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0. 5. 10:01
"지금은 태풍과의 전쟁 준비된 자만 승리한다"
"영화 퍼펙트 스톰(Perfect Storm·태풍을 소재로 한 재난 영화) 보셨어요? 지금 세계 경제는 모든 악재(惡材)가 한꺼번에 터진 퍼펙트 스톰과 같은 상황입니다."
화상 인터뷰를 위해 맞은편 스크린 속에 등장한 오릿 가디쉬(Gadiesh) 베인&컴퍼니(Bain & Company) 회장의 눈이 커지면서 큼지막한 은색 귀걸이가 살짝 흔들렸다.
베인&컴퍼니는 미국 보스턴에 본사를 둔 세계 3대 전략 컨설팅회사 중 하나. 가디쉬 회장은 1980년대 말 부사장 시절 재정 위기에 빠진 회사를 살려내고 1993년 회장에 올랐다. 그녀는 '위기의 구원투수'라는 별칭을 얻었다. 2004년엔 포천이 선정한 '세계를 움직이는 여성 100인'에 선정됐다.
그녀는 "영화를 못 봤다"는 기자에게 거대한 파도와 사투를 벌이는 배를 손으로 묘사하기 시작했다. "영화 속 남자 주인공(조지 클루니)이 얼마나 잘 생겼는지 모른다"며 그녀는 영화에 흠뻑 빠졌다. 한참이 지났을까. 그녀는 숨을 한 번 고르더니 "내년 세계 경제는 어려운 한 해(difficult year)가 될 것"이라고 말을 맺었다. 그의 목소리와 눈은 다시 차갑게 변했다.
그녀는 지금의 불확실한 상황을 전쟁에 비유했다. "전쟁 중에 공격 명령을 내리려고 할 때 부하가 '준비가 아직 안 됐습니다'라고 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이때 중요한 것은 '적(敵)보다 준비가 더 되어 있는가' 입니다.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불확실성의 시대에 손 놓고 뭘 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많은데, 그럴 때일수록 리더 역할이 더욱 중요해집니다." 그녀는 "리더는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야 하며, 원칙을 바꾸는 게 아니라 방향을 바꿔 전진하는 게 바로 리더"라고 강조했다.
스크린 너머는 프랑스 파리 사무실. 180㎝가 넘는 키에 까만 원피스를 걸친 그녀는 커다란 귀걸이와 목걸이, 팔찌들 때문인지 마른 체구가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이스라엘 태생인 그녀는 다른 모든 이스라엘 젊은이처럼 2년간 군에서 복무했다. (이스라엘은 여성도 군 복무가 의무이다.) 17세이던 1968년부터 2년간 육군 참모총장실에서 근무했다. 상대방을 또렷이 쳐다보며 속사포처럼 말할 때 그녀는 여전사(女戰士)를 연상시켰다.
"격변기에는 위협만큼이나 기회도 다양하게 찾아오지요. 과거를 돌이켜 보면 불황기에도 기업의 30%는 위기를 넘겨 탄탄대로를 걸었어요."
그녀는 "불황의 파고를 넘어 성공한 기업들에겐 3가지 공통점이 있다"고 말했다.
"첫째, 불황기엔 핵심사업에 집중하세요. 실적이 부진한 사업이 우선 눈에 걸리겠지만, 그런 사업을 정상화하는 데 너무 매달려선 안 됩니다. 침체기일수록 가장 경쟁력 있는 비즈니스에 집중해야 합니다."
둘째,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위기 대응 전략을 마련하라고 그녀는 충고했다. "이를테면 '자금 압박으로 직원들에게 월급을 못 준다면?' 혹은 '경쟁사가 적대적 M&A를 시도한다면?'처럼 있을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정해 보세요. 그리고 그에 따른 대응책을 준비해 보세요."
그녀는 위기 상황에서의 전략은 단순 명료할수록 좋다고 강조했다. "잭 웰치(Welch)의 경우 20여 년의 임기를 통해 스스로 담당한 주요 추진 과제는 다섯 개가 채 안 됐지요. 추진 과제 수가 적어야 기업 목표를 명확히 할 수 있죠. 실행 과제를 하루가 멀다 하고 끊임없이 내놓거나 유행에 휩쓸리다 보면 직원들이 목표를 달성하기가 무척 어려워집니다."
"셋째, 타이밍이 중요합니다. 위기엔 신속히 대응하고, 잘못된 결정은 빨리 수정하세요. 어영부영 하다가 대응 시기를 놓치면 나중에 대대적으로 메스를 들이대는 대수술이 불가피해집니다."
1990년대 고객 이탈과 자금난으로 파산 위기에 몰렸던 미국 항공사 컨티넨털(Continental)이 위기에서 탈출한 것도 베인&컴퍼니가 탈출 노선도를 그려준 결과였다. 출혈 노선을 과감히 정리하고, 거점 도시인 휴스턴을 중심으로 한 허브(hub) 노선을 구축하는 것을 골자로 한 '새로운 비상(new flight plan)' 전략은 가장 극적인 턴어라운드(기업회생) 사례 중 하나로 하버드비즈니스리뷰에 실렸다.
그녀는 위기 상황일수록 리더는 회사가 목표로 삼는 지향점에 대해 전사적(全社的)인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비전과 전략을 명확히 제시하지 못하는 리더는 혼란만 초래할 뿐이지요."
그녀는 "불황기에는 기업의 핵심인 인재 확보가 상대적으로 쉽다"면서 인재 헌팅에 나서라고 주문했다. "오늘날 기업 꼭대기에 앉아 명령만 내리는 리더는 없지요. 모두가 리더처럼 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직원들이 평범해선 안 됩니다. 평범한 직원은 기업에게 걸림돌이 될 뿐이지요."
가디쉬 회장은 "리더는 어려운 시기에 동정심을 보일 수는 있지만 감성적이어서는 절대 안 된다"고 강조했다. "강인함을 보여줘 직원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이라는 인식을 확고히 심어줘야 합니다."
가디쉬 회장은 현장형 경영자다. 그녀는 지금도 굴지의 글로벌 기업 네 곳의 프로젝트를 스스로 맡아 진행하는 현역(現役) 컨설턴트로서, '세계 CEO들의 조언자'를 자임하고 있다.
기자가 "베인의 고객사 사장이 앞에 있다고 치고 고객사의 궁금증을 속 시원히 풀어달라"고 즉석에서 요청하자 그는 "풋" 하고 웃었다. "회사마다 상황이 다르고 산업마다 특성이 다 다른데 어떻게 마법 같은 해결책을 이 자리에서 내놓겠어요." 하지만 이내 "한번 해봅시다"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전 세계가 경기 침체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지금 경기 상황을 어떻게 보시나요?
"세계 경기가 언제 회복될지는 잘 모릅니다만, 중요한 건 현재 상태가 상당히 심각하다는 겁니다. 하지만 불황기라도 모든 산업이 똑같이 충격을 받진 않아요. 경기 침체에도 침체기가 아닌 산업이 있죠. 심지어 호황기에도 산업의 20% 정도는 불황을 겪습니다."
그녀는 "지금 첫 번째 악재는 물론 금융위기"라고 했다. "미국의 서브프라임모기지(비우량주택담보대출) 부실로 촉발됐는데, 지금은 미국 금융시스템 전체를 위협하고 있어요. 그리고 유럽 등 세계 각국에도 일파만파로 번져가고 있어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듭니다."
■미 금융위기는 거대한 폭풍우의 서막에 불과
그녀는 "현재 금융위기는 영화 속에서 서서히 움직이는 대서양의 허리케인과 같다"고 말했다. "거대한 폭풍우의 서막(序幕)에 불과합니다. 주택담보대출을 받은 상당수의 소비자들은 자동차 등 다른 부문 대출도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경기 침체로 금융회사들이 담보로 잡은 자산이 날로 부실해지고 있습니다. 최근 미국의 여러 금융회사들이 유동성 위기에 빠진 건 당연한 귀결입니다. 구제금융으로 위기를 넘기려 하고 있지만, 향후 어떻게 전개될지는 아직 아무도 장담 못합니다. 분명한 것은 실물경제에도 당분간 상당한 충격을 줄 것이라는 점입니다."
―또 다른 악재(惡材)는 뭡니까?
"상품(commodity) 가격 상승입니다. 최근 유가가 떨어지긴 했지만, 높은 유가는 여전히 세계 경제의 큰 화두 중 하나입니다. 식량 가격도 오를 겁니다. 가까운 미래에 이런 원자재, 식량 가격이 떨어질 가능성이 매우 적어 보입니다. 기술 발전 덕분에 뽑아 쓸 석유가 늘었지만 비용이 예전보다 훨씬 많이 들기 때문에 유가는 아마 배럴당 80달러 아래로는 내려가기 힘들 겁니다. 또 한 가지 심각한 건 수(水)자원입니다. 이런 식으로 낭비하다간 석유자원이 고갈되기 전에 수자원이 먼저 바닥날 수 있습니다."
가디쉬 회장은 멈출 줄 모르는 인간의 소비 욕구를 세 번째 악재로 꼽았다. 그는 "석유 같은 재생 불가능한 자원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면 결국 성장은 멈추고 말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해법이 있습니까?
"최근 위기를 극복하려면 새로운 경제(new economy)가 나와야 하고, 이를 위해 전 세계적인 문제를 해결할 21세기형 리더 기관(institution)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렇지 못합니다. 국경 있는 국가만 존재할 뿐, 이를 초월하는 국제기구가 없습니다. DDA(도하라운드) 결렬은 어느 정도 예측됐었지만 참 아쉬웠어요."
―미국은 물론 성장 가도를 달리던 중국, 인도 등 아시아 국가도 성장세가 꺾이고 있습니다. 내년에도 어두운 상황이 지속될까요?
"2009년은 매우 힘든 한 해가 될 것으로 봅니다. 되풀이해 얘기합니다만 전 세계적인 문제 해결을 책임질 기관이 없기 때문에 지금 같은 상황이 지속되면 사태는 더 악화될 거예요. 식량 문제를 봅시다. GMO(유전자변형식품)라는 해결책이 있기 때문에 지금처럼 식량이 비쌀 필요가 없어요. 이렇게 식량 문제를 해결할 기술은 있지만, 전 세계를 위해 의사를 결정할 기구가 없는 게 문제입니다. 이런 추세라면 세계 경기는 더 악화될 것이고, 2009년은 매우 힘든 한 해가 될 것 같습니다."
가디쉬 회장은 너무 우울한 전망투성이였다고 생각했는지 갑자기 "전 비관론자는 아닙니다. 제 견해가 틀렸으면 좋겠어요"라고 웃었다.
■글로벌 CEO의 공통 고민은 스태그플레이션
많은 글로벌 기업을 컨설팅해 주는 그녀는 기업들의 걱정을 잘 알 것 같다. 요즘 글로벌 기업 CEO들은 무슨 걱정을 하고 있을까.
"얼마 전에 글로벌 기업 CEO 60여명을 이틀간 만난 일이 있어요. 모두 코 앞에 닥친 일들을 걱정하더군요. 석유회사는 유가, 은행장은 대출 리스크, 식품업체는 원자재 걱정 등 주관심사가 업종별로 달랐어요.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걱정거리가 비슷했죠. 글로벌 CEO들의 공통적인 우려는 인플레이션과 경기침체가 동시에 진행되는 최악의 시나리오입니다."
요즘 사상 최대의 혼란에 빠져 있는 월가의 금융회사들은 컨설팅 회사의 최대 고객 중 하나다. 그녀에게 월가가 주도하는 미국식 금융자본주의에 대한 회의론이 불거지는 데 대한 의견을 물어보았다.
"투자은행에 대한 신뢰가 저점(低點)을 찍고 있는 것 같아요. 기존 투자은행 모델은 이제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위기를 넘어 부상할 새로운 투자은행은 효과적으로 자금을 확보하는 새 비즈니스 모델을 선보일 것으로 기대합니다. 새로운 금융규제는 과거 투자은행 중심의 절대적인 글로벌 금융파워를 분산시키고 감독 기능도 전면 개편될 것으로 봅니다."
―한국 기업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한 성공 조건을 꼽는다면?
"하루 종일 얘기해도 시간이 모자랄 큰 주제네요. 리더의 현명한 결정이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무엇보다 리더는 글로벌화를 목표로 삼고, 치밀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그녀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는 데 정도(正道)는 없다고 말했다.
"일본은 점진적으로 브랜드를 구축한 뒤 해외로 나가 기업 인수를 통해 글로벌 기업으로 올라섰지요. 도요타는 핵심 역량을 바탕으로 선별적인 해외 인수를 추진했고, 소니도 기존 브랜드를 기초로 미디어업체 인수에 나서 글로벌 기업이 됐어요.
한국은 성장 경로가 다릅니다. 한국은 외부 기업 인수보다는 가격경쟁력을 가진 고품질 제품을 내세워 글로벌 브랜드를 구축했어요. 삼성·LG·현대가 대표적이지요.
중국은 글로벌화를 위해 해외 기업 인수에 정말 적극적입니다. 중국 대표 가전업체인 하이얼은 인수한 33개 기업을 통해 선진 경영 노하우, 브랜드, 유통체제 등을 확보해 성장했어요. 하지만 하이얼은 중국의 거대 소비층을 기반으로 '굿 이너프 상품(good-enough:프리미엄제품보다는 저렴하면서 품질은 보통 이상인 제품)'을 만들어 소니와 경쟁할 정도가 됐지요."
베인&컴퍼니는 M&A(인수·합병)에 강한 회사다. 지난 10년간 전 세계 5억달러 이상의 M&A 절반을 베인이 컨설팅했다. 그녀에게 M&A에 관한 조언을 구해 보았다.
"M&A의 핵심은 이미 잘 알고 있거나 연관된 부문으로 확장하는 것입니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M&A가 성장의 좋은 대안이 될 수 있지만, 사업 연관성이 떨어지고 통합에 대한 뚜렷한 계획이 없으면 성공하기 쉽지 않아요. 회사의 현 주소와 전략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몸집 불리기 자체가 목적이 되면 M&A는 절대 성공할 수 없습니다."
■완벽한 해결책은 없다. 현실적인 차선책을 찾아라
가디쉬 회장은 인터뷰 내내 기자의 눈을 마주보며 얘기했다.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고 얘기하면 신뢰감을 준다고 했던가. 글로벌 여성 경영인을 꿈꾸는 한국의 커리어 우먼에 대한 조언을 부탁하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사람들과 눈을 응시하고 맞닥뜨려야 한다는 사실을 일찍 터득한 편이죠. 당신과 일하는 걸 편하게 느낄 수 있게 해 주면 당신이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주목할 겁니다. 유머감각이 있다면 금상첨화겠죠?"
그녀는 이스라엘에서 2년간 군인생활을 했다. "군인 경력은 제가 베인 회장이 되는 데 큰 도움을 줬어요. 저는 참모총장 바로 아래 있는 이스라엘 군대 2인자를 보좌하는 역할을 맡았지요. 그때 엄청난 양의 정보를 다루고, 책임감 있게 행동하고, 오랫동안 일하는 능력을 배울 수 있었어요. 생사를 가르는 중요한 의사 결정을 내리는 걸 보면서 언제나 모든 정보를 완벽히 갖추고 결정할 수 없다는 걸 그때 깨달았죠."
그녀는 고객사에게도 완벽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보다 실현가능한 현실적인 대응책이 더 중요함을 강조하곤 한다. 그녀는 서로 다른 문화를 이해하는 법과 다른 의견을 받아들이는 법도 군대에서 자연스럽게 터득했다. "이스라엘은 이민국가여서 군대도 유럽계·중동계·아시아계·미국계 등 다양하게 섞여 있어요." 그녀의 아버지는 이스라엘 장군을 지낸 독일인 이민자였고, 어머니는 러시아 태생이다.
그녀는 1년에 100권 정도 책을 읽는 독서광이다. 그는 기자에게 존 키건(Keegan)의 '승자의 리더십, 패자의 리더십(The mask of command)'을 추천했다. 전쟁을 통해 리더로 올라선 알렉산더, 웰링턴, 그랜트, 히틀러 등 4명의 시대별 리더십을 연구한 책이다. "1차대전 당시 기술 진보 덕분에 전쟁터에서 떨어져 지휘한 장군들이 재앙을 맞는 장면들이 있지요. 직원들과 충분히 대화를 나누지 않거나 현장에서 떨어진 채 회사를 경영하는 CEO라면 한번쯤 읽어보세요."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10/03/2008100300448.html
"영화 퍼펙트 스톰(Perfect Storm·태풍을 소재로 한 재난 영화) 보셨어요? 지금 세계 경제는 모든 악재(惡材)가 한꺼번에 터진 퍼펙트 스톰과 같은 상황입니다."
화상 인터뷰를 위해 맞은편 스크린 속에 등장한 오릿 가디쉬(Gadiesh) 베인&컴퍼니(Bain & Company) 회장의 눈이 커지면서 큼지막한 은색 귀걸이가 살짝 흔들렸다.
베인&컴퍼니는 미국 보스턴에 본사를 둔 세계 3대 전략 컨설팅회사 중 하나. 가디쉬 회장은 1980년대 말 부사장 시절 재정 위기에 빠진 회사를 살려내고 1993년 회장에 올랐다. 그녀는 '위기의 구원투수'라는 별칭을 얻었다. 2004년엔 포천이 선정한 '세계를 움직이는 여성 100인'에 선정됐다.
그녀는 "영화를 못 봤다"는 기자에게 거대한 파도와 사투를 벌이는 배를 손으로 묘사하기 시작했다. "영화 속 남자 주인공(조지 클루니)이 얼마나 잘 생겼는지 모른다"며 그녀는 영화에 흠뻑 빠졌다. 한참이 지났을까. 그녀는 숨을 한 번 고르더니 "내년 세계 경제는 어려운 한 해(difficult year)가 될 것"이라고 말을 맺었다. 그의 목소리와 눈은 다시 차갑게 변했다.
그녀는 지금의 불확실한 상황을 전쟁에 비유했다. "전쟁 중에 공격 명령을 내리려고 할 때 부하가 '준비가 아직 안 됐습니다'라고 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이때 중요한 것은 '적(敵)보다 준비가 더 되어 있는가' 입니다.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불확실성의 시대에 손 놓고 뭘 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많은데, 그럴 때일수록 리더 역할이 더욱 중요해집니다." 그녀는 "리더는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야 하며, 원칙을 바꾸는 게 아니라 방향을 바꿔 전진하는 게 바로 리더"라고 강조했다.
스크린 너머는 프랑스 파리 사무실. 180㎝가 넘는 키에 까만 원피스를 걸친 그녀는 커다란 귀걸이와 목걸이, 팔찌들 때문인지 마른 체구가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이스라엘 태생인 그녀는 다른 모든 이스라엘 젊은이처럼 2년간 군에서 복무했다. (이스라엘은 여성도 군 복무가 의무이다.) 17세이던 1968년부터 2년간 육군 참모총장실에서 근무했다. 상대방을 또렷이 쳐다보며 속사포처럼 말할 때 그녀는 여전사(女戰士)를 연상시켰다.
"격변기에는 위협만큼이나 기회도 다양하게 찾아오지요. 과거를 돌이켜 보면 불황기에도 기업의 30%는 위기를 넘겨 탄탄대로를 걸었어요."
그녀는 "불황의 파고를 넘어 성공한 기업들에겐 3가지 공통점이 있다"고 말했다.
"첫째, 불황기엔 핵심사업에 집중하세요. 실적이 부진한 사업이 우선 눈에 걸리겠지만, 그런 사업을 정상화하는 데 너무 매달려선 안 됩니다. 침체기일수록 가장 경쟁력 있는 비즈니스에 집중해야 합니다."
둘째,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위기 대응 전략을 마련하라고 그녀는 충고했다. "이를테면 '자금 압박으로 직원들에게 월급을 못 준다면?' 혹은 '경쟁사가 적대적 M&A를 시도한다면?'처럼 있을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정해 보세요. 그리고 그에 따른 대응책을 준비해 보세요."
그녀는 위기 상황에서의 전략은 단순 명료할수록 좋다고 강조했다. "잭 웰치(Welch)의 경우 20여 년의 임기를 통해 스스로 담당한 주요 추진 과제는 다섯 개가 채 안 됐지요. 추진 과제 수가 적어야 기업 목표를 명확히 할 수 있죠. 실행 과제를 하루가 멀다 하고 끊임없이 내놓거나 유행에 휩쓸리다 보면 직원들이 목표를 달성하기가 무척 어려워집니다."
"셋째, 타이밍이 중요합니다. 위기엔 신속히 대응하고, 잘못된 결정은 빨리 수정하세요. 어영부영 하다가 대응 시기를 놓치면 나중에 대대적으로 메스를 들이대는 대수술이 불가피해집니다."
1990년대 고객 이탈과 자금난으로 파산 위기에 몰렸던 미국 항공사 컨티넨털(Continental)이 위기에서 탈출한 것도 베인&컴퍼니가 탈출 노선도를 그려준 결과였다. 출혈 노선을 과감히 정리하고, 거점 도시인 휴스턴을 중심으로 한 허브(hub) 노선을 구축하는 것을 골자로 한 '새로운 비상(new flight plan)' 전략은 가장 극적인 턴어라운드(기업회생) 사례 중 하나로 하버드비즈니스리뷰에 실렸다.
그녀는 위기 상황일수록 리더는 회사가 목표로 삼는 지향점에 대해 전사적(全社的)인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비전과 전략을 명확히 제시하지 못하는 리더는 혼란만 초래할 뿐이지요."
그녀는 "불황기에는 기업의 핵심인 인재 확보가 상대적으로 쉽다"면서 인재 헌팅에 나서라고 주문했다. "오늘날 기업 꼭대기에 앉아 명령만 내리는 리더는 없지요. 모두가 리더처럼 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직원들이 평범해선 안 됩니다. 평범한 직원은 기업에게 걸림돌이 될 뿐이지요."
가디쉬 회장은 "리더는 어려운 시기에 동정심을 보일 수는 있지만 감성적이어서는 절대 안 된다"고 강조했다. "강인함을 보여줘 직원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이라는 인식을 확고히 심어줘야 합니다."
가디쉬 회장은 현장형 경영자다. 그녀는 지금도 굴지의 글로벌 기업 네 곳의 프로젝트를 스스로 맡아 진행하는 현역(現役) 컨설턴트로서, '세계 CEO들의 조언자'를 자임하고 있다.
기자가 "베인의 고객사 사장이 앞에 있다고 치고 고객사의 궁금증을 속 시원히 풀어달라"고 즉석에서 요청하자 그는 "풋" 하고 웃었다. "회사마다 상황이 다르고 산업마다 특성이 다 다른데 어떻게 마법 같은 해결책을 이 자리에서 내놓겠어요." 하지만 이내 "한번 해봅시다"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전 세계가 경기 침체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지금 경기 상황을 어떻게 보시나요?
"세계 경기가 언제 회복될지는 잘 모릅니다만, 중요한 건 현재 상태가 상당히 심각하다는 겁니다. 하지만 불황기라도 모든 산업이 똑같이 충격을 받진 않아요. 경기 침체에도 침체기가 아닌 산업이 있죠. 심지어 호황기에도 산업의 20% 정도는 불황을 겪습니다."
그녀는 "지금 첫 번째 악재는 물론 금융위기"라고 했다. "미국의 서브프라임모기지(비우량주택담보대출) 부실로 촉발됐는데, 지금은 미국 금융시스템 전체를 위협하고 있어요. 그리고 유럽 등 세계 각국에도 일파만파로 번져가고 있어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듭니다."
■미 금융위기는 거대한 폭풍우의 서막에 불과
그녀는 "현재 금융위기는 영화 속에서 서서히 움직이는 대서양의 허리케인과 같다"고 말했다. "거대한 폭풍우의 서막(序幕)에 불과합니다. 주택담보대출을 받은 상당수의 소비자들은 자동차 등 다른 부문 대출도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경기 침체로 금융회사들이 담보로 잡은 자산이 날로 부실해지고 있습니다. 최근 미국의 여러 금융회사들이 유동성 위기에 빠진 건 당연한 귀결입니다. 구제금융으로 위기를 넘기려 하고 있지만, 향후 어떻게 전개될지는 아직 아무도 장담 못합니다. 분명한 것은 실물경제에도 당분간 상당한 충격을 줄 것이라는 점입니다."
―또 다른 악재(惡材)는 뭡니까?
"상품(commodity) 가격 상승입니다. 최근 유가가 떨어지긴 했지만, 높은 유가는 여전히 세계 경제의 큰 화두 중 하나입니다. 식량 가격도 오를 겁니다. 가까운 미래에 이런 원자재, 식량 가격이 떨어질 가능성이 매우 적어 보입니다. 기술 발전 덕분에 뽑아 쓸 석유가 늘었지만 비용이 예전보다 훨씬 많이 들기 때문에 유가는 아마 배럴당 80달러 아래로는 내려가기 힘들 겁니다. 또 한 가지 심각한 건 수(水)자원입니다. 이런 식으로 낭비하다간 석유자원이 고갈되기 전에 수자원이 먼저 바닥날 수 있습니다."
가디쉬 회장은 멈출 줄 모르는 인간의 소비 욕구를 세 번째 악재로 꼽았다. 그는 "석유 같은 재생 불가능한 자원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면 결국 성장은 멈추고 말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해법이 있습니까?
"최근 위기를 극복하려면 새로운 경제(new economy)가 나와야 하고, 이를 위해 전 세계적인 문제를 해결할 21세기형 리더 기관(institution)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렇지 못합니다. 국경 있는 국가만 존재할 뿐, 이를 초월하는 국제기구가 없습니다. DDA(도하라운드) 결렬은 어느 정도 예측됐었지만 참 아쉬웠어요."
―미국은 물론 성장 가도를 달리던 중국, 인도 등 아시아 국가도 성장세가 꺾이고 있습니다. 내년에도 어두운 상황이 지속될까요?
"2009년은 매우 힘든 한 해가 될 것으로 봅니다. 되풀이해 얘기합니다만 전 세계적인 문제 해결을 책임질 기관이 없기 때문에 지금 같은 상황이 지속되면 사태는 더 악화될 거예요. 식량 문제를 봅시다. GMO(유전자변형식품)라는 해결책이 있기 때문에 지금처럼 식량이 비쌀 필요가 없어요. 이렇게 식량 문제를 해결할 기술은 있지만, 전 세계를 위해 의사를 결정할 기구가 없는 게 문제입니다. 이런 추세라면 세계 경기는 더 악화될 것이고, 2009년은 매우 힘든 한 해가 될 것 같습니다."
가디쉬 회장은 너무 우울한 전망투성이였다고 생각했는지 갑자기 "전 비관론자는 아닙니다. 제 견해가 틀렸으면 좋겠어요"라고 웃었다.
■글로벌 CEO의 공통 고민은 스태그플레이션
많은 글로벌 기업을 컨설팅해 주는 그녀는 기업들의 걱정을 잘 알 것 같다. 요즘 글로벌 기업 CEO들은 무슨 걱정을 하고 있을까.
"얼마 전에 글로벌 기업 CEO 60여명을 이틀간 만난 일이 있어요. 모두 코 앞에 닥친 일들을 걱정하더군요. 석유회사는 유가, 은행장은 대출 리스크, 식품업체는 원자재 걱정 등 주관심사가 업종별로 달랐어요.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걱정거리가 비슷했죠. 글로벌 CEO들의 공통적인 우려는 인플레이션과 경기침체가 동시에 진행되는 최악의 시나리오입니다."
요즘 사상 최대의 혼란에 빠져 있는 월가의 금융회사들은 컨설팅 회사의 최대 고객 중 하나다. 그녀에게 월가가 주도하는 미국식 금융자본주의에 대한 회의론이 불거지는 데 대한 의견을 물어보았다.
"투자은행에 대한 신뢰가 저점(低點)을 찍고 있는 것 같아요. 기존 투자은행 모델은 이제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위기를 넘어 부상할 새로운 투자은행은 효과적으로 자금을 확보하는 새 비즈니스 모델을 선보일 것으로 기대합니다. 새로운 금융규제는 과거 투자은행 중심의 절대적인 글로벌 금융파워를 분산시키고 감독 기능도 전면 개편될 것으로 봅니다."
―한국 기업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한 성공 조건을 꼽는다면?
"하루 종일 얘기해도 시간이 모자랄 큰 주제네요. 리더의 현명한 결정이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무엇보다 리더는 글로벌화를 목표로 삼고, 치밀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그녀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는 데 정도(正道)는 없다고 말했다.
"일본은 점진적으로 브랜드를 구축한 뒤 해외로 나가 기업 인수를 통해 글로벌 기업으로 올라섰지요. 도요타는 핵심 역량을 바탕으로 선별적인 해외 인수를 추진했고, 소니도 기존 브랜드를 기초로 미디어업체 인수에 나서 글로벌 기업이 됐어요.
한국은 성장 경로가 다릅니다. 한국은 외부 기업 인수보다는 가격경쟁력을 가진 고품질 제품을 내세워 글로벌 브랜드를 구축했어요. 삼성·LG·현대가 대표적이지요.
중국은 글로벌화를 위해 해외 기업 인수에 정말 적극적입니다. 중국 대표 가전업체인 하이얼은 인수한 33개 기업을 통해 선진 경영 노하우, 브랜드, 유통체제 등을 확보해 성장했어요. 하지만 하이얼은 중국의 거대 소비층을 기반으로 '굿 이너프 상품(good-enough:프리미엄제품보다는 저렴하면서 품질은 보통 이상인 제품)'을 만들어 소니와 경쟁할 정도가 됐지요."
베인&컴퍼니는 M&A(인수·합병)에 강한 회사다. 지난 10년간 전 세계 5억달러 이상의 M&A 절반을 베인이 컨설팅했다. 그녀에게 M&A에 관한 조언을 구해 보았다.
"M&A의 핵심은 이미 잘 알고 있거나 연관된 부문으로 확장하는 것입니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M&A가 성장의 좋은 대안이 될 수 있지만, 사업 연관성이 떨어지고 통합에 대한 뚜렷한 계획이 없으면 성공하기 쉽지 않아요. 회사의 현 주소와 전략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몸집 불리기 자체가 목적이 되면 M&A는 절대 성공할 수 없습니다."
■완벽한 해결책은 없다. 현실적인 차선책을 찾아라
가디쉬 회장은 인터뷰 내내 기자의 눈을 마주보며 얘기했다.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고 얘기하면 신뢰감을 준다고 했던가. 글로벌 여성 경영인을 꿈꾸는 한국의 커리어 우먼에 대한 조언을 부탁하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사람들과 눈을 응시하고 맞닥뜨려야 한다는 사실을 일찍 터득한 편이죠. 당신과 일하는 걸 편하게 느낄 수 있게 해 주면 당신이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주목할 겁니다. 유머감각이 있다면 금상첨화겠죠?"
그녀는 이스라엘에서 2년간 군인생활을 했다. "군인 경력은 제가 베인 회장이 되는 데 큰 도움을 줬어요. 저는 참모총장 바로 아래 있는 이스라엘 군대 2인자를 보좌하는 역할을 맡았지요. 그때 엄청난 양의 정보를 다루고, 책임감 있게 행동하고, 오랫동안 일하는 능력을 배울 수 있었어요. 생사를 가르는 중요한 의사 결정을 내리는 걸 보면서 언제나 모든 정보를 완벽히 갖추고 결정할 수 없다는 걸 그때 깨달았죠."
그녀는 고객사에게도 완벽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보다 실현가능한 현실적인 대응책이 더 중요함을 강조하곤 한다. 그녀는 서로 다른 문화를 이해하는 법과 다른 의견을 받아들이는 법도 군대에서 자연스럽게 터득했다. "이스라엘은 이민국가여서 군대도 유럽계·중동계·아시아계·미국계 등 다양하게 섞여 있어요." 그녀의 아버지는 이스라엘 장군을 지낸 독일인 이민자였고, 어머니는 러시아 태생이다.
그녀는 1년에 100권 정도 책을 읽는 독서광이다. 그는 기자에게 존 키건(Keegan)의 '승자의 리더십, 패자의 리더십(The mask of command)'을 추천했다. 전쟁을 통해 리더로 올라선 알렉산더, 웰링턴, 그랜트, 히틀러 등 4명의 시대별 리더십을 연구한 책이다. "1차대전 당시 기술 진보 덕분에 전쟁터에서 떨어져 지휘한 장군들이 재앙을 맞는 장면들이 있지요. 직원들과 충분히 대화를 나누지 않거나 현장에서 떨어진 채 회사를 경영하는 CEO라면 한번쯤 읽어보세요."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10/03/200810030044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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