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케임브리지 사이언스 파크에는 IT, 통신, 재료공학, 화학 메디컬, 생명공학 관련 회사들이 입주해 있으며, 입주 회사 지원을 위해 관련 법률 회사, 벤처 캐피털, 컨설팅 회사 등도 입주해 원스톱 서비스를 실현하고 있다.
영국은 스페인 무적함대를 무찌른 이후 300년이 넘는 오랜 기간 동안 화려한 전성기를 가지게 된다. 전세계에 걸친 식민지 확장 정책과 더불어 시작된 산업혁명으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표현은 영국을 가장 잘 표현하는 문구였다.
그러나 20세기 두 번의 세계 전쟁은 영국의 자존심을 제외한 모든 것을 빼앗아 간다. 2차 세계 대전 이전 전세계 교역량의 26%를 차지하던 영국에게 전쟁 후 남은 것은 전쟁에 승리했다는 명분 뿐이었다. 유럽의 산업기반은 독일군의 폭격으로 황폐화된 반면, 전쟁에 참여했지만 본토를 폭격 받지 않아 산업기반이 온전했던 미국은 ‘Made in America’제품으로 황폐한 유럽 대륙에 무차별적인 폭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영국 제조 산업의 핵심은 제철, 제강, 기계, 화학, 섬유 등이었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 이 모든 분야에서 경쟁력을 상실한다. 전쟁은 신흥국들에게 선진국이었던 유럽 국가와 동일한 조건에서 경쟁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이 이상적인 복지국가를 꿈꾸며 대국민 서비스를 확대한 것도 문제다. 이는 국민들의 국가 의존도를 심화시켜, 기업의 생산성과 의욕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것이 이른바 ‘영국병’이다. 불행은 하나만 오지 않는다고 했던가?
오일 쇼크와 함께 석탄 노조의 연대파업으로 영국 경제는 어두운 수렁으로 빠지게 된다. 결국 1977년 영국은 파운드화 가치폭락과 급격한 외환보유고 감소로 IMF에 자금지원을 요청하기 이르며, 국가가 경제활동에 적극 개입하는 케인즈 경제주의를 포기한다. 철의 수상인 대처가 이때 등장하게 된다. 대처 수상은 사망직전의 사양 산업 정리를 시작했으며, 경직된 노동시장을 유연하게 하는 등 영국병을 본격적으로 치료하기 시작한다. 영국은 사망 직전 영국경제를 살리기위해 20년 이상의 시간을 소비해야 했다.
새로운 심장이 필요하다
영국의 주요 경쟁국으로 유럽 국가가 아닌 미국이 급부상되었다. 미국의 대규모 생산 시스템에 대응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경쟁력을 상실해가고 있는 제조업을 되살려 미국과 경쟁하는 것은 구시대적인 발상이다.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낼 수 있는 새로운 산업이 필요했다. 이때 영국에게 영감을 준 것이 바로 실리콘벨리다.
미국 스탠포드 대학 출신의 엔지니어들이 스탠포드 대학 근처에서 실험실을 창업하면서 실리콘벨리의 전설이 시작된다. 현재 인텔, HP와 같은 글로벌 기업들이 실리콘벨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세계 100대 기업 중 20여개의 본사가 여기에 있다. 실리콘벨리의 성장으로 영국인들은 새로운 희망을 발견한다. 그들에게는 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라는 자존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케임브리지 대학은 1209년 설립된 세계 최초의 대학이며, 8세기 동안 유럽과 세계 과학을 이끌어왔다. 만유인력의 아이작 뉴턴, 진화론의 찰스 다윈, 세계 최초의 디지털 컴퓨터 개발자 모리스 월커스, 천재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전자를 발견한 톰슨, DNA를 발견한 프란시스 크릭 등 케임브리지 대학이 자랑하는 물리학자는 손으로 다 헤아리기 힘들다. 단일 대학으로는 81명의 노벨 수상자를 배출했으며, 앞으로 더 많은 수상자를 배출할 가능성은 열려있다. 이런 케임브리지 대학이 어찌 영국인의 자존심이 아닐 수 있겠는가.
영국인의 자존심 ‘케임브리지’
1971년 케임브리지는 실리콘벨리에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산학연구소인 사이언스 파크 설립을 결정한다. 스탠포드의 후광으로 실리콘벨리가 성장한 것처럼 케임브리지 대학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기초과학의 성지였기 때문에 더 훌륭한 결과를 예측했다. 그러나 기대치와 달리 성장은 지지부진했다. 기업들이 대학에 투자해 얻은 성과물을 산업에 적용시킨다는 미국의 실용주의를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오랜 기간동안 정부의 역할이었던 것을 기업이 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영국은 지속된 저성장과 IMF로 인해 국가가 대학과 기업의 연구개발에 투자할 여력이 없었다. 이런 고정관념이 깨어지기 시작한 1980년대 들어 산학연구 결과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한다. 케임브리지 사이언스 파크가 성공해나가자 1986년에는 캠브리지 대학의 센 존스(St John’s) 칼리지는 또 다른 과학 단지인 센 존스 이노베이션 센터(St John’s Innovation Center)를 오픈하면서 영국 산학 활동의 중심으로 자리 잡는다. 현재 케임브리지 사어언스 파크에는 약 64개 회사가 입주했으며, 4천여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 센 존스 이노베이션 센터에는 약 50여개 기업에 1천여명 정도가 근무하고 있다. 현재 영국에는 사이언스 파크가 각 대학별로 60여개나 운영되고 있다.
새로운 심장 ‘사이언스 파크’
케임브리지 사이언스 파크에는 오로지 연구기능의 벤처기업과 연구소만 있다. 사이언스 파크에 입주하는 업체에 특혜가 주어지는 것은 없다. 정부는 땅만 빌려줄 뿐, 정부의 자금지원이 전혀 없기 때문에 자금 조달은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그러나 아무런 혜택이 없는 것 같지만 입주하는 것 자체가 혜택인 곳이 케임브리지 사이언스 파크다. 마이크로소프트, 소니, 도시바, 썬 마이크로시스템즈 등 65개 세계적 대기업의 기술연구소가 여기에 입주해 있으며 많은 글로벌 기업들이 케임브리지를 유럽 연구거점으로 삼고 있다.
연구원 평균연령은 28세로 젊기 때문에 사이언스 파크는 활기차다. 사이언스 파크에서는 기술경쟁력을 갖춘 입주업체간 정보교류가 쉽고, 벤처 기업의 자본력이 공존하고 있다. 케임브리지 사이언스 파크에서 대학교수와 학생들이 기업 프로젝트를 수주하거나, 창업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곳에서 가장 큰 회사로 꼽히는 캔탑제약은 크리스트 칼리지 학장인 알란 먼로가 설립한 것이며, 알렉 브로어스 케임브리지대 부총장은 20년 넘게 IBM의 객원연구원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연구소 소장 역시 대학학장이 담당하고 있다.
영국의 태양이 다시 떠올라
인텔 고든 무어 회장이 은퇴 후 가장 의미있는 기부로 꼽은 것이 바로 케임브리지 대학 첨단과학기술 도서관 설립에 약 100억원을 기부한 것이다. 빌 게이츠 역시 케임브리지에 연구소를 설립하면서 케임브리지대학에 약 2,800억원을 기부했다. 케임브리지 사이언스 파크에는 기부금이 끊이질 않는다. 대기업은 물론 EU와 북대서양조약기구도 연구소에 투자하고 있다.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기초과학 위에서 새로운 BIO 테크놀로지와 IT 테크놀로지가 탄생할 것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그 결과가 가시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나 많은 전세계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방문으로 케임브리지 사이언스 파크 투어와 투자를 설명해주는 벤처기업도 등장했다. 이제 사이언스 파크는 전세계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사이언스 파크가 저물어가고 있는 영국의 태양을 다시 중천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 Beyond Promise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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