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의 ‘경제 대통령’이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은 인물이 바로 노키아의 요르마 올릴라 명예회장이다. 그는 위기에 빠진 노키아를 구원해 후진국이었던 핀란드를 선진국 대열로 이끈 인물로 핀란드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행복한 CEO다.
미국 경제 시사 주간지 비즈니스위크는 요르마 올릴라를 천재 경영인이라는 극찬과 함께 살아 있는 경영 교과서로 명명했다. 비즈니스 전문지가 인정할 정도로 그의 성과물은 화려하다. 현재 그는 노키아 CEO에서 물러나 세계 제1의 석유 기업인 로열더치셀 그룹의 CEO를 맡고 있다. 물론 노키아의 인연을 생각해 명예회장직도 겸임하고 있지만, 경영에 참여할 의사는 없어 보인다. 그가 41세라는 젊은 나이에 노키아 회장으로 재임하면서 이룩한 기적적인 성공은 지금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자존심 강한 핀란드인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자료는 찾아보기 힘들다. 7세때부터 테니스를 즐겨 쳤고, 아이스하키와 축구를 좋아하던 꼬마였다는 것이 전부다. 그는 핀란드 헬싱키대학교 정치학 박사에 헬싱키기술대 공학 석사, 런던대학교 경제학 석사 학위를 수여받은 정치와 경제, 엔지니어링 지식을 겸비한 팔방미인이다. 1978년 미국 씨티은행에 입사한 후 기업회계분석가로 일하다 1985년 노키아로 자리를 옮겼다. 젊은 나이에 씨티은행 임원에 올랐기 때문에 미국 월가에서 금융전문가로 성장하면 더 많은 보수와 미래가 보장되었는데, 굳이 후진국으로 평가받는 핀란드로 돌아가야겠느냐고 주변에서 충고하기도 했다. 만류한 이들의 충고가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노키아 시절 올릴라 회장의 연봉은 35만 달러로 여기에 55%에 달하는 고율의 세금을 떼고 나면 전 세계 휴대전화 시장을 주름잡고 있는 그의 명성에 비해 초라한 연봉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올릴라 회장은 ‘핀란드인은 핀란드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라며 노키아로 자리를 옮긴다. 그는 오래된 사브(Saab) 자동차를 손수 운전하며 휴가 때면 헬싱키 근교 작은 통나무집에 머물며 사우나와 테니스를 즐겼다. 이런 소박한 리더의 모습 때문에 그를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CEO 중 한 사람으로 꼽는 것이다.
1위가 아니면 버려라
핀란드는 산악 지형이라 휴대전화가 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이다. 그러나 올릴라가 회장에 취임할 1992년 당시 휴대전화는 소수의 상류층을 위한 고가의 가전기기로 취급받고 있었다. 당시 노키아의 주력 상품은 고무, 제지, 펄프, 타이어 등의 제품이었다. 그러나 1990년 구소련의 붕괴로 경공업 제품이 창고에 쌓이기 시작했고, 이를 타개하기 위한 가전업체로의 변신은 무참한 실패로 끝나고 만다.
최악의 불경기를 겪고 있던 유럽의 소비자들은 노키아 TV와 컴퓨터에 지갑을 열지 않았다. 2억 달러에 달하는 적자액에 좌절감을 느낀 카리 카이라모 회장은 자살을 하고 만다. 이후 격렬한 회의 끝에 휴대전화 부문 사장이었던 임원 서열 10위인 올릴라가 노키아의 수장으로 취임한다. 130년 전통의 노키아를 41세의 풋내기 회장에게 맡겼을 만큼 노키아의 상황은 절박했다. 올릴라 회장은 취임하면서 향후 통신 분야에 운명을 걸겠다고 선언하고 1위가 될 가능성이 없는 사업은 과감하게 정리하기 시작한다. 오랜 기간 노키아를 이끌어오던 고무, 제지, 펄프, 타이어 등 기존 생산라인을 과감하게 털어버리고 휴대전화와 정보통신 인프라 사업에 주력한다.
그리고 그는 3M의 마케팅을 담당하던 안시 바뇨키를 스카우트하여 노키아의 브랜드 전략을 짜도록 한다. 바뇨키는 벤츠, 필립 모리스, 나이키 등을 벤치마킹 대상으로 연구한 후 제품 개발에서부터 애프터서비스까지 모든 단계를 철저하게 브랜드에 입각하여 계획을 수립했다. 이것이 바로 ‘노키아 25년 브랜드 플랜’이다. 올릴라는 향후 브랜드가 중요한 자산이 될 것임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첫 작품은 1994년에 출시한 ‘노키아 2110’ 모델이다. 검정색 일색이었던 당시 휴대전화 시장에 ‘노키아 2110’ 모델은 빨강, 노랑, 파랑 등 컬러 색상에 다양한 기능을 넣어 소비자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노키아는 대대적 광고를 통해 ‘갖고 싶고 휴대하기 편한 전화’라는 이미지를 심어갔다. 비즈니스위크는 ‘노키아 2110’ 모델을 ‘1994년 최고 신제품'으로 선정했다. 이동전화 시장에 뛰어든 지 2년 만에 23억 달러의 이익을 올리며 순항하기 시작한 노키아는 ‘노키아 2110’ 모델’을 계기로 세계적 이동통신회사로 부상했다. 성장 탄력이 붙은 노키아는 1999년 모토롤라를 제치고 세계 1위의 휴대전화 제조업체에 오른다.
끊임없는 R&D가 기업의 핵심
노키아 로고 아래쪽에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Connecting People)이란 광고 카피가 있다. 올릴라 회장은 직원 간의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을 중시한다. 통신업체 성격상 시장의 변화가 빠르기 때문에 실수는 불가피하다. 올릴라 회장은 직원의 실수를 질책하기보다 다음에 잘하라고 격려한다. 그렇지만 ‘실수를 저질렀다면 반드시 그것을 기초로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는 노키아 직원들의 마인드가 완고하게 굳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1998년 사업본부장 4명을 헬싱키 본사 회의실에 소집한 후 놀랄만한 제안을 한다. 담당 사업 부문을 바꿔보는 것이 어떠냐는 것이었다.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던 상황에서 엉뚱한 제안이었기에 4명의 본부장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노키아가 현실에 안주하기보다 혁신적인 회사가 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의 방식은 실적이 증명해주었다. 1997년 100억 달러에서 1999년 206억 달러로 주당 순이익도 2배 이상 증가했다. 기업 분석가들은 노키아의 성장 스토리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살아 있는 경영 교과서의 성장은 아직도 끝을 예측하기 힘들다.
- Beyond Promise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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