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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11. 23. 04:15

거대공룡 할리 데이비슨을 무너트린 것은 혼다의 50cc 모터사이클 슈퍼큐브였다. 이 사장의 성공 가능성을 과소평가한 할리는 혼다의 성장을 방관했고, 결국 혼다에게 모터사이클의 왕좌를 내주고 만다. 그리고 절치부심해서 그 자리에 다시 찾기까지 걸린 시간은 무려 30년이다. 순간의 방심이 기업의 생존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

할리 데이비슨, 전쟁을 성장의 발판으로 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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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들에게 전세계에 판매되고 있는 모터사이클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열명 중 아홉 명은 할리 데이비슨(Halrey-Davidson, 이후 할리)을 꼽는다. ‘할리 배기음은 미국인 심장소리다.’라는 표현을 할 정도로 할리에 대한 미국인의 사랑은 대단하다. 포춘지는 세계적인 기업의 평균 수명을 40~50년이라고 평가하지만, 할리는 100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모터사이클 시장에서 지배자의 자리를 놓지 않고 있다.

할리는 라이트 형제가 미지의 하늘로 첫 비행을 하던 1903년 밀워키에서 시작되었다. 밀워키의 조그마한 헛간에서 21살의 윌리엄 할리(William Halrey)와 20살의 아더 데이비슨(Auther Davidson)이 페달을 밟지 않아도 빠르게 달릴 수 있는 편리한 자전거를 만든다는 목표로 만든 것이 할리의 최초 모델이다. 최초 모델의 외형은 자전거에 모터를 단 것 이상은 아니었지만, 이 모터사이클을 가지고 할리는 1905년 시카고에서 열린 모터사이클 레이스에서 우승을 했고, 이후 할리라는 이름을 미국 전역에 알리기 시작한다. 모터사이클 초창기에 시장에 진입한 할리는 레이스 우승 이후 탄탄대로를 걷게 된다. 1907년에는 경찰용 모터사이클을 미국 정부에 납품하기 시작했고, 1차 세계대전때는 군용으로 2만대를 공급함으로써 세계 최대의 모터사이클 업체로 성장한다. 할리는 전쟁이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고장 없이 유일하게 전장을 누빌 수 있었던 유일한 모터사이클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전 세계 63개국에 2,000여 딜러망을 구축한다. 이후 2차 세계대전 당시 할 리는 9만여 대를 미군과 연합군에 납품했지만, 경쟁사들은 한 대도 납품할 수 없었다. 이것이 경쟁자를 도태시키는 데 커다란 구실을 했고, 전쟁이 끝난 후 많은 참전용사들이 할리를 자연스럽게 구매하면서 시장은 점차 확대일로를 걷게 된다. 1953년 유일한 경쟁자가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도태됨에 따라 할리는 미국에서 생산하는 유일한 모터사이클 제조업체로 시장의 70% 이상을 장악하게 된다.

혼다, 독자적인 모터사이클 개발로 명성을 쌓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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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폐허 속에서 개발 능력을 상실한 많은 일본 모터사이클 기업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해외 선진기업과 합작으로 제품을 생산하는 방법이었다. 비용을 절감하면서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다. 그러나 혼다기연공업(本田技硏工業, 이후 혼다)은 이런 주류를 따르지 않았다. 1946년 설립한 혼다(Honda)는 합작과 모방보다는 독자적인 기술을 축적해 자신만의 모터사이클을 생산하기로 결정하고, 우선적으로 모터사이클의 핵심인 엔진 개발에 심혈을 기울인다. ‘독창성 있는 고유기술이 있어야만 경쟁에서 생존한다.’라는 한발 앞선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던 혼다 소이치로와 경영의 귀재로 꼽히는 후지사와 다케오라는 인물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혼다의 성공은 1958년 개발한 슈퍼큐브(Supercubs) 덕분이다. 슈퍼큐브는 50cc에 불과하지만, 왼쪽에 기어 조작부분이 장착된 최초의 모터사이클이었고, 4기통 엔진이 장착된 당시 최첨단 모터사이클이었다. 당시 50cc 모터사이클에는 2기통 엔진이 장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시끄럽기만 하고 파워가 떨어졌다. 소이치로는 동일한 엔진으로 시장에서 승부해서 성공하기 힘들다는 것을 깨닫고 4기통 엔진 개발을 핵심 목표로 삼았다. 많은 연구원들이 4기통 엔진은 불가능하다고 만류했지만, 소이치로는 시도도 하지 않고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는 개발자들을 질타했다.

후지사와 역시 소이치로에게 경쟁 제품의 장점을 나열한 모터사이클이 아니라, 혼다의 기술이 집적된 모터사이클을 요구했다. 슈퍼큐브가 개발되자 판매를 담당했던 그는 월간 3만 대에 불과한 일본 모터사이클 시장에 슈퍼큐브를 월 3만대 이상을 판매하는 기록을 세워 개발자이자 사장인 소이치로의 기대에 화답한다. 일본기업들이 슈퍼큐브를 모방한 제품이 잇따라 출시하자 혼다는 좁은 일본시장에 머물기보다는 세계에 도전하기로 결정하고, 1959년 모터사이클 월드 레이스에 참여한다. 첫 참여에 1등을 하지 못했다는 것에 참패라고 느낀 소이치로는 부품 하나까지 혼다 기술로 개발한 것을 고집해 출전 3년 후인 1961년에는 1등부터 5등까지 휩쓸어 버린다. 이런 독자적인 기술 개발 정책 때문에 ‘기술력의 혼다’라는 애칭이 붙게 되었고, 혼다 소이치로는 최고의 장인으로 등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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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cc로 공룡 할리를 넉다운시키다

미국 모터사이클 시장은 1945년 20만대에 이르렀지만, 이후 갑작스럽게 시장의 축소로 1950년대에는 5만대 수준으로 떨어진다. 원인은 경쟁 기업의 등장이 아닌 자동차의 급격한 보급 때문이었다. 자동차가 대량생산되면서 모터사이클과의 가격 차이가 줄어들자, 모터사이클의 장점이 사라진 것이다. 이제 오토바이는 교통수단의 지위에서 일종의 레저용 수단으로 한정되기 시작했는데, 할리의 경영진도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할리 회장인 윌리엄 H. 데이비슨은 “모터사이클은 교통수단이 아니고 스포츠와 여가를 위한 것이다. 누가 교통수단으로 모터사이클을 샀다고 주장을 해도 사실은 대개 여가시간에 그것을 사용할 것이다.”라며 자기만족에 빠져있었다.

혼다 역시 시장을 바라보는 초기 시각은 할리와 차이가 없었다. 미국인 소비자들이 중대형 모터사이클을 좋아할 것이라고 판단 하며 250cc와 350cc 모터사이클을 주력 기종으로 판매하기로 결정했는데, 문제는 제품 개발과정에서 예측한 것이 모두 틀렸다는 것이다. 첫째로 사용자들은 일본인 개발자들이 생각한 속도보다 빨리 달렸다. 결국 모터사이클의 한계를 넘어선 무리한 운행으로 내구성이 떨어지면서 클러치와 연료가 새는 문제가 발생했다. 둘째로 소비자들은 할리 이외의 중대형 모터사이클에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소비자의 관심은 중대형이 아니라 심부름용으로 타고 다니던 슈퍼큐브였다. 시어스(Sears) 백화점 스포츠 판매담당자 눈에 띄면서 슈퍼큐브가 미국 매출 주종상품으로 바뀌게 되면서 혼다는 주 타켓 고객층에 어필할 수 있는 제품을 하루아침에 변경한다. 시장 확대를 위해 모터사이클 판매점이 아니라 낚시전문점과 같이 라이더들이 아닌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을 우선적으로 공략하기 시작한 것이다. 혼다가 시장을 급격하게 장악하기 시작했지만, 할리의 판매 대수는 줄어들지 않았다. 혼다는 신규고객 창출에 성공했지만, 할리는 기존 고객 유지에만 성공하고 있었고, 소형 모터사이클 시장을 과소평가했다. 새로운 시장을 지속적으로 내어준 할리는 급기야 볼링회사인 AMF에 1969년 팔리고 만다.

AMF는 혼다에 대항할 수 있는 대량생산체제를 갖추기 원했지만, 문제는 품질이었다. 할리의 생산이 증가하면 이와 반비례해서 품질이 떨어져갔다. 일본 모터사이클의 불량률은 5%에 불과했지만, 할리의 불량률은 50%를 넘어섰다. AMF는 할리의 품질개선에 노력하기 보다는 스노우모빌과 골프카트와 같은 품목을 생산하는 등 무리하게 다양한 정책을 펼쳐 결국 70%에 이르렀던 시장 점유율을 5% 이하로 떨어뜨리고 만다. 이를 참다못한 13명의 투자가들이 AMF에서 할리를 인수한 후 정부에 로비해 향후 5년간 일본 모터사이클에 무거운 관세를 부과하는 법안을 통과시킨다. 고관세로 일본 모터사이클 판매가 주춤한 5년 동안 할리는 산소 호흡기를 떼고 병상에서 일어나 뛰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13명의 운영진은 일본식 경영방식과 생산방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한다. 일단 비용절감을 위해 40%의 인원을 감원하고, 9%의 임금 삭감을 시행한 후 각 공장마다 철저하게 업무책임을 분담하고, 간부들이 이를 철저하게 관리 감시하는 체제를 도입한다. 그리고 혼다의 Just-in-time 기법을 도입해 불필요한 자재가 공장 내외부에 쌓이지 않도록 자재 및 생산관리를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품질관리를 위해 토론모임을 하고 품질개선을 위해 경영진과 근로자 모두 노력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재고는 67% 감소했고, 생산성은 50% 향상, 불량률 70% 감소라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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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품이 아니라 타는 즐거움을 판매하는 할리

혼다의 50cc의 슈퍼큐브가 위대한 것은 폭주족들만이 모터사이클을 탄다는 사회적인 인식을 걷어낸 것이다. 이런 인식의 변화는 혼다가 시장에서 크게 성장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기도 하지만, 할리가 부활할 수 있는 토대가 되기도 했다. 할리는 혼다의 고성능, 저가격 정책을 쫓아갈 개발과 생산 능력은 없었다. 그러나 혼다가 가지고 있지 않은 충성도 높은 고객을 가지고 있었다. 할리의 고객들 중 92%가 다시 할리를 재구매하는 고객들이다. 즉, 한번만이라도 할리를 구매하도록 만들 수 있다면 그 고객들은 혼다에 빼앗기지 않고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인식의 전환이다. 소비자들은 아직도 1970년대의 고장이 잘나는 할리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이런 문제점을 일거에 해소하기는 불가능했다. 사용자의 인식 전환을 위해 우선 CEO와 직원들이 HOG(Harley Owners Group)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이런 커뮤니티를 활용하는 전략은 크게 성공했다. 1985년 6만 명에 불과했던 회원수는 91년 15만 명에 이르렀고, 2002년 할리 100주년 기념회에는 무려 65만 명이 참석하기도 했다. 현재 HOG는 할리의 가장 중요한 사업부서이자, 고객관리 프로그램으로 성장했다.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는 할리의 성능보다 할리를 가짐으로서 타는 즐거움을 고객들에게 전달하기 시작한다. 할리를 구매하면 가장 미국적인 가치인 자유 그리고 남성의 거친 개성과 일탈이라는 감성적인 자아실현이 가능하다는 콘셉트로 고객들에게 다가서기 시작한다.

그리고 할리 브랜드가 형편없는 품질의 제품에 허가 없이 사용하는 것을 단속함과 동시에 향수, 보석, 타올에 이르는 다양한 상품에 할리 이름과 로고를 사용할 수 있는 라이선스 제도를 도입한다. 이 제품들이 판매되는 과정에서 할리는 뜻밖의 새로운 고객층을 발견하게 된다. 은행가, 의사, 변호사, 연예인 등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이들이 모터사이클을 구매하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러비족(Rubbies : The rich urban bikers)의 출현이다. 할리는 이들을 만족시킬 새로운 고가의 중량급 모터사이클의 필요성을 감지하고, 이 시장의 확대를 결정한다. 결국 할리는 초중량급 시장의 60% 정도를 장악하며 업계 최강자로 다시 살아나게 된다.

1990년대 호황기에 할리를 구매하고자하는 소비자들은 많았지만, 할리는 무리하게 공장을 확대해 생산량을 급격하게 늘리지 않았다. 이런 정책 때문에 유럽 시장에서 점유율을 높일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고 평가받기도 하지만, 고객을 만족시킬 수 있는 품질도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무리수를 두지 않았다. 소형과 경량의 지배자 혼다, 중량급과 초중량급 시장의 지배자 할리. 결코 한쪽 시장의 지배자로 남기 싫어하는 두 기업의 시장 쟁탈 전쟁은 조심스럽게 또 다시 시작되고 있다.
- Beyond Promise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