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12. 3. 22:08
소비자 니즈가 급격하게 바뀌고 파워가 점점 증가하고 있는 최근의 환경 변화는 기업으로 하여금 경영혁신의 패러다임을 바꾸게 하고 있다. 과거에는 품질혁신, 원가절감 등 효율성이 중심이 되는 경영혁신이 유행했다. 그러다가 제조업보다 서비스업이 대두하고 소비자의 요구가 까다로워지면서 단순한 제품 품질보다 새로운 고객가치를 창조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효과성이 보다 중요해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경영혁신 패러다임도 실행 중심에서 창조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 이러한 트렌드를 감지하고 GE는 창의적인 경영을 중시한 이멜트 회장을 잭 웰치의 후계자로 선택한 바 있다. 우리 기업들도 이제 새로운 패러다임을 받아들여 경영을 변화시켜야 한다. 과거 실행 중심의 모델에서 벗어나지 못한 기업들이 서서히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물론 실행 중심의 경영혁신을 완전히 버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경영활동 전반에서 창조 중심의 경영혁신을 적극 받아들여야 한다.
I. 문제제기
근래 기업 경영과 관련된 변화의 속도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지고 있다. 기업이 그만큼 다급해졌다는 의미다. 기업에게 만들면 팔리던 황금시절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영역에서 소비자들에게 저울추가 넘어갔다. 그래서 급격하게 바뀌는 소비자들의 요구에 대응하기 위해 기업은 끊임없이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를 만들어내고 있다. 민첩하게 바뀌는 기업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더구나 최근 경영환경이 악화되고 있다. 유가는 사상 최고가를 연일 경신하면서100달러에 육박하고 있으며, 원자재가의 상승도 지속되고 있다. 그 만큼 원가 부담이 높아지고 채산성이 악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또 달러화 약세로 인해 수출 비중이 높은 한국기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 같은 고유가, 저달러 현상은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고 한다. 한국기업은 IMF를 극복하고 글로벌 시장에서 주목 받기 시작했지만 여유를 가지고 한숨 돌리기는 어렵게 된 것이다. 오히려 우리 경영자들은 사업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고 말한다.
기업경영 환경이 이처럼 크게 어려워지고 있는 가운데 이제 경영혁신의 패러다임도 과거와는 달라지고 있다. 과거에는 방향이 명확한 상태에서 누가 빨리 실행하느냐에 경영혁신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지만, 지금은 누가 남과 다르게 생각하고 방향을 설정하느냐가 더 중요해졌다. 경영혁신의 초점이 ‘실행’에서 ‘창조’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기업들의 움직임이 잘 나타나 있는 경영 관련 미디어에서 키워드 검색을 한 결과를 보아도 2004년을 정점으로 실행에 관한 기사의 비율은 줄어들고 있지만 창의성에 관한 기사의 비율은 늘어나고 있다(<그림 1> 참조).
실행에서 창조로 경영혁신의 화두가 전환하고 있다는 사실은 미국의 대표 기업인 GE의 경영 기조 변화에서도 읽어낼 수 있다. GE는 이미 2000년 말 CEO를 교체하면서 이러한 변화를 먼저 감지하고 잭 웰치(Jack Welch)의 후임 CEO로 실행보다는 창조의 시대에 걸맞는 인물로 평가받아 온 제프리 이멜트(Jeffrey Immelt)를 선임하였다. 잭 웰치 스스로 실행 중심이었던 자신의 경영 방식을 개혁할 사람을 선택한 것이다.
사실 잭 웰치 방식은 IMF 외환위기 이후 한국기업의 경영혁신에 있어 역할 모델(Role Model)로 작용했다. 한국기업들은 복잡한 사업구조를 잘 꾸려가면서 수익을 동반한 고성장을 구가하고 있는 GE를 벤치마킹하려고 애썼다. 최근 10여 년간 잭 웰치의 방식은 한국기업에게 경영혁신의 모범 답안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러한 모델의 효용성이 한계에 봉착한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이 글에서는 ‘잭 웰치식’ 실행 중심의 경영혁신이 어떤 이유로 변하고 있는지 알아보고, 우리 기업들은 이러한 트렌드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II. 경영혁신 패러다임의 변화
1997년 이후 경영 잡지 포춘(Fortune)에서는 매년 설문 조사를 통해 ‘세계에서 가장 존경 받는 기업’ 순위를 발표해 오고 있다. 이 순위에서 단골로 1등을 차지하던 기업이 GE였다. 그런데 2003년 GE가 1위 자리를 월마트(Wal-Mart)에 내주고 5위로 내려 앉았다. 이듬해에는 한 계단 상승한 4위를 차지했지만 역시 1위를 월마트에 내주었다. 이처럼 2003년과 2004년 GE가 존경 받는 기업 순위에서 떨어진 것은 당시 GE식 경영방식의 효과성에 대한 의문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물론 2005년 이후 다시 1위를 탈환했지만 이것은 이멜트 회장이 과거 GE의 방식을 바꾸어서 이 순위를 다시 회복시켰다고 봐야 한다. 과거 GE식 경영혁신이 오늘날 어떠한 변화에 직면해 있는지 알아보자.
1. GE 사례를 통해 본 과거 경영혁신의 특징
‘리틀 잭’을 버린 잭(Jack Welch)
GE의 이사회와 전 CEO였던 잭 웰치는 2000년 11월 후임 CEO를 결정할 때 앞으로는 GE의 방식이 바뀌어야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당시 CEO 후계자는 1997년부터 GE 항공기엔진(Aircraft Engines) 사업본부를 맡고 있던 제임스 맥너니(James McNerney), 1995년부터 GE 발전설비(Power Systems) 사업본부의 책임자였던 봅 나델리(Robert Nardelli), 1997년 이후 GE 의료기기(Medical Systems) 사업본부를 담당하고 있던 제프리 이멜트 등 3명이었다. 이들은 이사회와 CEO인 웰치가 1994년 차기 후임자 선정을 시작할 때 뽑혔던 23명의 후보들이 치열하게 경쟁한 결과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이었다. 웰치는 수년에 걸쳐 여러 사업과 직무를 경험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테스트했다. 이처럼 다양한 경험과 혹독한 시련을 통과했기에 이들 세 사람의 성과는 남달랐다.
특히 나델리의 경영성과가 좋았다. 웰치는 자서전에서도 그의 경영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사실 그는 ‘작은 잭 웰치(Little Jack)’라고 불렸다. 외모도 비슷했으며, 성격 또한 전 GE 회장이었던 웰치를 쏙 빼 닮았다. 경영 스타일과 능력 역시 잭 웰치와 유사했다. 비록 독선적이기는 했지만, 모든 중요한 이슈에서 스스로 의사결정을 주도했으며 책임지고 일했다. 항상 도전적이며 주어진 목표는 반드시 달성하고, 구성원들의 실행을 이끌어 내는데 천부적이었다. 또 그는 사업과 경영의 세부적인 문제까지 자세히 파악했으며, 위기 상황에서는 참모들의 도움을 받기보다는 스스로 자신의 판단과 직관에 의존하여 용기 있게 어려움을 헤쳐나갔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그가 맡았던 GE의 사업본부는 연이어 최고 수익을 냈다. 세 후보를 동일하게 비교하기 위해 1996년부터 2000년까지의 실적을 살펴보면 나델리의 성과가 가장 우수한 것을 알 수 있다(<그림 2> 참조). 그는 4년간 76억 달러였던 매출액을 두 배 가량 끌어올렸다. 매출액과 영업이익 성장률이 GE의 사업본부 중에서 가장 높았다. 특히 그가 취임하던 1995년 발전설비 사업본부의 영업이익은 7억 8천만 달러였는데, 5년 후 4배에 가까운 28억 달러가 넘는 성과를 달성했다.
이렇듯 우수한 능력과 놀라운 성과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웰치는 자신을 이을 후임 CEO로 나델리를 선택하지 않았다. 웰치는 왜 자신과 닮은 나델리에게 CEO 자리를 물려주지 않았을까?
웰치가 나델리를 버리고 이멜트를 선택한 이유는 경영혁신의 패러다임이 ‘실행’에서 ‘창조’로 전환되는 시대적 흐름을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델리도 사업모델을 바꾸는 등 새로운 시도를 하였지만, 그의 성과는 주로 6시그마 활동으로 효율성을 개선하거나 제품 판매를 극대화하여 얻은 것이다. 이에 반해 이멜트는 창의적인 생각으로 기존의 사업구조를 바꾸는데 더 뛰어난 역량을 보였다. 성과의 질적인 측면에서 이멜트가 보다 높은 점수를 받은 것이다. <그림 3>에서 보는 것처럼 이멜트는 기존 제품의 개발이나 판매를 신장시켜서 성과를 얻은 것이 아니다. 비록 GE가 의료기기 사업에서 시장의 선두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향후 제품이 범용화됨에 따라 경쟁사의 저가격 제품 공략 등 경쟁이 격화될 것으로 예상되자 사업모델을 과감히 바꾸었다. 시장을 리드하고 있었지만 기존 사업모델을 파괴해 장차 경쟁이 심해지는 상황에서도 고객을 빼앗기지 않도록 고객을 GE의 서비스에 고정화(Lock-in)시켰던 것이다.
즉 이멜트는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생각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며, 이러한 창조적 경영 방식이 새로운 환경에 가장 적합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웰치는 이멜트를 선택한 것이다. CEO 선임에서 탈락한 나델리가 옮겨간 홈 디포(Home Depot)에서의 경영혁신 결과를 보면 웰치가 옳았음을 알 수 있다.
홈 디포에서 고전한 ‘리틀 잭’ 나델리
GE 이사회가 이멜트를 차기 회장으로 선택했다는 결정을 웰치가 나델리에게 알린 지 10분이 되지 않아서 그는 홈 디포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그래서 잭 웰치의 경영혁신을 그대로 실천한 나델리는 2000년 12월 홈 디포의 CEO가 되었다.
그는 유통업체인 홈 디포를 혁신하는 데 있어 GE에서 성공했던 경영혁신 방식을 그대로 적용했으며 GE에서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주요 보직을 담당하게 했다. 때문에 홈 디포의 구성원들은 나델리의 이러한 경영행태를 비꼬면서 홈 디포(Home Depot)가 홈 지포(Home GEpot)가 되었다고 했다. 그가 주로 힘을 들인 곳은 고객에게 새로운 서비스나 가치를 창출하는 분야가 아니라 원가를 절감하고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분야였다. 그는 10억 달러를 들여서 고객이 스스로 계산하게 하는 셀프-체크 설비와 재고 관리 시스템 및 각종 데이터 베이스 등을 구축했다. 그리고 수천 명의 정규직을 해고하고 비정규직 근로자로 대체했다.
서비스 업체에서 이러한 경영혁신은 맞지 않다며 반대하는 여론이 많았지만, GE에서 잭 웰치와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확신에 찬 자신감으로 밀고 나갔다. 결국 2007년 1월 나델리는 독단적 리더십과 역시 건축자재 유통업을 하는 경쟁사 로우스(Lowe’s Companies) 대비 저조한 성과를 보였다는 이유로 홈 디포 CEO에서 해고된다.
나델리가 취임한 2000년 말 46달러에 달하던 홈 디포의 주가는 해고당하기 전인 2006년 말에는 40달러로 떨어졌다(<그림 4> 참조). 이러한 홈 디포의 주가는 유통업 지수나 시장 평균인 S&P 500 지수보다 훨씬 저조한 수준이다. 반면 경쟁사인 로우스의 주가는 같은 기간 11달러에서 31달러로 상승했다. 홈 디포가 내부 효율성 개선 작업을 하는 동안 로우스는 고객 서비스를 향상시키는 노력을 하여 시장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건자재 유통업에서 월마트의 최저상품가격(Everyday Low Prices) 전략을 채택했고, 고객의 입장에서 구매 프로세스를 개선했고, 매장도 고객 입장에서 바꾸었다.
과거에는 실행이 경영혁신의 중심
나델리는 잭 웰치의 경영방식과 스타일을 보고 성장했다. 그가 홈 디포에서 적용했던 경영혁신은 GE에서 그대로 성공한 것이었다. 나델리의 경영혁신, 즉 잭 웰치식 경영혁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몸집을 키워 시장의 선두가 되는 전략을 택하기 때문에, 주요 기업을 사들이거나 1등이나 2등이 되지 않는 사업은 구조조정한다. 그런데 이러한 방식은 GE가 성장, 발전해 온 경영환경의 특징과 관련 있다. 웰치는 1981년에 CEO가 된 이후 20여 년 동안 GE를 이끌었다. 이 시기에는 글로벌화가 진전되면서 경쟁의 영역이 점차적으로 늘어났다. 무한경쟁화 되는 환경에서 업계 선두와 그렇지 않은 기업간 차이가 엄청나다는 점을 웰치는 누구보다 분명이 알고 있었다.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선도자 우위(First Mover Advantage)가 적용되고, 이를 위해서는 대규모 투자가 필요했으며 시장에서 1등이나 2등이 되는 것이 매우 중요했던 것이다. 또 산업간 경계가 명확하여 한번 진입장벽을 쌓아 놓으면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잠재적 경쟁자가 상당히 줄어들어 많은 이윤을 획득할 수 있었다.
둘째, 거대해져서 관료화된 조직의 계층을 없애고 날렵한 조직으로 바꾸는데 주력한다. 규모의 경제를 구축하기 위해서 대기업 조직을 만들다 보니 기업이 비대해져서 관료주의가 나타났다. 이러한 비효율과 관료주의를 제거하기 위해 조직을 슬림화하는 노력을 한 것이다.
셋째, 제품력을 향상시키고 원가를 절감하기 위해 6시그마와 같은 방법론으로 생산혁신에 매진한다.
1980~90년대 GE가 속해있던 하이테크 산업은 제품의 품질이 소비자의 니즈를 충족시키지 못하던 상황에 있었다. 생활용품 업계와 달리 하이테크 산업은 발달한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소비자가 원하는 수준의 제품을 만들지 못했다. 그래서 당시에는 제품 품질이 구매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었다.
마지막으로, 이와 같은 혁신을 이끌 수 있는 최고 인재를 영입하고 하위 인력은 퇴출시키는 경쟁 시스템을 도입하여 리더를 육성한다. 시장의 선두가 되고 제품력을 경쟁사보다 먼저 확보하며 원가절감에서 경쟁력을 가지는 등 GE의 경영혁신은 모두 빠른 스피드로 실행이 되어야 하는 것들이다. GE처럼 거대한 기업에서 이러한 활동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조직의 의사결정 체계가 명료해야 하고 부서간 정보 전달이 빨라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일사불란한 명령체계가 필요하다. 그래서 가능하면 똑똑한 사람이 리더가 되어 Top-down 방식에 의해서 조직을 움직이는 것이 효과적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경쟁적 인사관리로 최고의 인재를 등용하여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게 하는 것이 중요했던 것이다.
요컨대 웰치식 경영혁신, 즉 실행 중심의 경영혁신은 성장산업에서 품질이나 성능을 가능한 한 빠르게 발전시키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2. 창조적 경영혁신의 대두
그러나 이제 과거와는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대부분의 산업은 수요가 포화되어 성숙기에 있는 경우가 많다. 품질의 발달 속도가 빨라 제품 성능이 소비자가 원하는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산업에서 제품이 범용화되고 있다. 컴퓨터를 예로 들어 보자. 높은 사양의 게임을 즐기는 소수의 사용자를 제외하고는 컴퓨터 속도가 느려서 불만인 사람들은 별로 없다. 저장 용량도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이제는 소비자가 원하는 수준을 넘어선 기능을 제공하는 제품이 아주 많다. 범용화된 환경에서는 후발기업도 선도자만큼 좋은 제품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선도자 우위가 쉽지 않다. 그래서 이제는 제품의 제조 경쟁력만으로는 승부에서 이기기 어렵다. 마케팅, 디자인, 사업모델 등 소프트한 면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또 산업간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어 어느 곳에서 경쟁자가 출현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GE의 잭 웰치는 비록 자신은 실행 중심 경영혁신의 전도사였지만 시대가 이렇게 바뀌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복제품(Copycat)인 나델리보다는 창의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멜트를 후임자로 뽑은 것이다. 실제로 이멜트가 취임한 후 GE의 경영은 크게 바뀌었다. 과거 GE의 경영활동과 이멜트 취임 후 변화된 핵심가치를 살펴보면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그림 5> 참조). 과거에는 벽 없는 조직, 혁신, 단순성, 리더십 등 명확한 방향을 두고 실행하는 것이 중심이었다. 이멜트가 취임한 이후 상상력과 새로움을 강조하여 실행뿐만 아니라 창의력이 중심이 되는 유연한 조직을 지향하고 있다. 가장 달라진 것은 리더십 스타일이다. 웰치 앞에서는 구성원들이 모두 벌벌 떨면서 보고했는데, 이멜트는 이러한 분위기를 없앴다고 한다. 유연한 사고를 위해서 강력한 리더십이 중심이 되는 조직 문화도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기업들은 과거의 성공 방법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변화된 환경에서 위기에 빠진다. 지금 우리가 모범으로 생각하고 있는 경영혁신 모델이 서서히 전환되고 있다. 한국기업은 어떻게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지 알아보자.
III. 한국기업 경영혁신의 특징과 한계
우리 나라에서 경영혁신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 진 것은 1990년대 이후이다(<그림 6> 참조). 세계화가 진전되면서 경영혁신의 필요성을 인식했고 경영혁신에 방법론에 대한 기업들의 관심도 폭발적인 수준이었다. 그러다가 1998년 IMF 외환위기를 계기로 경영혁신은 우리 사회에서 보편화되었다.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한국경제가 재도약에 성공한 2000년 이후에는 경영혁신에 대한 논의가 잠잠해 지다가 최근 들어 다시금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거시적인 경제위기는 극복했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지속적인 혁신활동을 수행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상황이 된 때문일 것이다.
경영혁신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1990년대 이후부터 일어났지만, 사실 한국기업은 오래 전부터 혁신활동에 매진해 왔다. 한국기업은 뒤늦게 출발한 자의 조바심으로 항상 ‘빨리빨리’를 외치며 앞만 보고 달려왔다. 선진기업을 따라 잡기 위해 경영혁신에 대한 부단한 노력을 해온 것이다. 이처럼 선진기업을 넘어서기 위한 신생기업의 노력이 한국기업 경영혁신의 특징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1. 한국적 경영혁신의 특징
1) 문화 중시
한국기업 경영혁신의 첫 번째 특징은 변화관리나 조직문화 혁신이 중심이 된다는 점이다. 선진기업들도 변화관리를 중시하지만 한국기업은 그 정도가 훨씬 심해서 구성원들의 정신 무장이나 변화 분위기 조성 등이 경영혁신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생각한다. 또 조직에 변화 분위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사람은 CEO가 유일하기 때문에, 경영혁신에서 CEO가 중심이 된다.
장기파업으로 부도 위기를 맞았던 한국전기초자의 경영혁신 사례에서 이러한 특징을 엿볼 수 있다. 한국전기초자는 1997년 말 서두칠 사장이 전문경영인으로 파견되어 대대적인 경영혁신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서두칠 사장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위기의식으로 회사를 무장하는 것이었다. 구성원들에게 위기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회사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알려주기 시작했다. 회사의 경영정보를 공개함으로써 구성원들이 경영자가 가지고 있는 고민을 나누게 되었다. 심지어 사원 가족에게까지 경영 실태를 설명했다. 서두칠 사장 스스로도 솔선수범했다. 운전기사를 없애고 골프회원권을 팔았으며 항상 공장에 주재하는 등 모범을 보임으로써, 회사 내에 팽배한 불신풍조를 사라지게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직원들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게 되었고 회사는 혁신에 성공한다.
변화관리의 전문가인 코터(John Kotter)는 위기의식을 불어넣는 것이 조직문화를 바꾸는 출발점이라고 말했다. 서두칠 사장도 회사의 위기를 구성원들과 공감하는 활동부터 시작했다. 한국전기초자뿐만 아니라 많은 한국기업들은 경영혁신에 있어 조직문화나 구성원들의 마인드 혁신을 강조한다. 아마도 경영혁신의 구체 방법론이 발달하지 않아서 윗사람은 솔선수범하고 아랫사람은 열심히 하는 것을 혁신으로 생각했던 과거의 관행이 남아있기 때문에 이러한 특징을 보이는 것이 아닐까.
2) 목표 지향
두 번째 특징은 ‘하면 된다’ 식의 실행이 중심이 되는 혁신활동을 많이 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한국기업은 달성 가능한 수준보다 훨씬 높은 목표를 세워놓고 일단 뛴다. 한국기업은 전략 목표를 실행하는 과정인 혁신의 방법론보다는 목표 달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심지어 자원이나 역량 수준에 대한 고려 없이 무조건적으로 높은 목표를 설정하고 실행한다. 이것은 후발기업으로서 선진기업을 보다 빨리 따라 잡아야 하는 상황에서 나타난 관행이다.
이러한 관행으로 인해서 요즈음에도 한국기업은 사업계획 수립 시 목표를 과도하게 높게 잡는다. 연말에 차년도 계획을 세울 때 CEO로부터 가장 평가를 잘 받는 사업부장이 바로 목표를 높게 세운 사람이라고 한다.
“이봐, 해봤어?” 현대 그룹의 고 정주영 회장이 항상 했던 말이라고 한다. 어떤 일을 추진하거나 목표를 설정할 때 부하직원이 어렵다고 이야기하면, ‘해보고 나서 그런 소리를 하라’는 뜻에서 이야기했다고 한다. 실제로 정주영 회장은 불가능한 목표라도 일단 도전하고 실행해 보는 것으로 유명하다. 1970년 12월 정주영 회장이 첫 선박을 수주할 때 조선소 도크도 없이 500원짜리 지폐를 보여주며 한국인은 예로부터 배를 잘 만들었다고 그리스 선주를 설득했다. 결국 선주는 26만톤급 유조선 두 척을 현대조선소에 주문했고, 조선소 건설과 유조선 건조를 동시에 착공하여 납기를 지켰다. 이렇듯 지금은 세계 최고 수준인 조선업도 불가능한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 속에서 발전한 것이다.
지금은 1등이 된 반도체, LCD 사업도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발전했다. 불가능할 것 같은 목표를 설정하고 실행에 집중해서 어떻게든 목표를 달성하는 방식으로 선진기업을 따라 잡은 것이다. 한국기업이 성장하면서 취했던 이러한 방식은 아직도 우리 기업의 경영에 남아있다. 지금도 경영혁신은 ‘무슨 일이 있어도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3) 개선 중시
셋째, 운영효율성 확보나 원가절감 등 기존의 것을 개선하는 활동이 중심이 된다. 후발기업으로 선진기업의 기술이나 설비를 받아들여 그들의 수준이 될 때까지 노력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관습이다.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보다는 선진기업의 제품과 생산방식을 모방하여 가능한 한 다르지 않게 실행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래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보다 남의 것을 가지고 와서 개선하거나 과거의 것을 조금 발전시키는 활동에 익숙해진 것이다.
위에 예로 든 한국전기초자 역시 구성원들의 마인드 혁신 이외에 운영혁신 활동도 병행했다. 서두칠 사장은 ‘3890’(연간 생산량 3천만 개, 전면유리 수율 80%, 후면유리 수율 90%, 클레임 제로) 운동을 시작했다. 3890은 생산성 혁신의 목표를 하나의 구호로 만든 것이다. 많은 한국기업에서 생산성 목표를 혁신 구로로 만든 문구를 볼 수 있다.
IMF 외환위기 이후 LG전자, 삼성SDI, 포스코 등 많은 대기업들이 6시그마 기법을 도입하여 커다란 성과를 얻었다. 지금도 6시그마 기법은 한국기업에게 확산되고 있다. 그런데 6시그마 기법은 주로 공장의 수율을 올리거나 낭비를 줄이는 등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분야에서 상당히 효과적이었다. 한국기업에게 6시그마가 그렇게 빨리 파급되고 널리 확산된 것은 그만큼 우리의 경영혁신이 운영효율성 향상 같은 개선 활동 중심임을 말해준다.
2. 한국적 경영혁신의 한계
이처럼 한국적 경영혁신의 특징은 선진기업을 모방하고 가능한 한 빨리 따라 잡기 위해서 앞만 보고 실행했던 발전 과정의 부산물이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기업의 경영혁신도 앞에서 설명한 경영환경 변화에 대응해야 한다. 글로벌 경쟁 체제에서는 미국기업에게 당면한 이슈가 우리 기업에게도 자연스럽게 적용된다. 한국기업들도 이제는 산업이 성숙기에 진입하는 기업들이 많아지고 있으며, 산업간 경계가 무너져서 경쟁이 격화되고 있다. 제품의 범용화와 공급 과잉 현상은 우리 기업에게도 당장 해결해야 하는 과제다. 그러므로 변화되고 있는 경영혁신 패러다임을 보다 빨리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른다.
최근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하는 한국의 제조업체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도 이러한 트렌드와 무관하지 않다. 고속 성장을 지속하던 IT 업체들이 잇따라 침체를 겪고 있으며, 수출 비중이 큰 제조업체들의 채산성이 악화되고 있다. 실증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상장 제조업체 459개를 대상으로 2000년 이후 영업이익률을 조사하였다. <그림 7>에서 보는 것처럼 제조업체들의 영업이익률이 최근 들어 조금씩 하락하고 있다. 특히 수출 비중이 50%를 넘는 기업들의 영업이익률이 더욱 좋지 않고 하락폭도 큰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이 기간 동안 환율하락으로 인해서 수출기업의 채산성이 악화된 영향도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글로벌 경쟁을 하고 있는 한국기업이 고객에게 차별화된 가치를 가져다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매출액 1,000억원 미만의 중소규모 제조업체의 경우에는 이러한 특징이 더 심하게 나타난다. 1,000억원 미만 업체 전체의 영업이익률은 대기업들과 다르지 않으나, 수출을 위주로 하는 중소업체의 영업이익률은 평균에 훨씬 미치지 못하고 하락폭도 컸다. 이는 대기업에 비해 새로운 사업모델을 창출하기 힘든 중소업체들이 글로벌 시장에서 더욱 고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 선진기업과 다른 차별화 전략으로 무장하지 못한 기업들의 채산성은 더욱 악화될 것이다. 한국기업은 과거와는 다른 경영혁신을 통해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해야 한다.
다른 사례를 보자. 위에서 한국적 경영혁신으로 기적을 만들어냈던 한국전기초자가 지금 어려움에 빠져 있다. 한국전기초자는 2002년 이후로 하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6,400억원을 넘던 매출액이 작년에는 2,400억원 대로 하락, 절반 이상 떨어진 것이다. 또 작년과 올 상반기말 현재 적자가 지속되고 있다. 공장을 매각하고 패널 생산 라인을 계속 중단하고 있으며, 인력 구조조정을 지속하고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한국전기초자는 성숙기 산업을 넘어서 사양 산업에 속해 있다. 아무리 브라운관의 품질이 좋아져도 TV가 디지털화되고 LCD와 같은 평판 디스플레이로 전환되는 상황에서는 수요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계속되는 어려움에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제품의 품질개선이나 원가절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시장 변화의 흐름을 미리 읽어 한발 앞서서 고객이 원하는 것을 미리 창조해 내는 것이다.
IV. 창조적 혁신의 조건
그러면 우리 기업들은 어떻게 창조적 경영혁신에 성공할 수 있을까? 먼저 기업에서 창조적 혁신이 발생하도록 하는 조건을 생각해 보자. 기업 조직의 창의성 연구에 전념해온 전문가들에 의하면 창의적 혁신은 두 가지 조건 하에 나타난다고 한다.
첫째, 성과에 대한 요구나 납기 준수에 대한 압박 등 혁신활동에 대한 압력이나 관리(Challenge)의 최적 수준이 존재한다고 한다. 압력이 없이 너무 풀어놓아도 안되고, 너무 많은 압력을 주어도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과에 대한 요구 등 압력을 어느 정도 줄 때까지는 창조적 혁신에 대한 성과가 올라가지만 압력이 어느 수준을 넘어서면 성과가 다시 하락한다는 것이다. 하버드 대학의 경영학 교수였던 고 테오도르 레빗(Theodore Levitt)이 일찍이 말했듯이, 기업에서의 혁신(Business Creativity)은 아이디어에 실행이 결합되어야 완성된다. 세계적 예술가였던 고 백남준씨가 ‘자고로 예술가는 게을러야 한다’고 이야기한 것처럼 아이디어는 그 특성이 압력이 없고 자유로울 때 많이 나타난다. 반면에 실행의 결과는 압력이 있어야 나타나는 특성이 있다. 우리의 뇌는 긴장을 해야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혁신은 아이디어와 실행이 동시에 결합되어야 하는데 이처럼 아이디어와 실행은 압력에 대해서 서로 반대 방향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압력이 적절한 수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창조적 경영혁신에 성공하려는 기업에서는 이 최적 포인트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 창조적 혁신은 서로 다른 영역의 경계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상이한 영역의 논리나 메커니즘이 유추에 의해서 오랫동안 풀지 못한 문제를 해결하거나 막막했던 방향에 대해 길을 제시해 주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현대 경영학과 조직이론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학파로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사이먼(Herbert A. Simon)과 조직이론의 대가 마취(James G. March) 등이 속한 카네기 학파(Carnegie School)를 들 수 있다. 당시 미국의 카네기 멜론 대학에서는 인간과 조직의 행동을 연구하기 위해서 경제학, 정치학, 인류학, 심리학 등 다양한 영역의 전공자로 리서치 팀을 만들어 연구를 했다. 다양한 영역의 지식들이 모여 현대 경영학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이론들이 탄생한 것이다. 또 우연에 의해 의도하지 않은 혁신적 제품이 나타나는 사례도 서로 다른 영역의 경계에서 창조적 혁신이 나타난다는 증거다. 파이자(Pfizer)의 비아그라, 3M의 포스트잇, 듀폰(DuPont)의 나일론, 캘로그(Kellogg)의 시리얼, HP의 잉크젯 프린터, 심지어 인류 최대의 발견이라고 하는 페니실린 등이 모두 우연한 발견을 통해 사업으로 성공한 대표적인 예이다. 우연에 의한 혁신은 한 분야의 연구를 다른 분야에 적용했을 때 효과를 본 것이다. 한 영역에서는 실패였지만 다른 영역에서는 성공이 되는 이러한 발견이나 제품은 서로 다른 영역을 넘나들지 않으면 그대로 사장되었을 것이다.
창조를 위한 파괴
이처럼 창조적 혁신이 나타나는 상황을 이해하면 기업에서 어떻게 창조적 경영혁신에 성공할지 생각할 수 있다. 창조성의 특성을 이해하고 기획이나 실행, 지원 등 경영의 모든 분야에서 체계적인 관리를 해야 한다. 가령 기획 단계에서는, 일의 결과는 강하게 요구하되 실행 과정의 계획에 대해서는 자율성을 부여할 필요가 있다. 사람은 목표 달성에 대한 압력이 없이 너무 풀어주어도 일을 제대로 안하고, 너무 강하게 조여도 탈진(Burn-out)하여 생각을 안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행 단계에 있어서도 압력이나 관리의 최적 포인트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보다 자세히 설명하면 초기에는 압력을 많이 주지 말고 자율성에 맡기다가, 시간이 지나갈수록 압력의 수준을 높이는 것이 현명하다. 즉 일의 결과를 너무 조급하게 요구하지 말아야 하지만 아이디어가 구체화되기 시작하면 결과에 대한 압박을 주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초기에는 돈을 아끼지 말고 풍부하게 부여하지만 사업화가 시작되면 예산을 관리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어떠한 과제를 수행할 때 서로 다른 분야의 담당자들로 팀을 구성하여 다양한 영역의 논리나 법칙이 결합되어 창조적 혁신이 발현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동기부여 방식도 ‘실행’ 중심의 활동에는 금전 보상 등 외적 보상이 효과적이지만 ‘창조’ 중심의 활동은 일을 즐기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창의적인 기업 조직을 만들거나 창조적 경영혁신을 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추후 심층적인 고찰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핵심은 창조적 경영혁신을 위해서는 단순히 혁신과 관련된 방법만 바꿔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다른 경영시스템도 이에 맞추어 연계시켜야 한다. 전략을 수립하는 과정, 리더십, 성과 관리, 보상 등 모든 영역이 연계되어야 한다. 창조적 경영혁신이 중요하다고 기존 조직의 시스템과 어긋나는 행동을 촉진하다가는 원래보다도 못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슘페터가 이야기한 ‘창조적 파괴’라는 말이 이러한 상황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것, 과거의 것을 파괴해야 한다. 한국기업의 경영혁신은 주로 과거를 거부, 파괴하기보다는 기존의 것을 기반으로 개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과거를 파괴할 줄 알아야 한다. ‘경쟁사보다 먼저 실행하는 시대’가 지나가고, ‘경쟁사와 다르게 창조하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창조를 위해서는 과거의 경영 시스템 전체를 파괴해야 할지도 모른다.
- LG 경제연구원 2007.12.03
I. 문제제기
근래 기업 경영과 관련된 변화의 속도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지고 있다. 기업이 그만큼 다급해졌다는 의미다. 기업에게 만들면 팔리던 황금시절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영역에서 소비자들에게 저울추가 넘어갔다. 그래서 급격하게 바뀌는 소비자들의 요구에 대응하기 위해 기업은 끊임없이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를 만들어내고 있다. 민첩하게 바뀌는 기업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더구나 최근 경영환경이 악화되고 있다. 유가는 사상 최고가를 연일 경신하면서100달러에 육박하고 있으며, 원자재가의 상승도 지속되고 있다. 그 만큼 원가 부담이 높아지고 채산성이 악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또 달러화 약세로 인해 수출 비중이 높은 한국기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 같은 고유가, 저달러 현상은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고 한다. 한국기업은 IMF를 극복하고 글로벌 시장에서 주목 받기 시작했지만 여유를 가지고 한숨 돌리기는 어렵게 된 것이다. 오히려 우리 경영자들은 사업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고 말한다.
기업경영 환경이 이처럼 크게 어려워지고 있는 가운데 이제 경영혁신의 패러다임도 과거와는 달라지고 있다. 과거에는 방향이 명확한 상태에서 누가 빨리 실행하느냐에 경영혁신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지만, 지금은 누가 남과 다르게 생각하고 방향을 설정하느냐가 더 중요해졌다. 경영혁신의 초점이 ‘실행’에서 ‘창조’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기업들의 움직임이 잘 나타나 있는 경영 관련 미디어에서 키워드 검색을 한 결과를 보아도 2004년을 정점으로 실행에 관한 기사의 비율은 줄어들고 있지만 창의성에 관한 기사의 비율은 늘어나고 있다(<그림 1> 참조).
실행에서 창조로 경영혁신의 화두가 전환하고 있다는 사실은 미국의 대표 기업인 GE의 경영 기조 변화에서도 읽어낼 수 있다. GE는 이미 2000년 말 CEO를 교체하면서 이러한 변화를 먼저 감지하고 잭 웰치(Jack Welch)의 후임 CEO로 실행보다는 창조의 시대에 걸맞는 인물로 평가받아 온 제프리 이멜트(Jeffrey Immelt)를 선임하였다. 잭 웰치 스스로 실행 중심이었던 자신의 경영 방식을 개혁할 사람을 선택한 것이다.
사실 잭 웰치 방식은 IMF 외환위기 이후 한국기업의 경영혁신에 있어 역할 모델(Role Model)로 작용했다. 한국기업들은 복잡한 사업구조를 잘 꾸려가면서 수익을 동반한 고성장을 구가하고 있는 GE를 벤치마킹하려고 애썼다. 최근 10여 년간 잭 웰치의 방식은 한국기업에게 경영혁신의 모범 답안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러한 모델의 효용성이 한계에 봉착한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이 글에서는 ‘잭 웰치식’ 실행 중심의 경영혁신이 어떤 이유로 변하고 있는지 알아보고, 우리 기업들은 이러한 트렌드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II. 경영혁신 패러다임의 변화
1997년 이후 경영 잡지 포춘(Fortune)에서는 매년 설문 조사를 통해 ‘세계에서 가장 존경 받는 기업’ 순위를 발표해 오고 있다. 이 순위에서 단골로 1등을 차지하던 기업이 GE였다. 그런데 2003년 GE가 1위 자리를 월마트(Wal-Mart)에 내주고 5위로 내려 앉았다. 이듬해에는 한 계단 상승한 4위를 차지했지만 역시 1위를 월마트에 내주었다. 이처럼 2003년과 2004년 GE가 존경 받는 기업 순위에서 떨어진 것은 당시 GE식 경영방식의 효과성에 대한 의문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물론 2005년 이후 다시 1위를 탈환했지만 이것은 이멜트 회장이 과거 GE의 방식을 바꾸어서 이 순위를 다시 회복시켰다고 봐야 한다. 과거 GE식 경영혁신이 오늘날 어떠한 변화에 직면해 있는지 알아보자.
1. GE 사례를 통해 본 과거 경영혁신의 특징
‘리틀 잭’을 버린 잭(Jack Welch)
GE의 이사회와 전 CEO였던 잭 웰치는 2000년 11월 후임 CEO를 결정할 때 앞으로는 GE의 방식이 바뀌어야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당시 CEO 후계자는 1997년부터 GE 항공기엔진(Aircraft Engines) 사업본부를 맡고 있던 제임스 맥너니(James McNerney), 1995년부터 GE 발전설비(Power Systems) 사업본부의 책임자였던 봅 나델리(Robert Nardelli), 1997년 이후 GE 의료기기(Medical Systems) 사업본부를 담당하고 있던 제프리 이멜트 등 3명이었다. 이들은 이사회와 CEO인 웰치가 1994년 차기 후임자 선정을 시작할 때 뽑혔던 23명의 후보들이 치열하게 경쟁한 결과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이었다. 웰치는 수년에 걸쳐 여러 사업과 직무를 경험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테스트했다. 이처럼 다양한 경험과 혹독한 시련을 통과했기에 이들 세 사람의 성과는 남달랐다.
특히 나델리의 경영성과가 좋았다. 웰치는 자서전에서도 그의 경영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사실 그는 ‘작은 잭 웰치(Little Jack)’라고 불렸다. 외모도 비슷했으며, 성격 또한 전 GE 회장이었던 웰치를 쏙 빼 닮았다. 경영 스타일과 능력 역시 잭 웰치와 유사했다. 비록 독선적이기는 했지만, 모든 중요한 이슈에서 스스로 의사결정을 주도했으며 책임지고 일했다. 항상 도전적이며 주어진 목표는 반드시 달성하고, 구성원들의 실행을 이끌어 내는데 천부적이었다. 또 그는 사업과 경영의 세부적인 문제까지 자세히 파악했으며, 위기 상황에서는 참모들의 도움을 받기보다는 스스로 자신의 판단과 직관에 의존하여 용기 있게 어려움을 헤쳐나갔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그가 맡았던 GE의 사업본부는 연이어 최고 수익을 냈다. 세 후보를 동일하게 비교하기 위해 1996년부터 2000년까지의 실적을 살펴보면 나델리의 성과가 가장 우수한 것을 알 수 있다(<그림 2> 참조). 그는 4년간 76억 달러였던 매출액을 두 배 가량 끌어올렸다. 매출액과 영업이익 성장률이 GE의 사업본부 중에서 가장 높았다. 특히 그가 취임하던 1995년 발전설비 사업본부의 영업이익은 7억 8천만 달러였는데, 5년 후 4배에 가까운 28억 달러가 넘는 성과를 달성했다.
이렇듯 우수한 능력과 놀라운 성과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웰치는 자신을 이을 후임 CEO로 나델리를 선택하지 않았다. 웰치는 왜 자신과 닮은 나델리에게 CEO 자리를 물려주지 않았을까?
웰치가 나델리를 버리고 이멜트를 선택한 이유는 경영혁신의 패러다임이 ‘실행’에서 ‘창조’로 전환되는 시대적 흐름을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델리도 사업모델을 바꾸는 등 새로운 시도를 하였지만, 그의 성과는 주로 6시그마 활동으로 효율성을 개선하거나 제품 판매를 극대화하여 얻은 것이다. 이에 반해 이멜트는 창의적인 생각으로 기존의 사업구조를 바꾸는데 더 뛰어난 역량을 보였다. 성과의 질적인 측면에서 이멜트가 보다 높은 점수를 받은 것이다. <그림 3>에서 보는 것처럼 이멜트는 기존 제품의 개발이나 판매를 신장시켜서 성과를 얻은 것이 아니다. 비록 GE가 의료기기 사업에서 시장의 선두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향후 제품이 범용화됨에 따라 경쟁사의 저가격 제품 공략 등 경쟁이 격화될 것으로 예상되자 사업모델을 과감히 바꾸었다. 시장을 리드하고 있었지만 기존 사업모델을 파괴해 장차 경쟁이 심해지는 상황에서도 고객을 빼앗기지 않도록 고객을 GE의 서비스에 고정화(Lock-in)시켰던 것이다.
즉 이멜트는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생각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며, 이러한 창조적 경영 방식이 새로운 환경에 가장 적합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웰치는 이멜트를 선택한 것이다. CEO 선임에서 탈락한 나델리가 옮겨간 홈 디포(Home Depot)에서의 경영혁신 결과를 보면 웰치가 옳았음을 알 수 있다.
홈 디포에서 고전한 ‘리틀 잭’ 나델리
GE 이사회가 이멜트를 차기 회장으로 선택했다는 결정을 웰치가 나델리에게 알린 지 10분이 되지 않아서 그는 홈 디포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그래서 잭 웰치의 경영혁신을 그대로 실천한 나델리는 2000년 12월 홈 디포의 CEO가 되었다.
그는 유통업체인 홈 디포를 혁신하는 데 있어 GE에서 성공했던 경영혁신 방식을 그대로 적용했으며 GE에서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주요 보직을 담당하게 했다. 때문에 홈 디포의 구성원들은 나델리의 이러한 경영행태를 비꼬면서 홈 디포(Home Depot)가 홈 지포(Home GEpot)가 되었다고 했다. 그가 주로 힘을 들인 곳은 고객에게 새로운 서비스나 가치를 창출하는 분야가 아니라 원가를 절감하고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분야였다. 그는 10억 달러를 들여서 고객이 스스로 계산하게 하는 셀프-체크 설비와 재고 관리 시스템 및 각종 데이터 베이스 등을 구축했다. 그리고 수천 명의 정규직을 해고하고 비정규직 근로자로 대체했다.
서비스 업체에서 이러한 경영혁신은 맞지 않다며 반대하는 여론이 많았지만, GE에서 잭 웰치와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확신에 찬 자신감으로 밀고 나갔다. 결국 2007년 1월 나델리는 독단적 리더십과 역시 건축자재 유통업을 하는 경쟁사 로우스(Lowe’s Companies) 대비 저조한 성과를 보였다는 이유로 홈 디포 CEO에서 해고된다.
나델리가 취임한 2000년 말 46달러에 달하던 홈 디포의 주가는 해고당하기 전인 2006년 말에는 40달러로 떨어졌다(<그림 4> 참조). 이러한 홈 디포의 주가는 유통업 지수나 시장 평균인 S&P 500 지수보다 훨씬 저조한 수준이다. 반면 경쟁사인 로우스의 주가는 같은 기간 11달러에서 31달러로 상승했다. 홈 디포가 내부 효율성 개선 작업을 하는 동안 로우스는 고객 서비스를 향상시키는 노력을 하여 시장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건자재 유통업에서 월마트의 최저상품가격(Everyday Low Prices) 전략을 채택했고, 고객의 입장에서 구매 프로세스를 개선했고, 매장도 고객 입장에서 바꾸었다.
과거에는 실행이 경영혁신의 중심
나델리는 잭 웰치의 경영방식과 스타일을 보고 성장했다. 그가 홈 디포에서 적용했던 경영혁신은 GE에서 그대로 성공한 것이었다. 나델리의 경영혁신, 즉 잭 웰치식 경영혁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몸집을 키워 시장의 선두가 되는 전략을 택하기 때문에, 주요 기업을 사들이거나 1등이나 2등이 되지 않는 사업은 구조조정한다. 그런데 이러한 방식은 GE가 성장, 발전해 온 경영환경의 특징과 관련 있다. 웰치는 1981년에 CEO가 된 이후 20여 년 동안 GE를 이끌었다. 이 시기에는 글로벌화가 진전되면서 경쟁의 영역이 점차적으로 늘어났다. 무한경쟁화 되는 환경에서 업계 선두와 그렇지 않은 기업간 차이가 엄청나다는 점을 웰치는 누구보다 분명이 알고 있었다.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선도자 우위(First Mover Advantage)가 적용되고, 이를 위해서는 대규모 투자가 필요했으며 시장에서 1등이나 2등이 되는 것이 매우 중요했던 것이다. 또 산업간 경계가 명확하여 한번 진입장벽을 쌓아 놓으면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잠재적 경쟁자가 상당히 줄어들어 많은 이윤을 획득할 수 있었다.
둘째, 거대해져서 관료화된 조직의 계층을 없애고 날렵한 조직으로 바꾸는데 주력한다. 규모의 경제를 구축하기 위해서 대기업 조직을 만들다 보니 기업이 비대해져서 관료주의가 나타났다. 이러한 비효율과 관료주의를 제거하기 위해 조직을 슬림화하는 노력을 한 것이다.
셋째, 제품력을 향상시키고 원가를 절감하기 위해 6시그마와 같은 방법론으로 생산혁신에 매진한다.
1980~90년대 GE가 속해있던 하이테크 산업은 제품의 품질이 소비자의 니즈를 충족시키지 못하던 상황에 있었다. 생활용품 업계와 달리 하이테크 산업은 발달한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소비자가 원하는 수준의 제품을 만들지 못했다. 그래서 당시에는 제품 품질이 구매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었다.
마지막으로, 이와 같은 혁신을 이끌 수 있는 최고 인재를 영입하고 하위 인력은 퇴출시키는 경쟁 시스템을 도입하여 리더를 육성한다. 시장의 선두가 되고 제품력을 경쟁사보다 먼저 확보하며 원가절감에서 경쟁력을 가지는 등 GE의 경영혁신은 모두 빠른 스피드로 실행이 되어야 하는 것들이다. GE처럼 거대한 기업에서 이러한 활동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조직의 의사결정 체계가 명료해야 하고 부서간 정보 전달이 빨라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일사불란한 명령체계가 필요하다. 그래서 가능하면 똑똑한 사람이 리더가 되어 Top-down 방식에 의해서 조직을 움직이는 것이 효과적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경쟁적 인사관리로 최고의 인재를 등용하여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게 하는 것이 중요했던 것이다.
요컨대 웰치식 경영혁신, 즉 실행 중심의 경영혁신은 성장산업에서 품질이나 성능을 가능한 한 빠르게 발전시키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2. 창조적 경영혁신의 대두
그러나 이제 과거와는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대부분의 산업은 수요가 포화되어 성숙기에 있는 경우가 많다. 품질의 발달 속도가 빨라 제품 성능이 소비자가 원하는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산업에서 제품이 범용화되고 있다. 컴퓨터를 예로 들어 보자. 높은 사양의 게임을 즐기는 소수의 사용자를 제외하고는 컴퓨터 속도가 느려서 불만인 사람들은 별로 없다. 저장 용량도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이제는 소비자가 원하는 수준을 넘어선 기능을 제공하는 제품이 아주 많다. 범용화된 환경에서는 후발기업도 선도자만큼 좋은 제품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선도자 우위가 쉽지 않다. 그래서 이제는 제품의 제조 경쟁력만으로는 승부에서 이기기 어렵다. 마케팅, 디자인, 사업모델 등 소프트한 면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또 산업간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어 어느 곳에서 경쟁자가 출현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GE의 잭 웰치는 비록 자신은 실행 중심 경영혁신의 전도사였지만 시대가 이렇게 바뀌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복제품(Copycat)인 나델리보다는 창의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멜트를 후임자로 뽑은 것이다. 실제로 이멜트가 취임한 후 GE의 경영은 크게 바뀌었다. 과거 GE의 경영활동과 이멜트 취임 후 변화된 핵심가치를 살펴보면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그림 5> 참조). 과거에는 벽 없는 조직, 혁신, 단순성, 리더십 등 명확한 방향을 두고 실행하는 것이 중심이었다. 이멜트가 취임한 이후 상상력과 새로움을 강조하여 실행뿐만 아니라 창의력이 중심이 되는 유연한 조직을 지향하고 있다. 가장 달라진 것은 리더십 스타일이다. 웰치 앞에서는 구성원들이 모두 벌벌 떨면서 보고했는데, 이멜트는 이러한 분위기를 없앴다고 한다. 유연한 사고를 위해서 강력한 리더십이 중심이 되는 조직 문화도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기업들은 과거의 성공 방법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변화된 환경에서 위기에 빠진다. 지금 우리가 모범으로 생각하고 있는 경영혁신 모델이 서서히 전환되고 있다. 한국기업은 어떻게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지 알아보자.
III. 한국기업 경영혁신의 특징과 한계
우리 나라에서 경영혁신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 진 것은 1990년대 이후이다(<그림 6> 참조). 세계화가 진전되면서 경영혁신의 필요성을 인식했고 경영혁신에 방법론에 대한 기업들의 관심도 폭발적인 수준이었다. 그러다가 1998년 IMF 외환위기를 계기로 경영혁신은 우리 사회에서 보편화되었다.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한국경제가 재도약에 성공한 2000년 이후에는 경영혁신에 대한 논의가 잠잠해 지다가 최근 들어 다시금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거시적인 경제위기는 극복했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지속적인 혁신활동을 수행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상황이 된 때문일 것이다.
경영혁신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1990년대 이후부터 일어났지만, 사실 한국기업은 오래 전부터 혁신활동에 매진해 왔다. 한국기업은 뒤늦게 출발한 자의 조바심으로 항상 ‘빨리빨리’를 외치며 앞만 보고 달려왔다. 선진기업을 따라 잡기 위해 경영혁신에 대한 부단한 노력을 해온 것이다. 이처럼 선진기업을 넘어서기 위한 신생기업의 노력이 한국기업 경영혁신의 특징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1. 한국적 경영혁신의 특징
1) 문화 중시
한국기업 경영혁신의 첫 번째 특징은 변화관리나 조직문화 혁신이 중심이 된다는 점이다. 선진기업들도 변화관리를 중시하지만 한국기업은 그 정도가 훨씬 심해서 구성원들의 정신 무장이나 변화 분위기 조성 등이 경영혁신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생각한다. 또 조직에 변화 분위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사람은 CEO가 유일하기 때문에, 경영혁신에서 CEO가 중심이 된다.
장기파업으로 부도 위기를 맞았던 한국전기초자의 경영혁신 사례에서 이러한 특징을 엿볼 수 있다. 한국전기초자는 1997년 말 서두칠 사장이 전문경영인으로 파견되어 대대적인 경영혁신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서두칠 사장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위기의식으로 회사를 무장하는 것이었다. 구성원들에게 위기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회사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알려주기 시작했다. 회사의 경영정보를 공개함으로써 구성원들이 경영자가 가지고 있는 고민을 나누게 되었다. 심지어 사원 가족에게까지 경영 실태를 설명했다. 서두칠 사장 스스로도 솔선수범했다. 운전기사를 없애고 골프회원권을 팔았으며 항상 공장에 주재하는 등 모범을 보임으로써, 회사 내에 팽배한 불신풍조를 사라지게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직원들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게 되었고 회사는 혁신에 성공한다.
변화관리의 전문가인 코터(John Kotter)는 위기의식을 불어넣는 것이 조직문화를 바꾸는 출발점이라고 말했다. 서두칠 사장도 회사의 위기를 구성원들과 공감하는 활동부터 시작했다. 한국전기초자뿐만 아니라 많은 한국기업들은 경영혁신에 있어 조직문화나 구성원들의 마인드 혁신을 강조한다. 아마도 경영혁신의 구체 방법론이 발달하지 않아서 윗사람은 솔선수범하고 아랫사람은 열심히 하는 것을 혁신으로 생각했던 과거의 관행이 남아있기 때문에 이러한 특징을 보이는 것이 아닐까.
2) 목표 지향
두 번째 특징은 ‘하면 된다’ 식의 실행이 중심이 되는 혁신활동을 많이 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한국기업은 달성 가능한 수준보다 훨씬 높은 목표를 세워놓고 일단 뛴다. 한국기업은 전략 목표를 실행하는 과정인 혁신의 방법론보다는 목표 달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심지어 자원이나 역량 수준에 대한 고려 없이 무조건적으로 높은 목표를 설정하고 실행한다. 이것은 후발기업으로서 선진기업을 보다 빨리 따라 잡아야 하는 상황에서 나타난 관행이다.
이러한 관행으로 인해서 요즈음에도 한국기업은 사업계획 수립 시 목표를 과도하게 높게 잡는다. 연말에 차년도 계획을 세울 때 CEO로부터 가장 평가를 잘 받는 사업부장이 바로 목표를 높게 세운 사람이라고 한다.
“이봐, 해봤어?” 현대 그룹의 고 정주영 회장이 항상 했던 말이라고 한다. 어떤 일을 추진하거나 목표를 설정할 때 부하직원이 어렵다고 이야기하면, ‘해보고 나서 그런 소리를 하라’는 뜻에서 이야기했다고 한다. 실제로 정주영 회장은 불가능한 목표라도 일단 도전하고 실행해 보는 것으로 유명하다. 1970년 12월 정주영 회장이 첫 선박을 수주할 때 조선소 도크도 없이 500원짜리 지폐를 보여주며 한국인은 예로부터 배를 잘 만들었다고 그리스 선주를 설득했다. 결국 선주는 26만톤급 유조선 두 척을 현대조선소에 주문했고, 조선소 건설과 유조선 건조를 동시에 착공하여 납기를 지켰다. 이렇듯 지금은 세계 최고 수준인 조선업도 불가능한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 속에서 발전한 것이다.
지금은 1등이 된 반도체, LCD 사업도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발전했다. 불가능할 것 같은 목표를 설정하고 실행에 집중해서 어떻게든 목표를 달성하는 방식으로 선진기업을 따라 잡은 것이다. 한국기업이 성장하면서 취했던 이러한 방식은 아직도 우리 기업의 경영에 남아있다. 지금도 경영혁신은 ‘무슨 일이 있어도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3) 개선 중시
셋째, 운영효율성 확보나 원가절감 등 기존의 것을 개선하는 활동이 중심이 된다. 후발기업으로 선진기업의 기술이나 설비를 받아들여 그들의 수준이 될 때까지 노력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관습이다.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보다는 선진기업의 제품과 생산방식을 모방하여 가능한 한 다르지 않게 실행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래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보다 남의 것을 가지고 와서 개선하거나 과거의 것을 조금 발전시키는 활동에 익숙해진 것이다.
위에 예로 든 한국전기초자 역시 구성원들의 마인드 혁신 이외에 운영혁신 활동도 병행했다. 서두칠 사장은 ‘3890’(연간 생산량 3천만 개, 전면유리 수율 80%, 후면유리 수율 90%, 클레임 제로) 운동을 시작했다. 3890은 생산성 혁신의 목표를 하나의 구호로 만든 것이다. 많은 한국기업에서 생산성 목표를 혁신 구로로 만든 문구를 볼 수 있다.
IMF 외환위기 이후 LG전자, 삼성SDI, 포스코 등 많은 대기업들이 6시그마 기법을 도입하여 커다란 성과를 얻었다. 지금도 6시그마 기법은 한국기업에게 확산되고 있다. 그런데 6시그마 기법은 주로 공장의 수율을 올리거나 낭비를 줄이는 등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분야에서 상당히 효과적이었다. 한국기업에게 6시그마가 그렇게 빨리 파급되고 널리 확산된 것은 그만큼 우리의 경영혁신이 운영효율성 향상 같은 개선 활동 중심임을 말해준다.
2. 한국적 경영혁신의 한계
이처럼 한국적 경영혁신의 특징은 선진기업을 모방하고 가능한 한 빨리 따라 잡기 위해서 앞만 보고 실행했던 발전 과정의 부산물이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기업의 경영혁신도 앞에서 설명한 경영환경 변화에 대응해야 한다. 글로벌 경쟁 체제에서는 미국기업에게 당면한 이슈가 우리 기업에게도 자연스럽게 적용된다. 한국기업들도 이제는 산업이 성숙기에 진입하는 기업들이 많아지고 있으며, 산업간 경계가 무너져서 경쟁이 격화되고 있다. 제품의 범용화와 공급 과잉 현상은 우리 기업에게도 당장 해결해야 하는 과제다. 그러므로 변화되고 있는 경영혁신 패러다임을 보다 빨리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른다.
최근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하는 한국의 제조업체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도 이러한 트렌드와 무관하지 않다. 고속 성장을 지속하던 IT 업체들이 잇따라 침체를 겪고 있으며, 수출 비중이 큰 제조업체들의 채산성이 악화되고 있다. 실증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상장 제조업체 459개를 대상으로 2000년 이후 영업이익률을 조사하였다. <그림 7>에서 보는 것처럼 제조업체들의 영업이익률이 최근 들어 조금씩 하락하고 있다. 특히 수출 비중이 50%를 넘는 기업들의 영업이익률이 더욱 좋지 않고 하락폭도 큰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이 기간 동안 환율하락으로 인해서 수출기업의 채산성이 악화된 영향도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글로벌 경쟁을 하고 있는 한국기업이 고객에게 차별화된 가치를 가져다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매출액 1,000억원 미만의 중소규모 제조업체의 경우에는 이러한 특징이 더 심하게 나타난다. 1,000억원 미만 업체 전체의 영업이익률은 대기업들과 다르지 않으나, 수출을 위주로 하는 중소업체의 영업이익률은 평균에 훨씬 미치지 못하고 하락폭도 컸다. 이는 대기업에 비해 새로운 사업모델을 창출하기 힘든 중소업체들이 글로벌 시장에서 더욱 고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 선진기업과 다른 차별화 전략으로 무장하지 못한 기업들의 채산성은 더욱 악화될 것이다. 한국기업은 과거와는 다른 경영혁신을 통해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해야 한다.
다른 사례를 보자. 위에서 한국적 경영혁신으로 기적을 만들어냈던 한국전기초자가 지금 어려움에 빠져 있다. 한국전기초자는 2002년 이후로 하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6,400억원을 넘던 매출액이 작년에는 2,400억원 대로 하락, 절반 이상 떨어진 것이다. 또 작년과 올 상반기말 현재 적자가 지속되고 있다. 공장을 매각하고 패널 생산 라인을 계속 중단하고 있으며, 인력 구조조정을 지속하고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한국전기초자는 성숙기 산업을 넘어서 사양 산업에 속해 있다. 아무리 브라운관의 품질이 좋아져도 TV가 디지털화되고 LCD와 같은 평판 디스플레이로 전환되는 상황에서는 수요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계속되는 어려움에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제품의 품질개선이나 원가절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시장 변화의 흐름을 미리 읽어 한발 앞서서 고객이 원하는 것을 미리 창조해 내는 것이다.
IV. 창조적 혁신의 조건
그러면 우리 기업들은 어떻게 창조적 경영혁신에 성공할 수 있을까? 먼저 기업에서 창조적 혁신이 발생하도록 하는 조건을 생각해 보자. 기업 조직의 창의성 연구에 전념해온 전문가들에 의하면 창의적 혁신은 두 가지 조건 하에 나타난다고 한다.
첫째, 성과에 대한 요구나 납기 준수에 대한 압박 등 혁신활동에 대한 압력이나 관리(Challenge)의 최적 수준이 존재한다고 한다. 압력이 없이 너무 풀어놓아도 안되고, 너무 많은 압력을 주어도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과에 대한 요구 등 압력을 어느 정도 줄 때까지는 창조적 혁신에 대한 성과가 올라가지만 압력이 어느 수준을 넘어서면 성과가 다시 하락한다는 것이다. 하버드 대학의 경영학 교수였던 고 테오도르 레빗(Theodore Levitt)이 일찍이 말했듯이, 기업에서의 혁신(Business Creativity)은 아이디어에 실행이 결합되어야 완성된다. 세계적 예술가였던 고 백남준씨가 ‘자고로 예술가는 게을러야 한다’고 이야기한 것처럼 아이디어는 그 특성이 압력이 없고 자유로울 때 많이 나타난다. 반면에 실행의 결과는 압력이 있어야 나타나는 특성이 있다. 우리의 뇌는 긴장을 해야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혁신은 아이디어와 실행이 동시에 결합되어야 하는데 이처럼 아이디어와 실행은 압력에 대해서 서로 반대 방향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압력이 적절한 수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창조적 경영혁신에 성공하려는 기업에서는 이 최적 포인트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 창조적 혁신은 서로 다른 영역의 경계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상이한 영역의 논리나 메커니즘이 유추에 의해서 오랫동안 풀지 못한 문제를 해결하거나 막막했던 방향에 대해 길을 제시해 주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현대 경영학과 조직이론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학파로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사이먼(Herbert A. Simon)과 조직이론의 대가 마취(James G. March) 등이 속한 카네기 학파(Carnegie School)를 들 수 있다. 당시 미국의 카네기 멜론 대학에서는 인간과 조직의 행동을 연구하기 위해서 경제학, 정치학, 인류학, 심리학 등 다양한 영역의 전공자로 리서치 팀을 만들어 연구를 했다. 다양한 영역의 지식들이 모여 현대 경영학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이론들이 탄생한 것이다. 또 우연에 의해 의도하지 않은 혁신적 제품이 나타나는 사례도 서로 다른 영역의 경계에서 창조적 혁신이 나타난다는 증거다. 파이자(Pfizer)의 비아그라, 3M의 포스트잇, 듀폰(DuPont)의 나일론, 캘로그(Kellogg)의 시리얼, HP의 잉크젯 프린터, 심지어 인류 최대의 발견이라고 하는 페니실린 등이 모두 우연한 발견을 통해 사업으로 성공한 대표적인 예이다. 우연에 의한 혁신은 한 분야의 연구를 다른 분야에 적용했을 때 효과를 본 것이다. 한 영역에서는 실패였지만 다른 영역에서는 성공이 되는 이러한 발견이나 제품은 서로 다른 영역을 넘나들지 않으면 그대로 사장되었을 것이다.
창조를 위한 파괴
이처럼 창조적 혁신이 나타나는 상황을 이해하면 기업에서 어떻게 창조적 경영혁신에 성공할지 생각할 수 있다. 창조성의 특성을 이해하고 기획이나 실행, 지원 등 경영의 모든 분야에서 체계적인 관리를 해야 한다. 가령 기획 단계에서는, 일의 결과는 강하게 요구하되 실행 과정의 계획에 대해서는 자율성을 부여할 필요가 있다. 사람은 목표 달성에 대한 압력이 없이 너무 풀어주어도 일을 제대로 안하고, 너무 강하게 조여도 탈진(Burn-out)하여 생각을 안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행 단계에 있어서도 압력이나 관리의 최적 포인트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보다 자세히 설명하면 초기에는 압력을 많이 주지 말고 자율성에 맡기다가, 시간이 지나갈수록 압력의 수준을 높이는 것이 현명하다. 즉 일의 결과를 너무 조급하게 요구하지 말아야 하지만 아이디어가 구체화되기 시작하면 결과에 대한 압박을 주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초기에는 돈을 아끼지 말고 풍부하게 부여하지만 사업화가 시작되면 예산을 관리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어떠한 과제를 수행할 때 서로 다른 분야의 담당자들로 팀을 구성하여 다양한 영역의 논리나 법칙이 결합되어 창조적 혁신이 발현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동기부여 방식도 ‘실행’ 중심의 활동에는 금전 보상 등 외적 보상이 효과적이지만 ‘창조’ 중심의 활동은 일을 즐기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창의적인 기업 조직을 만들거나 창조적 경영혁신을 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추후 심층적인 고찰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핵심은 창조적 경영혁신을 위해서는 단순히 혁신과 관련된 방법만 바꿔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다른 경영시스템도 이에 맞추어 연계시켜야 한다. 전략을 수립하는 과정, 리더십, 성과 관리, 보상 등 모든 영역이 연계되어야 한다. 창조적 경영혁신이 중요하다고 기존 조직의 시스템과 어긋나는 행동을 촉진하다가는 원래보다도 못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슘페터가 이야기한 ‘창조적 파괴’라는 말이 이러한 상황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것, 과거의 것을 파괴해야 한다. 한국기업의 경영혁신은 주로 과거를 거부, 파괴하기보다는 기존의 것을 기반으로 개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과거를 파괴할 줄 알아야 한다. ‘경쟁사보다 먼저 실행하는 시대’가 지나가고, ‘경쟁사와 다르게 창조하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창조를 위해서는 과거의 경영 시스템 전체를 파괴해야 할지도 모른다.
- LG 경제연구원 2007.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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