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베이징 올림픽에서 가장 분주하게 움직이는 두 기업을 꼽으라면 역시 스포츠용품 전문기업인 아디다스와 나이키를 꼽을 수 있다. 아디다스가 13억 달러를 내고 올림픽 대회 스폰서를 차지했지만, 나이키 역시 이번 올림픽이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에서 점유율을 올릴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것을 모를 리 없다.
아디다스, ‘Impossible is nothing
’스타 마케팅의 시초는 아디다스의 올림픽 홍보 전략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24년 설립된 ‘다슬러 형제 제화’는 자신들의 브랜드를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올림픽에 나가는 선수들에게 자신들의 신발을 신기기로 한다. 아디다스의 본격적인 스타 마케팅은 제시 오웬스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의 전설적인 단거리 육상 주자로 이름을 떨치던 제시 오웬스가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한다는 소식을 듣고 아돌프 다슬러(Adolph Dassler)는 그에게 무료로 러닝화를 제작해주겠다고 제안했고, 오웬스는 손해 볼 장사는 아니었기 때문에 흔쾌히 승낙한다. 오웬스는 다슬러의 러닝화를 신고 베를린 올림픽에서 육상 부문 금메달 4개를 획득한다. 이후 세계대전으로 이들 형제 모두 전쟁에 참가하여 생산이 중단된다.
전쟁이 끝난 후 형제들은 다시 신발 제작을 시작하지만, 다슬러 형제는 정치적인 문제와 집안 문제로 서로 등을 돌리는데, 이후 다슬러 형제 제화는 아디다스(Adidas)와 푸마(Puma)로 분사한다. 아디다스가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게 된 원인으로 월드컵과 TV라는 새로운 매체의 출현을 들 수 있다. TV 방송이 본격화된 스위스 월드컵에서 서독 축구 팀은 아디다스에서 개발한 나선형 징이 달린 축구화를 신고 당시 세계 1위였던 헝가리 팀을 꺾는다. 마침 결승전에는 비가 와서 징이 달린 축구화가 전적으로 유리했다. 아디다스를 신으면 모든 축구 경기에서 승리할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스위스 월드컵 이후 아디다스 축구화는 재고가 없어 판매를 못할 정도로 커다란 성공을 거두면서 아디다스는 점차 세계적인 스포츠용품 회사로 성장한다.
나이키, ‘Just Do It’
육상 선수였던 필 나이트(Phil Knight)는 당시 운동화 시장을 장악한 아디다스를 모방한 신발을 일본 타이거(現아식스)에 주문한다. 당시 일본에는 운동화를 사용할 만한 천연 가죽이 모자랐기 때문에 나일론과 인조가죽 소재 개발에 상당히 적극적이었고, 이런 소재를 운동화에 접목시켰다. 인조가죽과 나일론의 장점은 가격은 저렴하면서도 무게가 가벼워진 것이다. 당시 최고의 제품인 아디다스를 모방했기 때문에 기능도 만족스러웠다.
완성된 운동화를 들고 필 나이트는 각 연습장마다 찾아가 판매한다는 전략은 크게 성공했고, 이후 그는 그의 런닝 코치였던 빌 보워맨과 공동으로 투자해 포틀랜드 도심에 운동화 매장을 차린다. 결과는 대성공이었고, 이런 성공을 바탕으로 이들은 신발 제작에 참여하기로 결정한다. 당시 종업원이었던 제프 존슨의 의견을 받아들여 사명을 블루 리본 스포츠사에서 나이키(Nike)로 변경하고, 지방 한 디자인학과 학생에게서 단돈 35달러에 현재의 트레이드 마크 디자인을 매입한다. 보워맨에게는 새로운 신발 설계 능력과 선구안도 있었지만,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은 당연히 마케팅 능력이다.
나이키가 스타 마케팅을 본격적으로 도입한 것은 1972년 독일 뮌헨 올림픽이었다. 유명 마라토너들을 설득해 나이키 운동화를 착용하도록 했으며, 결승선을 넘은 7명의 입상자 중 4명이 나이키를 착용했다고 언론에 발표한다. 상위 3명은 아디다스를 신었지만, 이 점을 나이키가 홍보할 이유는 없었다. 이후 도전적인 테니스 스타인 존 매켄로와 당시로서는 기록적인 액수에 연간 계약을 맺은 후 미국에서 급성장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나이키가 아디다스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던 것은 마이클 조던이라는 걸출한 스타와 계약을 통해 매출이 폭증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에어조던(Air Jordan)의 초기 제품은 화려한 빨강과 검정으로 만들어져 당시 평범한 디자인이 주류를 이루었던 NBA 선수들의 운동화와 뚜렷한 차별화가 이뤄졌다. 너무 튀는 로고와 디자인 때문에 NBA이사회는 에어조던을 신을 경우 한 게임당 1,000달러의 벌금을 내도록 했다. 나이키는 마이클 조던의 벌금을 대신 지불하면서 광고를 통해 NBA 팬들을 자극한다. 그 결과 에어조던은 매장에서 구경조차 힘들 정도로 출시하는 즉시 판매되었고, 소비자의 성원에 힘입은 나이키는 NBA이사회의 결정을 뒤엎고 만다. 그리고 몇 년 후 20세에 불과한 검증되지 않은 타이거 우즈와 거액에 계약함으로써 ‘Just Do It’ 신화가 시작된다.
다슬러 사망 후 위기를 맞은 아디다스
아디다스는 1960년대부터 1980년대 말까지 황금기를 구가한다. 1958년 스웨덴 월드컵에 참가한 대부분의 선수가 아디다스 축구화를 신고 출전했다. “아디다스 축구화를 신지 않으면 일류 선수가 아니다”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아디다스의 심벌은 ‘환호의 3선’으로 불릴 정도로 스포츠인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필 나이트는 나이키를 만들 무렵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아디다스를 잡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아디다스 제품의 신봉자이기도 했다. 제품의 혁신성과 대중들의 인기에 힘입어 끝없이 성장할 것 같은 아디다스였지만 다슬러가 1978년 78세의 나이로 사망한 이후 여러 문제가 발생한다.
그의 아들이 회사를 완벽하게 장악하는 데 성공하지만 아쉽게도 51세라는 나이에 사망한다. 이후 다슬러의 딸들에게 경영권이 넘어가는데, 회사 진로를 다투는 과정에서 미국 운동화 시장점유율이 70%에서 3%로 급감하고 만다. 혼돈스러운 상황이 지속되자 스포츠 용품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세계 1위 자리는 급성장하고 있는 나이키에게 넘어가고 만다. 이 후 두 번의 경영권이 옮겨간 후 로베르 루이 드페르쉬가 인수하면서 아디다스는 안정된다.
그는 불필요하다고 판단된 고위 경영진 대다수를 해임하고 마케팅 비용을 두 배로 확대한다. 이후 제일 커다란 시장인 미국 시장 진출을 위해 미국 스포츠 마케팅 기업을 인수해 아디다스 아메리카로 전환했고, 나이키 이사였던 피터 무어스와 ‘Just Do It’을 기획한 롭 스트라서가 이 회사를 이끌어가도록 한다. 롭 스트라서는 나이키의 본고장인 미국에 사업체를 설립하도록 함으로써 아디다스 브랜드의 제고에 힘쓴다. 아쉽게 롭 스트라서는 지사 설립 후 얼마 되지 않아 사망하고 만다.
아웃소싱, 연결은 첨단 IT
두 회사 모두 디자인보다는 신발의 기능을 중시했기 때문에 무수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시장에서 선두 자리를 고수할 수 있었다. 이 두 기업의 핵심은 혁신적인 제품 개발과 마케팅이다. 현재 이 두 기업의 마케팅 비용은 철저하게 비밀로 유지되고 있다. 그리고 이 두 기업의 마케팅 비용이 엄청나기 때문에 후발 기업들은 쉽게 따라올 수 없다. 그래서 많은 전문가들은 향후 신발 시장에서 나이키와 아디다스의 양강 구도는 그대로 유지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나이키와 아디다스의 생산은 철저하게 아웃소싱이다. 나이키는 미국 내에 자사 생산 시설이 하나도 없는 제조 기업으로 유명하다. 아디다스 역시 초기에는 독일에서 신발을 생산했지만 이제 대부분 아웃소싱으로 처리한다. 이 점 때문에 후진국의 청소년 노동력 착취라는 문제가 굵어지기는 했지만, 생산 단가가 낮은 지역으로 생산 시설을 신속하게 이동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끊임없는 생산 시설 이동에도 불구하고 품질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IT의 힘이다. 나이키 본사에는 제품 개발과 판매의 핵심 부서인 디자인 부서와 마케팅 부서가 위치하며, 이들이 나이키의 제품 개발과 마케팅 정책을 수립한다. 디자인 부서는 협력 업체와의 실시간 설계 데이터 전송을 위해 1990년대에는 인공위성을 이용하기도 했다. 나이키는 효율적인 물류 시스템을 중시하고 있는데, EU의 출범으로 유럽의 31개 유통망을 하나의 유통센터로 단일화하고, 유럽 전 지역에 72시간 내에 제품 배송이 가능하도록 했다. 제품 개발에 첨단 장비 도입을 주저하지 않는 것도 특징이다.
아디다스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는 각국 축구 선수들을 위해 ‘마이 아디다스(My Adidas)’라는 맞춤형 축구화 제작 시스템을 개발하기도 했다. 이 시스템은 개인별 발의 형태와 특징, 운동할 때 발에 가해지는 압력과 습관적인 움직임 등을 최첨단 풋 스캔 장비를 통해 자신의 발에 꼭 맞는 신발을 제작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선수가 원하는 색상과 소재를 선택하고 자신의 이름까지 새겨 넣을 수 있도록 했다. 단지 4주의 제작 기간만 인내할 수 있다면 일반 소비자들도 구매가 가능하다.
나이키는 한발 더 나아가 인터넷에서 자신이 원하는 신발을 만들 수 있도록 했다. 자신의 신발을 자신이 디자인할 수 있도록 해 다품종 소량 생산을 넘어선 자신만의 신발 제작이 가능하도록 한 것이다. 두 기업 모두 IT 도입과 홍보에 대단히 적극적이다. 젊은 세대가 이들 기업의 마케팅 대상이기 때문에 소비자 타깃에 맞춰 게임과 인터넷을 통한 홍보는 필수다. 오프라인과 온라인 모두 중요한 마케팅 수단으로 인식하고 있다.
신발이 아닌 테크놀로지 전쟁
나이키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는 11개의 전용 운동화를 출시했지만, 이번 베이징 올림픽에는 28개의 전용 운동화를 출시해 아디다스를 놀라게 했다. 항상 나이키보다 많은 운동화를 개발했던 아디다스는 이번 올림픽에는 나이키보다 적은 27개의 제품을 출시해 허를 찔리고 말았다. 물론 이들 운동화 중 몇몇 제품은 시장성이 전혀 없는 제품이지만, 마케팅 차원에서 개발 가치가 충분하다. 나이키는 시범경기 종목인 우슈 운동화 개발을 위해 유명 사범을 본사로 초빙해 최적의 우슈 운동화 개발을 위한 연구와 테스트를 실시했다. 16대의 고속 카메라를 동원해 경기 동작 과정을 일일이 녹화해 분석해 만든 것이 나이키 우슈화다.
아디다스는 최근 인공지능 컴퓨터가 내장된 ‘아디다스 1’을 출시해 기술 혁신 부문에서는 아디다스보다 뛰어나다는 나이키를 놀라게 했다. 2만 가지의 상황을 포착하는 센서와 1만 가지의 연산 수행이 가능한 프로세서를 장착해 운동화를 신은 사람에게 최적의 충격 완화 기능을 제공한다. 현재 충격 완화 기능이 강화된 농구화를 개발해 나이키의 주력시장인 농구화 시장에 도전할 계획이다. 물론 나이키 역시 아디다스의 견고한 주력 시장인 축구화 시장에 끊임없이 도전 중이다. 신발 전쟁은 이제 테크놀로지 전쟁이며, 그 끝이 어디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 Beyond Promise 9월호
'Busines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시아 BT와 IT 핵심 허브 싱가포르 One-North (0) | 2008.09.23 |
---|---|
오픈소스의 혁명가, 리누스 토발즈(Linus Torvalds) (0) | 2008.09.23 |
빅 씽크 전략 (0) | 2008.09.23 |
The Etiquette of Going Global (0) | 2008.09.23 |
유럽 미디어의 중심지 ‘쾰른’ (1) | 2008.08.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