생각하는 시민단체들의 집중 포화가 일어 났고, 美 의료보험제도를 비판한 마이클 무어 감독의 ‘식코(sicko)’ 다큐멘터리에서 환자들에게 보험 적용을 거부하는 사례가 나오며, 안젤라 브랠리는 공공의 적이 되었다.
하지만 안젤라 브랠리는 이 같은 비판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녀는 모든 국민이 비슷한 수준의 건강 보장을 받는 것은 비합리적일 뿐 아니라 불가능하다며, 대신 사용자별로 다양한 유형의 보험 상품을 개발해 더 많은 고객을 소비자로 끌어들일 것을 주장한다. 이에 『Forbes』는 그녀에 대해 ‘친근한 인상 아래 완고한 중재자의 본 모습이 숨어있다’며 미국에서 가장 논쟁적인 비즈니스를 이끌 만한 인물로 평가하였다.
웰포인트를 지속성장하는 기업으로
안젤라 브랠리가 지난해 야심 차게 시작한 사업은 웰포인트만의 ‘건강지수(MHI) 평가’이다. 3,500만 명의 가입자를 대상으로 건강 상태를 측정하는 미국 내 최초의 대규모 사업으로 가입자의 건강 수준이 개선되었을 경우, 해당 보험 매니저에게 보너스가 돌아간다. 이 사업에는 정기 건강검진과 예방 치료를 장려해 미국인의 건강 관리를 실질적으로 돕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여성 CEO의 강점인 소비자 중심의 접근법으로 의료기관 평가 시스템을 도입하기도 했다. 보험 가입자들이 직접 이용한 병원과 의사의 평가 점수를 인터넷에서 공유하는 제도이다. 의료 서비스도 음식이나 레저 시설처럼 소비자가 평가해야 한다는 아이디어는 많은 이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안젤라 브랠리의 이러한 적극적인 시장 개척 노력은 웰포인트를 『Fortune』이 선정한 ‘2007 빠르게 성장하는 100대 기업’ 2위에 올려놓았다. 캘리포니아, 버지니아, 뉴욕, 조지아 등 14개 주에서 해당 시장점유율 1위에 올랐을 뿐만 아니라, 2007년 3분기까지 15% 이상의 수익증가율을 기록하였다. 가치투자로 유명한 워렌 버핏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로 투자가 위축된 상황에서도 웰포인트는 성장세를 유지할 것이라며, 최근 웰포인트 주식 보유량을 네 배인 400만주로 늘렸다.
신념을 기반으로 더 큰 도전에 대응
의료보험 문제는 많은 국민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복지정책이라는 측면에서 대선 때마다 가장 민감한 화두가 되고 있으며, 대선 공약의 주요 정책으로 발표되고 있다. 이번 2008년 대선에서도 오바마, 맥케인 등 주요 후보자들이 방식의 차이는 있으나 개혁의 필요성에 동감하는 것을 볼 때, 대선 결과가 어떻게 나오더라도 향후 美 의료보험 체계에 대한 변화는 필연적인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 서 있는 안젤라 브랠리는 신념을 강조하며 “훌륭한 리더는 옳은 일에 대한 신념을 기반으로 내 갈 길을 가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가장 논쟁적인 비즈니스의 수호자로 논쟁과 비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안젤라 브랠리의 당당한 행보가 사뭇 기대된다.
7. 메리 케이 애쉬(Mary Cay Ash)
출생: 1918년 5월 12일 미국 텍사스 주 Harris County
사망: 2001년 11월 22일 사망
학력: University of Houston 중퇴
경력: 1987년~2001년 Mary Cay Ash Cosmetics 명예 회장
1963년~1987년 Mary Cay Ash Cosmetics 창립 및 회장
1952년~1963년 World Gifts Corp. 직원훈련담당 책임자
1938년~1952년 Stainly Home Products 판매사원
수상: 1996 미국 비즈니스 명예의 전당에 헌정
1985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25명 선정
20세기 미국이 낳은 최고의 비즈니스 우먼
20세기 미국이 낳은 최고의 비즈니스 우먼이라고 세간의 칭송을 받는 메리 케이 애쉬(Mary Cay Ash) 회장. 그녀가 주목을 받는 이유는 45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그것도 여성 CEO가 드문 시절에 창업을 한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녀만의 독특한 경영 스타일에서 찾을 수 있다. 메리 케이 애쉬는 직원들의 잠재력을 극대화해 탁월한 성과를 창출한 대표 경영자로 손꼽힌다. 메리 케이 코스메틱스(Mary Cay Ash Cosmetics)의 사원들은 ‘다시 태어나도 이 회사에 근무하고 싶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메리 케이 코스메틱스는 ‘포천 500대 기업', '가장 일하고 싶은 미국 100대 기업', '여성을 위한 10대 기업' 등으로 여러 차례 선정된 바 있으며, 메리 케이 애쉬는 1985년 미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25명에 선정되었고, 1996년에는 미국 비즈니스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과연 메리 케이 애쉬의 성공 비결은 무엇일까?
너는 할 수 있어!
메리 케이 애쉬의 성장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바로 그녀의 어머니였다. 어린 시절 메리 케이 애쉬는 병든 아버지를 대신해 생계를 책임진 어머니를 위해 집안 일을 꾸려나가야 했다. 집안 일과 아버지 간호는 물론, 심지어 7살의 나이에 생필품을 구입하기 위해 혼자 휴스턴 시내까지 나가기도 했다. 메리 케이 애쉬는 일이 막히고 힘들 때마다 일터에 있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그녀의 어머니는 어린 메리 케이 애쉬에게 “너는 할 수 있어(You can do it!).”라고 말하며 용기와 자신감을 심어주었다고 한다. 이것은 메리 케이 애쉬의 평생의 좌우명이 되었으며, 또한 메리 케이 코스메틱스의 좌우명이기도 하다.
이후 메리 케이 애쉬는 매력적인 음악 연주자를 만나 결혼했지만, 결국 이혼을 하고 홀로 세 아이를 돌봐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생계를 위해 그녀가 처음 일하기 시작한 회사는 스탠리 홈 프로덕트(Stanley Home Products)라는 달라스의 가정용품 직판사였는데, 고교 시절부터 자신의 의견을 호소력 있게 전달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보였던 메리 케이 애쉬는 그 곳에서 자신의 숨겨진 열정과 재능을 발견하게 되었다.
1938년도 신입사원이었던 메리 케이 애쉬는 스탠리 홈 프로덕트의 연간 판매 모임에 참석했다. 이를 위해 12달러를 빌려 기차표를 구하고, 치즈 1파운드와 과자 한 상자로 3일을 버텨야 했지만 훗날 그녀가 회고하듯, 그때의 3일은 그녀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당시 판매여왕의 모습을 보고 감명받은 메리 케이 애쉬는 당시 자신을 전혀 모르던 사장에게 찾아가 다음 해 판매 여왕이 되겠다고 당당히 말했다. 물론 다음 해 메리 케이 애쉬는 자신의 단언대로 판매왕에 올랐다. 일에 대한 열정과 탁월한 집중력, 승부 근성이 그녀를 판매왕으로 만든 것이다.
여성들을 위한 ‘꿈의 회사’ 설립하다
1952년 메리 케이 애쉬는 월드 기프츠(World Gifts)의 전국 판매직원 훈련 책임자로 이직하였다. 월드 기프츠에 재직하던 시절 그녀가 가장 힘들었던 것은 여성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었다. 당시 그녀의 의견은 여자의 제안이라는 이유로 번번히 무시되었고, 그녀가 열정적으로 추진한 신입사원 판매교육 관련 일은 자신이 가르친 후배 남자 사원에게 공이 돌아가게 되었다. 그녀는 불공평함에 분노했고, 회사를 그만두게 된다.
1963년 메리 케이 애쉬는 45세의 나이에 평생 동안 저축한 5,000 달러로 메리 케이 코스메틱스를 설립하게 된다. 그녀의 목표는 여성들을 위한 '꿈의 회사'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녀가 꿈꾸는 회사는 메리 케이 코스메틱스의 모든 여성이 개인적 성장과 재정적인 독립을 실현하고 삶의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꿈의 회사가 추구하는 ‘P&L’은 ‘손익계산서(Profit & Loss)’가 아닌 ‘사람과 사랑(People & Love)’이었다. 메리 케이 애쉬는 회사의 최대 목적은 이윤창출이 아닌 직원들을 행복하고 풍성한 삶을 살게 만드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그녀의 창업 정신과 뛰어난 사업 감각, 인간 중심 경영철학과 탁월한 리더십으로 메리 케이 코스메틱스는 5,000 달러에서 시작한 지 1년 만에 20억 달러의 매출이라는 경이적인 성장을 하였다. 오늘날 메리 케이 코스메틱스는 미국 최대의 스킨케어 직판회사를 넘어 세계 37개 국가에 진출, 80만 명의 뷰티 컨설턴트를 두고 2억 달러의 소매 매출을 기록하는 세계적인 다국적 화장품 직판회사로 성장하게 되었다.
대우받기를 원하면 다른 사람을 대우하라
메리 케이 코스메틱스에는 ‘황금률(Golden Rule system of management)’이 있다. 즉 ‘자신이 대우받기를 원하는 대로 다른 사람을 대하라’는 것이다. 그녀는 “직원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의 가슴에 ‘나는 존중 받고 싶다’라고 쓰여진 목걸이를 차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들을 대한다.”고 스스로 말할 정도로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경청을 중요시하였다. 실제로 ‘경청의 달인’이라고 불리는 그녀는 수없이 많은 스케줄과 업무, 미팅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날 때마다 공감 어린 경청으로 대했다. 메리 케이 애쉬의 인간 중심 경영론은 한마디로 말해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배려, 경청과 칭찬으로 요약된다.
그녀의 직원 사랑의 예로 대통령의 초청을 거절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초청 당시 메리 케이 애쉬는 사업차 워싱턴에 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약이었던 달라스에 있는 신입사원 미팅에 참석하기 위해 달려간 것이다. 또한 메리 케이 애쉬는 직원들을 대우하는데 결코 인색하지 않았다. 그 해의 판매왕을 인정해 주기 위해 제공하는 ‘핑크 캐딜락’은 이제 메리 케이 코스메틱스의 상징이 되었다.
또한 메리 케이 애쉬는 가족, 일에 대한 우선순위와 조화를 강조한다. 직장이란 삶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며, 가정이 없다면 일하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영은 직원들을 한데 묶어놓은 것은 물론 회사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다.
메리 케이 애쉬는 고객을 섬기는데도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녀는 맨 처음 직원을 고용했을 때 작은 핑크색 카드에 고객을 위한 서비스 약속을 자세히 적어 나누어 주었는데 지금까지도 메리 케이 코스메틱스는 여전히 그 카드를 신입 사원들에게 주고 있다. 여기에는 고객과의 관계에서 실수를 단 하나도 허용하지 않는 회사가 되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이 배어 있다. 형편없는 서비스는 고객을 바로 떠나 보낼 뿐 아니라 그 고객이 판매자와 회사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갖게 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인식하고 실행에 옮긴 것이다.
신념을 기반으로 사회공헌에 도전
메리 케이 애쉬는 1980년 비영리 단체인 메리 케이 애쉬 자선재단(Mary Kay Ash Charitable Foundation)을 설립해 폭력과 암으로 고통 받는 여성을 지원하고 있다. 메리 케이 애쉬는 사회에서 번 돈을 사회에 환원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실천하여 존경 받는 기업인 중 하나가 되었다. 1987년 아들 리처드에게 경영권을 넘기고 회장으로 일선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메리 케이 애쉬의 가르침은 메리 케이 코스메틱스를 지배하고 있다.
2001년 81세의 나이로 작고한 메리 케이 애쉬의 리더십이 주목을 받는 것은 무엇보다 그녀의 열정과 도전으로 대표되는 진정한 기업가정신(Enpreneurship) 때문이다. 다른 누구보다도 많은 시련을 겪었지만, 자신감과 적극적인 자세로 꿈을 실현시켜 온 메리 케이 애쉬의 삶 자체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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