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6. 5. 15:11
저개발 국가의 성장률은 글로벌 경제의 평균 성장률보다 높은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들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하기만 하면 높은 성장을 구가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들 시장은 지역적 특수성이 강한데도 불구하고, 많은 글로벌 기업들은 선진국 시장에서 개발된 마케팅 이론을 저개발 시장에도 적용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저개발 시장에 적합한 마케팅을 위해서는 먼저 제품 차원에서 과잉 품질을 경계하고 현지 고객의 눈높이에 맞는 제품을 제공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기존의 소비자 조사가 아닌 민속지적인 조사가 필요하다. 가격 차원에서는 고객 관점에서 감내할 만한 가격을 먼저 설정한 다음 제품 컨셉트를 결정하는 타깃 프라이싱이 바람직하다. 유통 차원에서는 신유통 채널에만 의존하기보다, 기존 유통 채널 및 사회적 네트워크를 적절히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촉진 차원에서는 브랜드의 고차원적 속성보다 신뢰도에 초점을 맞춘 커뮤니케이션 전략이 효율적이다. 브랜드의 신뢰도가 높아지면 이를 적극적으로 레버리지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아울러, 저개발 국가의 자본 시장이 급속도로 발달하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상품이나 서비스를 넘어 해당 사업 자체의 상장 혹은 매각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 목 차 >
Ⅰ. 새로운 기회와 진부한 관점
Ⅱ. 저개발 시장의 마케팅 포인트
Ⅲ. 제품 마케팅을 넘어서
Ⅰ. 새로운 기회와 진부한 관점
올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들의 평균 경제성장률은 2%를 밑돌 전망이다. 반면, 저개발 상태를 벗어나고 있는 인도, 브라질 등 BRICs 국가들의 성장률은 6~7% 수준이다. BRICs 국가의 뒤를 이을 것이라고 이야기되는 멕시코, 이집트, 나이지리아, 베트남 등 차세대 신흥국들(Frontier Markets)의 성장률 역시 이와 비슷한 수준이다. 그런데 실제 이들 국가의 쇼핑몰이나 재래시장 같은 실물시장을 살펴 보면, 체감 성장률이 실제 경제성장률 수치보다 더 높게 느껴진다.
시장 성장에 편승해야
체감 성장률과 실제성장률 간에 차이가 나는 원인 중 하나는 불균형 성장이다. 선진국들은 도시와 농촌 간의 성장률 차이가 크지 않지만, 저개발 국가들의 경우 도시의 성장률은 농촌보다 크게 높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도시 지역에서도 구매력이 있는 중·상류층 이상의 소득 성장률이 저소득층보다 더 높은 경우가 흔하다. 즉 현재 글로벌 기업들의 타깃이 되는 중급 이상의 제품이나 서비스 시장은 통계로 공표되는 경제성장률보다 더 빨리 성장하고 있으며, 기회는 그 만큼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저개발 국가의 저소득층이나 농촌 지역의 소비자들도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다. 중국 정부는 농촌 지역의 발전을 위해 갖가지 대책을 내놓고 있다. 여타 저개발 국가들 중에서도 성장 잠재력이 높은 국가의 경우 시차를 두고 도시의 중산층 이하 계층과 농촌 지역의 구매력도 빠르게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렇게 볼 때, 글로벌 기업으로서는 잠재력 있는 저개발 시장의 성장에 편승하기만 해도 선진 시장에서의 성장률 이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시장의 성장에 편승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라는 점이다. 웬만한 저개발 시장에는 여러 글로벌 업체들이 이미 들어와 있고, 나름의 경쟁력을 갖춘 로컬 업체들도 버티고 있어 이들 시장의 특성에 효과적으로 대응해야만 최소한 시장 성장률 수준으로 커나갈 수 있다. 그런데 저개발 시장에서 효과적으로 마케팅을 펼쳐나가는 데 있어서는 현지 지향형 관점이 부족하다는 점이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저개발 시장 소비자를 보는 눈
글로벌 업체들은 저개발 시장의 소비자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의 취향이나 제품 선택 기준은 선진국 소비자들과 차이가 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글로벌 기업들은 그 차이를 단순히 ‘다르다(different)’고 생각하지 않고, ‘뒤쳐져 있다(inferior or retarded)’고 여기곤 한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여기 고객들도 선진국 소비자들과 비슷한 소비자 행동과 태도를 보일 것이니, 지금 우리 회사가 그들에게 맞출 필요는 없다’고 넘어가는 경우가 없지 않다.
지구촌의 모든 시장들은 점점 유사성이 강해지고 있지만 저개발 시장들의 다양성은 여전히 큰 상황이다. 또 향후 유사성이 더욱 커진다고 하여도 경제 발전에 따라 고객의 취향이 까다로워지고 경쟁이 심화되면서 지역적 특수성이 지금보다 더 뚜렷해질 가능성도 있다.
현지화에 대한 변명
현지 적합형 마케팅이 미흡한 이유로 추가적인 예산이 필요하다는 점을 꼽기도 하지만, 특별히 돈을 들이지 않고 관점의 전환과 꾸준한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현지화의 여지도 많다. 보통 ‘현지화’라고 하면 제품의 현지화를 생각하지만, 제품의 현지화는 마케팅 현지화 또는 현지 적합형 마케팅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우리가 논의하는 현지 적합형 마케팅은 수많은 활동들로 구성되며, 그 중 상당수는 추가적 비용을 요하지 않는다.
Ⅱ. 저개발 시장의 마케팅 포인트
지금부터는 저개발 시장에서 성공하기 위한 마케팅 포인트에 대해 마케팅의 기본 요소들인 제품, 가격, 유통, 커뮤니케이션 관점에서 생각해보기로 한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갈 점은 이 글에서 논의하는 대상은 현지의 주류(Mainstream) 시장을 목표로 하는 제품 및 사업이다. 사치품의 경우 고객의 특성과 구매 고려 요인이 크게 다르기 때문에 논의에서 제외하기로 한다.
한편 이 글에서 다루는 저개발 시장의 범위는 일부 이머징 마켓(Emerging Market)을 포함한 개발도상국(Developing Countries) 시장이다. 중국의 대도시나 러시아 같은 경우 이미 저개발 국가의 소비 패턴에서 벗어났다고 볼 수 있다.
1. 유연한 품질 개념
글로벌 기업들은 저개발국에서도 똑같은 품질을 가진 제품을 판매하고자 한다. 글로벌 브랜드의 이미지를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를 사전에 불식할 수 있는데다 제품 관리도 간단하게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글로벌하게 팔리는 제품이라는 사실을 소재로 하면 커뮤니케이션도 수월해진다.
그러나 막상 현지 고객들은 제품의 품질이 낮더라도 구매 가능한 제품을 원하는 경우가 많다. 본사 기준에서 볼 때 다소 품질이 낮은 제품을 판다고 하더라도 품질에 대한 눈높이가 다른 현지 고객들이 이를 브랜드의 훼손으로 여기는 경우는 드물다.
힌두스탄 유니레버의 휠
인도의 세탁 세제 시장은 고객의 눈높이에 맞춘 상품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는 하나의 표본시장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인도 생활용품 시장의 강자는 힌두스탄 유니레버(Hindustan Unilever)였다. 1970년대 이 회사는 서프(Surf)라는 브랜드의 세탁 세제로 시장을 리드했다. 그러나 실제 이 제품을 구입할 수 있는 소비자들은 소수에 불과했고, 세탁 세제 시장은 어느 브랜드가 리드한다고 이야기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규모가 미미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인도의 로컬 기업이 니르마(Nirma)라는 저가 제품을 내놓았다. 당시 서프 가격의 20%에 불과한 니르마는 불티난 듯 팔렸다. 니르마는 빨래하는 사람의 피부가 손상되는 등 품질과 안정성 측면에 많은 문제가 있었지만, 현지 소비자들에게는 유용한 제품이었다. 힌두스탄 유니레버는 조악한 품질의 니르마를 무시했지만, 니르마는 제품을 개선하면서 꾸준히 성장하여 1982년 인도 세탁 세제 시장의 58%를 점유하게 되었다.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힌두스탄 유니레버는 1980년대말 휠(Wheel)이라는 저가 제품을 내놓게 된다. 이 제품은 ‘서프의 품질과 니르마의 가격을 동시에 달성한다’는 도전적인 목표 하에 개발되었다. 최종적으로 가격은 니르마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기존 서프와 경쟁 제품인 니르마의 중간 수준에서 결정되었다. 품질은 서프보다 낮은 수준이었지만, 대기업으로서의 기본 책무인 소비자의 건강과 환경에 대한 배려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비록 휠이 니르마보다 비싸기는 하지만, 이 가격 수준에서도 글로벌 기업의 생산 방식으로는 마진 확보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이 회사는 전국 각지에 직영 혹은 프랜차이즈 형태로 50개의 소규모 공장을 설립하고, 2,000개의 협력업체를 발굴·교육했으며, 60만개의 소매상을 확보하는 등 다각도의 노력으로 새로운 비즈니스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많은 협력업체와 소매상을 거느리는 것이 얼핏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인건비가 싸고 물류 인프라가 미비했던 1980년대 인도의 상황에서는 다수의 사업 파트너를 확보하려는 것이 효율성 개선에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물론 이는 회사의 관리 역량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이 회사는 영업 관리자 전원을 6~8주씩 지방에 파견하여 현실적인 마케팅 전략을 수립·실행하도록 했는데, 이는 본사의 계획과 현장의 실행 사이에 괴리가 발생하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휠은 히트 상품으로 자리매김하면서 급속히 시장을 장악해 나갔다. 그런데 인도의 경제성장 속도가 빨라지면서 좀 더 좋은 품질의 제품을 찾는 소비자들이 늘어났다. 이에 따라 휠을 사용하던 소비자들이 서프 같은 고급 제품으로 이동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일반적인 우려와는 달리 저가 제품 휠의 출시로 인해 힌두스탄 유니레버의 브랜드가 훼손되는 일이 없었다는 점이다. 즉 힌두스탄 유니레버는 저가 제품으로 고객을 확보한 후 고객의 구매력 증가와 함께 매출을 동반 신장시키는 전략을 효과적으로 실행했다고 볼 수 있다.
아라빈드 안과 병원
최근 의료 서비스 시장에서 두드러진 성공 사례 중 하나는 아라빈드 안과 병원(Aravind Eye Hospital)이다. 이 병원은 연간 230만명의 환자를 진료하고 27만건 이상의 수술을 시행하는 세계에서 가장 큰 안과 병원 체인이다. 이 병원의 특징은 저렴한 진료비와 이를 가능하게 하는 시스템이다. 백내장 수술의 경우 총 비용이 100달러선인데 인도 현지 기준으로도 타 병원보다 저렴한 수준이다. 또한 전체 환자의 30%를 차지하는 극빈층 환자에게는 무료로 시술을 해준다. 그럼에도 이 병원의 이익률은 40%에 달한다.
아라빈드 병원은 인건비가 비싼 의사들의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전체 수술 과정에서 의사가 담당하는 부분을 최소화하였다. 웬만한 일은 선진국 기준으론 ‘비전문 인력’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이 담당한다. 의사 한명이 하루에 100명에 가까운 환자를 시술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병원측은 “의료진의 효율이 타 병원의 500%에 달하는데도 의료 사고율은 평균보다 낮은 편”이라고 자랑한다.
아라빈드는 백내장, 녹내장, 망막, 각막, 소아 안과 등 9개의 전문분야별로 독립적인 클리닉을 운영한다. 이러한 세분화된 클리닉 시스템은 선진국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효율성을 극대화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한편 비싼 의료원자재 값이 저가 병원에게는 큰 부담이 되었다. 예컨대 백내장 수술에서는 인공 수정체가 필요한데, 그 가격이 개당 200~300달러에 달했다. 아라빈드는 오로랩(Aurolab)이라는 자회사를 통해 인공 수정체를 개당 5달러에 공급받음으로써 저가 서비스의 토대를 다졌다. 5달러짜리 인공 수정체의 품질은 선진국 제품보다 다소 떨어지지만 충분히 사용할 만한 수준이 되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다고 한다. 오로랩의 제품은 현재 120개 국가로 수출되며, 세계 시장의 6%를 점유하고 있다.
품질이 조금 낮은 제품이라고 해도 가격이 너무 비싸 써볼 엄두가 나지 않는 제품보다는 낫다는 것이 저개발 국가 환자들의 현실이다. 품질에 대해 매우 높은 기준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여겨지는 의료 서비스 분야에서도 약간의 품질을 낮추는 대신 많은 환자들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 사회적으로는 물론 기업의 입장에서도 바람직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일반적인 제품의 경우에는 보다 더 탄력적이고 유연한 품질 개념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2. 패키지의 현지화
저개발 시장에 적합한 제품은 내용물에 그치지 않는다. 포장도 현지 소비자에 적합하게 개발되고 적용되어야 한다. 저개발 국가의 재래시장이나 가두 점포(Street Market)에 가보면 대부분 제품의 사이즈가 작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1회용 샘플 크기의 샴푸나 로션이 팔리는가 하면, 한 팩에 10개비 밖에 들어 있지 않은 담배도 많다. 냉장고나 에어컨 등 가전제품의 용량 또한 작다.
최적 패키지의 크기는 현지 소비자의 구매력과 주거공간, 운반수단 같은 다양한 요인들의 영향을 받는다. 우리나라 소비자들의 예를 보면 과거 동네 가게에서 소량으로 구입하던 행태에서 벗어나 점점 대량 패키지 위주로 구입하고 있다. 저개발 국가의 소비자들도 장기적으로는 대량 구매로 이행하겠지만, 현 상황에서는 소량 패키지가 더 적합하다. 현지 소비자에게 적합한 소량 패키지 상품 판매는 유가 샘플 배포와 같은 효과도 있어 단기적 매출 효과뿐만 아니라 장기적 관점에서 미래의 소비자를 선점한다는 의미가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품질과 패키지에 대한 사례를 통해 저개발 시장의 소비자가 원하는 것은 선진국 소비자와 분명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차이는 선진국 기업의 눈과 머리로는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이런 맥락에서 글로벌 기업들이 활용하는 소비자 조사는 많은 한계를 지닌다. 현지 소비자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생활 속에 직접 들어가서 심층적으로 관찰하는 민속지(Ethnography)적인 조사 등 새로운 방법이 필요하다.
3. 가격에서 출발하는 제품 컨셉트
많은 인구와 부동산 개발에 대한 갖가지 제약으로 인해 인도의 부동산 가격은 소득수준에 비해 매우 높은 수준이다. 특히 인도 대도시의 호텔 숙박료는 살인적인 수준이다. 웬만한 선진국 호텔보다 더 비싸다. 외국인들도 부담을 느낄 정도이니 현지인들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래서 인도의 많은 비즈니스맨들은 출장을 갈 때 지인의 집이나 여인숙 비슷한 열악한 숙소에서 지내는 경우가 많다.
인디원(IndiOne) 호텔은 현지 고객들이 필요로 하지 않는 가치들을 과감히 제거함으로써 저가이면서도 쾌적한 호텔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미국 고급 모텔 수준의 쾌적함을 30달러에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사업 모델을 정립했다.
호텔업계에는 모름지기 ‘호텔’이라면 넓은 로비, 일정 면적 이상의 객실 등을 갖춰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다. 그러나 인디원 호텔은 철저히 고객 관점에서 필요 없는 부분은 과감히 생략했다. ‘Smart Basics’라는 서비스 브랜드 아래 청결하고 편리하면서도 단순한 호텔을 만들었다. 객실 규모를 과감히 줄이고, 단순한 인테리어를 도입함으로써 객실당 건축비를 줄임은 물론 청소에 소요되는 시간도 크게 단축할 수 있었다.
한편 단순한 인테리어이지만 세련된 디자인 개념을 도입하여 부띠크 호텔과 같은 느낌이 나도록 하여 가격 대비 만족도를 높였다. 또 체크아웃 키오스크(Kiosk)를 설치하여 비즈니스맨들의 시간 낭비를 줄여줬다.
인디원 호텔은 가격을 먼저 정하고, 단순함을 통해 고객가치 창조와 코스트 절감을 동시에 달성했다는 점에서 이케아와 비슷한 점이 있다. 실제 이 호텔의 사진에서 이케아(IKEA)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점이 흥미롭다.
이 호텔은 일본의 비즈니스 호텔과도 유사한 점이 있다. 그러나 비즈니스 호텔이 일반 호텔의 다운그레이드(downgrade) 제품이라는 컨셉트인데 비해, 이 호텔은 처음부터 ‘고객 입장에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를 고민하면서 새로운 카테고리의 호텔을 만들어 내고자 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호텔의 가동률을 높이기 위해 인도의 강점인 뛰어난 IT 기술을 적극 활용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물론 이 사례가 던져주는 가장 의미 있는 시사점은 사업을 개발할 때 가장 먼저 고객이 받아들일 수 있는 가격을 설정하고 그 가격을 달성하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4. 풀뿌리 유통의 효과적 활용
재래 점포의 체계적 관리
할인점으로 대표되는 대규모 유통의 성장은 전세계적인 트렌드이다. 할인점의 대명사인 월마트는 단일 기업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회사이다. 유럽에서도 까르푸, 테스코 등 할인점의 위세가 막강하며, 중국에서는 외국계 대형 유통업체들과 어깨를 겨루며 궈메이(國美) 등 로컬 대형 업체들이 가전 유통을 중심으로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글로벌 기업들은 대형 유통업체들의 성장에 편승해서 자사의 상품 판매를 늘리려는 경향을 보인다. 틀린 전략은 아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전체 시장에서 훨씬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재래 유통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아직도 콜럼비아에서는 맥주의 95%가, 또 멕시코에서는 청량음료의 80%가 동네 가게(Mom&Pop Stores)에서 팔린다.
한편 대형 신유통점이 늘어나는 상황 속에서 재래 유통점의 수 역시 늘어나는 기현상이 보이기도 한다. 대도시의 중산층 거주 지역을 중심으로 대형 점포가 늘어나는 사이에 여기서 밀려난 재래 점포들이 변두리나 지방으로 이전하기 때문이다. 전반적 경제성장의 덕택으로 변두리나 지방에서도 구매력이 증가하여 새로운 소형 점포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는 점도 재래 유통점 증가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멕시코의 경우 월마트의 매출만도 15조원에 달하고 최신 편의점이 7,600개에 달하는 가운데서도 지난 5년간 재래 점포의 숫자가 25%나 증가했다는 사실이 이러한 현상을 잘 보여준다. 매출이 아닌 이용객 수를 기준으로 했을 때 재래 유통의 중요성은 훨씬 더 커진다. 즉 재래 유통은 미래에 좀더 큰 구매력을 갖출 것으로 기대되는 잠재 소비자들에 대한 투자라는 관점에서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재래 점포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가? 국내에서든 저개발 국가에서든 재래 점포에 대해서는 매출 실적과 잠재력에 따라 간판, 진열대 등을 지원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재래 점포의 판매 활동에 대해 구체적으로 교육이나 조언을 하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진열대 배치, 제품 특성 등에 대한 간단한 교육은 시간과 노력을 조금만 할애하면 실행할 수 있는 활동이다. 이 같은 활동은 매출 증대 이외에도 영업 사원과 점포주와의 관계 강화라는 부수적 효과도 가져올 수 있다.
수많은 재래 점포를 똑같은 수단과 노력으로 관리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점포의 중요도와 실적에 따라 관리 수단을 차별화하고, 보상 체계도 달리 가져가야 한다. 현지 점포관리 시스템을 구축할 때 본사 시스템과 프레임워크는 공유하되, 세세한 기준은 현지 상황에 맞게 조정해야 함은 물론이다.
기초 사회 네트워크 활용
저개발 시장에서 강세를 보이는 유통 형태 중 하나가 인적 판매이다. 물리적 유통 채널을 구축하는데 필요한 자본이 부족한 상황에서 인적 판매는 현실성이 높은 유통 대안이다.
인적 판매의 대표적 성공 사례 중 하나는 힌두스탄 유니레버의 샥티(Shakti) 프로그램이다. 농촌 마을을 대상으로 여성 판매 네트워크를 구축한 이 사업을 통해 유니레버는 연간 2억 5,000만 달러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힌두스탄 유니레버는 향후 10년 내에 10만명의 판매 인력을 확충하여 2억 5,000만명을 고객으로 개발하고 이를 통해 이 회사 전체 매출의 20%를 거둘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회사의 매출 증대뿐만 아니라, 별다른 돈벌이 수단이 없는 농촌 여성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사회적으로도 바람직한 모델로 인정받고 있다. 한편 유니레버는 아이샥티(i-Shakti)라는 인터넷 키오스크를 농촌 마을에 설치함으로써 자사의 제품을 홍보함과 동시에 농촌 아이들이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는 기회를 확대시켜 주고 있다.
서비스 산업에서 기초적 사회 네트워크는 과금(Billing)의 단위로 활용되기도 한다. 필리핀의 마닐라 수도회사(Manila Water)는 한때 악성 연체, 무단 연결 등으로 골머리를 앓았다. 이 회사는 일정 단위의 커뮤니티별로 수도를 연결하고 사용요금을 징수함으로써 이 같은 문제를 크게 줄일 수 있었다.
기초적 사회 네트워크를 활용하는 방법은 성공적으로 수행되면 매출 증가와 함께 미래 고객을 확보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지만, 실패할 경우 자칫 사회문제로 비화할 가능성도 있다는 점에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예컨대, 작은 마을에서 강압적인 판매, 불량채권 등의 문제가 대두되면 비즈니스 이슈를 넘어 사회문제가 될 수가 있다. 사회 네트워크 활용에 따른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사업을 성공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현지인들의 복잡한 사회 시스템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5. 신뢰와 확장에 중점을 둔 브랜드 전략
마케팅 커뮤니케이션의 핵심은 브랜드이다. 선진국이든 저개발국이든 어느 곳에서나 브랜드는 중요하다. 똑같은 브랜드를 사용하더라도 상황에 따라 브랜드에 담는 의미를 달리하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 그런데 실제로는 ‘글로벌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통일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저개발 국가들에서도 선진국에서와 동일한 브랜드 커뮤니케이션을 전개하는 경우가 흔하다.
브랜드 이론은 서구 사회를 바탕으로 발전되었기 때문에 저개발 국가의 소비자들에 대한 적합성은 상대적으로 낮다. 현지 지향형 브랜드 전략을 수립하고 실행하기 위해서는 저개발 국가 소비자들의 특성을 제대로 파악하고 반영해야 한다.
브랜드 속성의 핵심은 신뢰
서구와 저개발 국가의 소비자 사회화 과정에는 큰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신뢰(Trust)다. 서구와 같은 고(高)신뢰 사회에서 소비자들은 어떤 상품에 대해서나 일정 수준의 신뢰를 갖게 된다. 그러나 대다수 저개발 국가들이 해당되는 저(低)신뢰 사회의 소비자들은 상품을 평가할 때 일단 의심부터 하는 경향이 있다. 고객은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브랜드에 대한 구매를 주저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독특한 이미지를 풍기는 브랜드라도 일단 신뢰가 가지 않으면 구매하지 않으려 한다. 오랜 기간의 직·간접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소비자 사회화가 이러한 의사결정을 이끄는 것이다.
저신뢰 사회에서는 기업 브랜드 또는 패밀리 브랜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기업 브랜드처럼 커버리지가 넓은 브랜드를 앞세우는 것은 개별 브랜드의 경우보다 명확한 아이덴티티를 전달하기 어려운 반면, 효율적으로 신뢰를 구축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아울러 기업 브랜드에 대한 신뢰라는 우산 아래에서 다양한 개별 브랜드를 출시할 수 있다는 것도 큰 이점이다.
다만 기업 브랜드와 제품 브랜드가 모두 고객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경우에는 제품 브랜드에 대해 우선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을 전개할 수도 있다. 이 경우 개별 제품 브랜드가 소비자의 마음 속에 자리잡게 되면, 이를 패밀리 브랜드로 격상시켜 다른 개별 브랜드들을 포괄하게 할 수도 있다.
신뢰를 바탕으로 한 광범위한 확장
브랜드의 핵심 속성이 신뢰에 있는 경우 브랜드의 광범위한 확장(Extension or Leverage)이 가능하다는 점도 저개발 시장의 마케팅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포인트이다. 전문화된 브랜드에 대한 개념이 정립된 선진국의 소비자들과 달리 저개발 시장의 소비자들은 신뢰하는 브랜드의 전문성에 대해 개의치 않는다.
흔히 마케팅 이론에서는 브랜드 확장(Extension)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시장 상황에 따라서는 과감한 브랜드 확장(Leverage)이 바람직할 수 있다. 저개발 시장이야말로 적극적인 브랜드 확장이 요구되는 시장이다. 선진 시장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저개발 시장에서는 더욱 더 브랜드 전략에 최고경영층이 관여해야 한다.
인도 최대의 기업인 타타(Tata) 그룹은 차(Tea)에서부터 차(Car)까지 생산한다. 이름 자체가 ‘신뢰’를 의미하는 인도의 릴라이언스(Reliance)그룹은 통신, 금융, 에너지, 섬유, 석유화학 등 다양한 사업을 영위하면서 브랜드 파워를 키워가고 있다. 글로벌 기업이 브랜드 다각화를 통해 해당 국가의 재벌과 같은 형태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사전에 굳이 배제할 필요는 없다.
Ⅲ. 제품 마케팅을 넘어서
저개발 시장이 매력적인 이유는 단순히 상품판매를 통해 성장할 수 있다는 점에 그치지 않는다. 회사 자체를 상장시키거나 매각함으로써 이익을 챙길 수 있는 기회 또한 저개발 시장의 매력요인이다. 기업 상장(IPO·Initial Public Offering)의 주 무대는 이제 실리콘 밸리가 아닌 신흥 국가들이다. 올해 초 지분의 10%를 매각한 인도의 릴라이언스 파워의 공모에는 200조원 상당의 돈이 몰렸다. 올해 실시된 신흥 국가 기업의 IPO 가운데 실패 사례로 거론되는 베트남의 사이공맥주회사(SABECO)도 3000억원 상당의 자금을 모았다.
기업 공개나 매각은 신흥국의 대열에 끼이지 못하는 저개발 국가의 기업들에게는 아직 먼 이야기인 것이 사실이다. 거꾸로 생각해보면 저개발 국가들의 기업 공개 향후 본격화될 것이니 만큼 대응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저개발 시장에 진출한 대부분의 기업들은 자사가 취급하는 상품의 마케팅에 초점을 맞추는 바람에 사업 자체의 상장이나 매각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다.
사업이나 기업의 매각에 대비한다면 마케팅의 초점을 개별 제품의 장기적 성장보다 전체 사업의 규모 확대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즉 광범위한 브랜드 확장과 제휴를 통한 사업의 외연 확대 등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개별 제품의 마케팅에 초점을 맞출 때보다 훨씬 더 과감하고 통합적인 활동이 요구된다.
한편 사업이나 기업 자체를 매각을 계획할 경우 본사 브랜드와의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사전에 브랜드 변경 등을 고려해봐야 한다. 매각 또는 분사된 기업이 기존 브랜드를 계속 사용한다면 브랜드의 정체성이 모호해질 수 있고, 또한 매각이나 분사 시점에 바로 브랜드를 바꾸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저개발 시장에 대한 개별 제품 마케팅과 아울러 사업 자체의 매각을 위한 사전 포석도 함께 고려하는 확장된 개념의 저개발 시장 마케팅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저개발 시장에서는 철저히 현지 고객의 눈높이에서 판단하고, 사업 자체의 매각이라는 과감한 선택까지도 열어두는 혁신적 전략이 필요하다. 결국 저개발 시장 마케팅의 키워드는 현지에 적응(Local Adaptation)하면서 기존의 틀을 넘어 폭넓게 생각하는 ‘유연성’이 될 것이다.
- LG Business Insight 991호
< 목 차 >
Ⅰ. 새로운 기회와 진부한 관점
Ⅱ. 저개발 시장의 마케팅 포인트
Ⅲ. 제품 마케팅을 넘어서
Ⅰ. 새로운 기회와 진부한 관점
올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들의 평균 경제성장률은 2%를 밑돌 전망이다. 반면, 저개발 상태를 벗어나고 있는 인도, 브라질 등 BRICs 국가들의 성장률은 6~7% 수준이다. BRICs 국가의 뒤를 이을 것이라고 이야기되는 멕시코, 이집트, 나이지리아, 베트남 등 차세대 신흥국들(Frontier Markets)의 성장률 역시 이와 비슷한 수준이다. 그런데 실제 이들 국가의 쇼핑몰이나 재래시장 같은 실물시장을 살펴 보면, 체감 성장률이 실제 경제성장률 수치보다 더 높게 느껴진다.
시장 성장에 편승해야
체감 성장률과 실제성장률 간에 차이가 나는 원인 중 하나는 불균형 성장이다. 선진국들은 도시와 농촌 간의 성장률 차이가 크지 않지만, 저개발 국가들의 경우 도시의 성장률은 농촌보다 크게 높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도시 지역에서도 구매력이 있는 중·상류층 이상의 소득 성장률이 저소득층보다 더 높은 경우가 흔하다. 즉 현재 글로벌 기업들의 타깃이 되는 중급 이상의 제품이나 서비스 시장은 통계로 공표되는 경제성장률보다 더 빨리 성장하고 있으며, 기회는 그 만큼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저개발 국가의 저소득층이나 농촌 지역의 소비자들도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다. 중국 정부는 농촌 지역의 발전을 위해 갖가지 대책을 내놓고 있다. 여타 저개발 국가들 중에서도 성장 잠재력이 높은 국가의 경우 시차를 두고 도시의 중산층 이하 계층과 농촌 지역의 구매력도 빠르게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렇게 볼 때, 글로벌 기업으로서는 잠재력 있는 저개발 시장의 성장에 편승하기만 해도 선진 시장에서의 성장률 이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시장의 성장에 편승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라는 점이다. 웬만한 저개발 시장에는 여러 글로벌 업체들이 이미 들어와 있고, 나름의 경쟁력을 갖춘 로컬 업체들도 버티고 있어 이들 시장의 특성에 효과적으로 대응해야만 최소한 시장 성장률 수준으로 커나갈 수 있다. 그런데 저개발 시장에서 효과적으로 마케팅을 펼쳐나가는 데 있어서는 현지 지향형 관점이 부족하다는 점이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저개발 시장 소비자를 보는 눈
글로벌 업체들은 저개발 시장의 소비자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의 취향이나 제품 선택 기준은 선진국 소비자들과 차이가 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글로벌 기업들은 그 차이를 단순히 ‘다르다(different)’고 생각하지 않고, ‘뒤쳐져 있다(inferior or retarded)’고 여기곤 한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여기 고객들도 선진국 소비자들과 비슷한 소비자 행동과 태도를 보일 것이니, 지금 우리 회사가 그들에게 맞출 필요는 없다’고 넘어가는 경우가 없지 않다.
지구촌의 모든 시장들은 점점 유사성이 강해지고 있지만 저개발 시장들의 다양성은 여전히 큰 상황이다. 또 향후 유사성이 더욱 커진다고 하여도 경제 발전에 따라 고객의 취향이 까다로워지고 경쟁이 심화되면서 지역적 특수성이 지금보다 더 뚜렷해질 가능성도 있다.
현지화에 대한 변명
현지 적합형 마케팅이 미흡한 이유로 추가적인 예산이 필요하다는 점을 꼽기도 하지만, 특별히 돈을 들이지 않고 관점의 전환과 꾸준한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현지화의 여지도 많다. 보통 ‘현지화’라고 하면 제품의 현지화를 생각하지만, 제품의 현지화는 마케팅 현지화 또는 현지 적합형 마케팅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우리가 논의하는 현지 적합형 마케팅은 수많은 활동들로 구성되며, 그 중 상당수는 추가적 비용을 요하지 않는다.
Ⅱ. 저개발 시장의 마케팅 포인트
지금부터는 저개발 시장에서 성공하기 위한 마케팅 포인트에 대해 마케팅의 기본 요소들인 제품, 가격, 유통, 커뮤니케이션 관점에서 생각해보기로 한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갈 점은 이 글에서 논의하는 대상은 현지의 주류(Mainstream) 시장을 목표로 하는 제품 및 사업이다. 사치품의 경우 고객의 특성과 구매 고려 요인이 크게 다르기 때문에 논의에서 제외하기로 한다.
한편 이 글에서 다루는 저개발 시장의 범위는 일부 이머징 마켓(Emerging Market)을 포함한 개발도상국(Developing Countries) 시장이다. 중국의 대도시나 러시아 같은 경우 이미 저개발 국가의 소비 패턴에서 벗어났다고 볼 수 있다.
1. 유연한 품질 개념
글로벌 기업들은 저개발국에서도 똑같은 품질을 가진 제품을 판매하고자 한다. 글로벌 브랜드의 이미지를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를 사전에 불식할 수 있는데다 제품 관리도 간단하게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글로벌하게 팔리는 제품이라는 사실을 소재로 하면 커뮤니케이션도 수월해진다.
그러나 막상 현지 고객들은 제품의 품질이 낮더라도 구매 가능한 제품을 원하는 경우가 많다. 본사 기준에서 볼 때 다소 품질이 낮은 제품을 판다고 하더라도 품질에 대한 눈높이가 다른 현지 고객들이 이를 브랜드의 훼손으로 여기는 경우는 드물다.
힌두스탄 유니레버의 휠
인도의 세탁 세제 시장은 고객의 눈높이에 맞춘 상품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는 하나의 표본시장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인도 생활용품 시장의 강자는 힌두스탄 유니레버(Hindustan Unilever)였다. 1970년대 이 회사는 서프(Surf)라는 브랜드의 세탁 세제로 시장을 리드했다. 그러나 실제 이 제품을 구입할 수 있는 소비자들은 소수에 불과했고, 세탁 세제 시장은 어느 브랜드가 리드한다고 이야기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규모가 미미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인도의 로컬 기업이 니르마(Nirma)라는 저가 제품을 내놓았다. 당시 서프 가격의 20%에 불과한 니르마는 불티난 듯 팔렸다. 니르마는 빨래하는 사람의 피부가 손상되는 등 품질과 안정성 측면에 많은 문제가 있었지만, 현지 소비자들에게는 유용한 제품이었다. 힌두스탄 유니레버는 조악한 품질의 니르마를 무시했지만, 니르마는 제품을 개선하면서 꾸준히 성장하여 1982년 인도 세탁 세제 시장의 58%를 점유하게 되었다.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힌두스탄 유니레버는 1980년대말 휠(Wheel)이라는 저가 제품을 내놓게 된다. 이 제품은 ‘서프의 품질과 니르마의 가격을 동시에 달성한다’는 도전적인 목표 하에 개발되었다. 최종적으로 가격은 니르마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기존 서프와 경쟁 제품인 니르마의 중간 수준에서 결정되었다. 품질은 서프보다 낮은 수준이었지만, 대기업으로서의 기본 책무인 소비자의 건강과 환경에 대한 배려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비록 휠이 니르마보다 비싸기는 하지만, 이 가격 수준에서도 글로벌 기업의 생산 방식으로는 마진 확보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이 회사는 전국 각지에 직영 혹은 프랜차이즈 형태로 50개의 소규모 공장을 설립하고, 2,000개의 협력업체를 발굴·교육했으며, 60만개의 소매상을 확보하는 등 다각도의 노력으로 새로운 비즈니스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많은 협력업체와 소매상을 거느리는 것이 얼핏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인건비가 싸고 물류 인프라가 미비했던 1980년대 인도의 상황에서는 다수의 사업 파트너를 확보하려는 것이 효율성 개선에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물론 이는 회사의 관리 역량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이 회사는 영업 관리자 전원을 6~8주씩 지방에 파견하여 현실적인 마케팅 전략을 수립·실행하도록 했는데, 이는 본사의 계획과 현장의 실행 사이에 괴리가 발생하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휠은 히트 상품으로 자리매김하면서 급속히 시장을 장악해 나갔다. 그런데 인도의 경제성장 속도가 빨라지면서 좀 더 좋은 품질의 제품을 찾는 소비자들이 늘어났다. 이에 따라 휠을 사용하던 소비자들이 서프 같은 고급 제품으로 이동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일반적인 우려와는 달리 저가 제품 휠의 출시로 인해 힌두스탄 유니레버의 브랜드가 훼손되는 일이 없었다는 점이다. 즉 힌두스탄 유니레버는 저가 제품으로 고객을 확보한 후 고객의 구매력 증가와 함께 매출을 동반 신장시키는 전략을 효과적으로 실행했다고 볼 수 있다.
아라빈드 안과 병원
최근 의료 서비스 시장에서 두드러진 성공 사례 중 하나는 아라빈드 안과 병원(Aravind Eye Hospital)이다. 이 병원은 연간 230만명의 환자를 진료하고 27만건 이상의 수술을 시행하는 세계에서 가장 큰 안과 병원 체인이다. 이 병원의 특징은 저렴한 진료비와 이를 가능하게 하는 시스템이다. 백내장 수술의 경우 총 비용이 100달러선인데 인도 현지 기준으로도 타 병원보다 저렴한 수준이다. 또한 전체 환자의 30%를 차지하는 극빈층 환자에게는 무료로 시술을 해준다. 그럼에도 이 병원의 이익률은 40%에 달한다.
아라빈드 병원은 인건비가 비싼 의사들의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전체 수술 과정에서 의사가 담당하는 부분을 최소화하였다. 웬만한 일은 선진국 기준으론 ‘비전문 인력’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이 담당한다. 의사 한명이 하루에 100명에 가까운 환자를 시술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병원측은 “의료진의 효율이 타 병원의 500%에 달하는데도 의료 사고율은 평균보다 낮은 편”이라고 자랑한다.
아라빈드는 백내장, 녹내장, 망막, 각막, 소아 안과 등 9개의 전문분야별로 독립적인 클리닉을 운영한다. 이러한 세분화된 클리닉 시스템은 선진국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효율성을 극대화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한편 비싼 의료원자재 값이 저가 병원에게는 큰 부담이 되었다. 예컨대 백내장 수술에서는 인공 수정체가 필요한데, 그 가격이 개당 200~300달러에 달했다. 아라빈드는 오로랩(Aurolab)이라는 자회사를 통해 인공 수정체를 개당 5달러에 공급받음으로써 저가 서비스의 토대를 다졌다. 5달러짜리 인공 수정체의 품질은 선진국 제품보다 다소 떨어지지만 충분히 사용할 만한 수준이 되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다고 한다. 오로랩의 제품은 현재 120개 국가로 수출되며, 세계 시장의 6%를 점유하고 있다.
품질이 조금 낮은 제품이라고 해도 가격이 너무 비싸 써볼 엄두가 나지 않는 제품보다는 낫다는 것이 저개발 국가 환자들의 현실이다. 품질에 대해 매우 높은 기준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여겨지는 의료 서비스 분야에서도 약간의 품질을 낮추는 대신 많은 환자들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 사회적으로는 물론 기업의 입장에서도 바람직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일반적인 제품의 경우에는 보다 더 탄력적이고 유연한 품질 개념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2. 패키지의 현지화
저개발 시장에 적합한 제품은 내용물에 그치지 않는다. 포장도 현지 소비자에 적합하게 개발되고 적용되어야 한다. 저개발 국가의 재래시장이나 가두 점포(Street Market)에 가보면 대부분 제품의 사이즈가 작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1회용 샘플 크기의 샴푸나 로션이 팔리는가 하면, 한 팩에 10개비 밖에 들어 있지 않은 담배도 많다. 냉장고나 에어컨 등 가전제품의 용량 또한 작다.
최적 패키지의 크기는 현지 소비자의 구매력과 주거공간, 운반수단 같은 다양한 요인들의 영향을 받는다. 우리나라 소비자들의 예를 보면 과거 동네 가게에서 소량으로 구입하던 행태에서 벗어나 점점 대량 패키지 위주로 구입하고 있다. 저개발 국가의 소비자들도 장기적으로는 대량 구매로 이행하겠지만, 현 상황에서는 소량 패키지가 더 적합하다. 현지 소비자에게 적합한 소량 패키지 상품 판매는 유가 샘플 배포와 같은 효과도 있어 단기적 매출 효과뿐만 아니라 장기적 관점에서 미래의 소비자를 선점한다는 의미가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품질과 패키지에 대한 사례를 통해 저개발 시장의 소비자가 원하는 것은 선진국 소비자와 분명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차이는 선진국 기업의 눈과 머리로는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이런 맥락에서 글로벌 기업들이 활용하는 소비자 조사는 많은 한계를 지닌다. 현지 소비자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생활 속에 직접 들어가서 심층적으로 관찰하는 민속지(Ethnography)적인 조사 등 새로운 방법이 필요하다.
3. 가격에서 출발하는 제품 컨셉트
많은 인구와 부동산 개발에 대한 갖가지 제약으로 인해 인도의 부동산 가격은 소득수준에 비해 매우 높은 수준이다. 특히 인도 대도시의 호텔 숙박료는 살인적인 수준이다. 웬만한 선진국 호텔보다 더 비싸다. 외국인들도 부담을 느낄 정도이니 현지인들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래서 인도의 많은 비즈니스맨들은 출장을 갈 때 지인의 집이나 여인숙 비슷한 열악한 숙소에서 지내는 경우가 많다.
인디원(IndiOne) 호텔은 현지 고객들이 필요로 하지 않는 가치들을 과감히 제거함으로써 저가이면서도 쾌적한 호텔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미국 고급 모텔 수준의 쾌적함을 30달러에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사업 모델을 정립했다.
호텔업계에는 모름지기 ‘호텔’이라면 넓은 로비, 일정 면적 이상의 객실 등을 갖춰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다. 그러나 인디원 호텔은 철저히 고객 관점에서 필요 없는 부분은 과감히 생략했다. ‘Smart Basics’라는 서비스 브랜드 아래 청결하고 편리하면서도 단순한 호텔을 만들었다. 객실 규모를 과감히 줄이고, 단순한 인테리어를 도입함으로써 객실당 건축비를 줄임은 물론 청소에 소요되는 시간도 크게 단축할 수 있었다.
한편 단순한 인테리어이지만 세련된 디자인 개념을 도입하여 부띠크 호텔과 같은 느낌이 나도록 하여 가격 대비 만족도를 높였다. 또 체크아웃 키오스크(Kiosk)를 설치하여 비즈니스맨들의 시간 낭비를 줄여줬다.
인디원 호텔은 가격을 먼저 정하고, 단순함을 통해 고객가치 창조와 코스트 절감을 동시에 달성했다는 점에서 이케아와 비슷한 점이 있다. 실제 이 호텔의 사진에서 이케아(IKEA)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점이 흥미롭다.
이 호텔은 일본의 비즈니스 호텔과도 유사한 점이 있다. 그러나 비즈니스 호텔이 일반 호텔의 다운그레이드(downgrade) 제품이라는 컨셉트인데 비해, 이 호텔은 처음부터 ‘고객 입장에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를 고민하면서 새로운 카테고리의 호텔을 만들어 내고자 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호텔의 가동률을 높이기 위해 인도의 강점인 뛰어난 IT 기술을 적극 활용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물론 이 사례가 던져주는 가장 의미 있는 시사점은 사업을 개발할 때 가장 먼저 고객이 받아들일 수 있는 가격을 설정하고 그 가격을 달성하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4. 풀뿌리 유통의 효과적 활용
재래 점포의 체계적 관리
할인점으로 대표되는 대규모 유통의 성장은 전세계적인 트렌드이다. 할인점의 대명사인 월마트는 단일 기업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회사이다. 유럽에서도 까르푸, 테스코 등 할인점의 위세가 막강하며, 중국에서는 외국계 대형 유통업체들과 어깨를 겨루며 궈메이(國美) 등 로컬 대형 업체들이 가전 유통을 중심으로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글로벌 기업들은 대형 유통업체들의 성장에 편승해서 자사의 상품 판매를 늘리려는 경향을 보인다. 틀린 전략은 아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전체 시장에서 훨씬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재래 유통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아직도 콜럼비아에서는 맥주의 95%가, 또 멕시코에서는 청량음료의 80%가 동네 가게(Mom&Pop Stores)에서 팔린다.
한편 대형 신유통점이 늘어나는 상황 속에서 재래 유통점의 수 역시 늘어나는 기현상이 보이기도 한다. 대도시의 중산층 거주 지역을 중심으로 대형 점포가 늘어나는 사이에 여기서 밀려난 재래 점포들이 변두리나 지방으로 이전하기 때문이다. 전반적 경제성장의 덕택으로 변두리나 지방에서도 구매력이 증가하여 새로운 소형 점포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는 점도 재래 유통점 증가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멕시코의 경우 월마트의 매출만도 15조원에 달하고 최신 편의점이 7,600개에 달하는 가운데서도 지난 5년간 재래 점포의 숫자가 25%나 증가했다는 사실이 이러한 현상을 잘 보여준다. 매출이 아닌 이용객 수를 기준으로 했을 때 재래 유통의 중요성은 훨씬 더 커진다. 즉 재래 유통은 미래에 좀더 큰 구매력을 갖출 것으로 기대되는 잠재 소비자들에 대한 투자라는 관점에서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재래 점포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가? 국내에서든 저개발 국가에서든 재래 점포에 대해서는 매출 실적과 잠재력에 따라 간판, 진열대 등을 지원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재래 점포의 판매 활동에 대해 구체적으로 교육이나 조언을 하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진열대 배치, 제품 특성 등에 대한 간단한 교육은 시간과 노력을 조금만 할애하면 실행할 수 있는 활동이다. 이 같은 활동은 매출 증대 이외에도 영업 사원과 점포주와의 관계 강화라는 부수적 효과도 가져올 수 있다.
수많은 재래 점포를 똑같은 수단과 노력으로 관리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점포의 중요도와 실적에 따라 관리 수단을 차별화하고, 보상 체계도 달리 가져가야 한다. 현지 점포관리 시스템을 구축할 때 본사 시스템과 프레임워크는 공유하되, 세세한 기준은 현지 상황에 맞게 조정해야 함은 물론이다.
기초 사회 네트워크 활용
저개발 시장에서 강세를 보이는 유통 형태 중 하나가 인적 판매이다. 물리적 유통 채널을 구축하는데 필요한 자본이 부족한 상황에서 인적 판매는 현실성이 높은 유통 대안이다.
인적 판매의 대표적 성공 사례 중 하나는 힌두스탄 유니레버의 샥티(Shakti) 프로그램이다. 농촌 마을을 대상으로 여성 판매 네트워크를 구축한 이 사업을 통해 유니레버는 연간 2억 5,000만 달러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힌두스탄 유니레버는 향후 10년 내에 10만명의 판매 인력을 확충하여 2억 5,000만명을 고객으로 개발하고 이를 통해 이 회사 전체 매출의 20%를 거둘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회사의 매출 증대뿐만 아니라, 별다른 돈벌이 수단이 없는 농촌 여성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사회적으로도 바람직한 모델로 인정받고 있다. 한편 유니레버는 아이샥티(i-Shakti)라는 인터넷 키오스크를 농촌 마을에 설치함으로써 자사의 제품을 홍보함과 동시에 농촌 아이들이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는 기회를 확대시켜 주고 있다.
서비스 산업에서 기초적 사회 네트워크는 과금(Billing)의 단위로 활용되기도 한다. 필리핀의 마닐라 수도회사(Manila Water)는 한때 악성 연체, 무단 연결 등으로 골머리를 앓았다. 이 회사는 일정 단위의 커뮤니티별로 수도를 연결하고 사용요금을 징수함으로써 이 같은 문제를 크게 줄일 수 있었다.
기초적 사회 네트워크를 활용하는 방법은 성공적으로 수행되면 매출 증가와 함께 미래 고객을 확보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지만, 실패할 경우 자칫 사회문제로 비화할 가능성도 있다는 점에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예컨대, 작은 마을에서 강압적인 판매, 불량채권 등의 문제가 대두되면 비즈니스 이슈를 넘어 사회문제가 될 수가 있다. 사회 네트워크 활용에 따른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사업을 성공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현지인들의 복잡한 사회 시스템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5. 신뢰와 확장에 중점을 둔 브랜드 전략
마케팅 커뮤니케이션의 핵심은 브랜드이다. 선진국이든 저개발국이든 어느 곳에서나 브랜드는 중요하다. 똑같은 브랜드를 사용하더라도 상황에 따라 브랜드에 담는 의미를 달리하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 그런데 실제로는 ‘글로벌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통일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저개발 국가들에서도 선진국에서와 동일한 브랜드 커뮤니케이션을 전개하는 경우가 흔하다.
브랜드 이론은 서구 사회를 바탕으로 발전되었기 때문에 저개발 국가의 소비자들에 대한 적합성은 상대적으로 낮다. 현지 지향형 브랜드 전략을 수립하고 실행하기 위해서는 저개발 국가 소비자들의 특성을 제대로 파악하고 반영해야 한다.
브랜드 속성의 핵심은 신뢰
서구와 저개발 국가의 소비자 사회화 과정에는 큰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신뢰(Trust)다. 서구와 같은 고(高)신뢰 사회에서 소비자들은 어떤 상품에 대해서나 일정 수준의 신뢰를 갖게 된다. 그러나 대다수 저개발 국가들이 해당되는 저(低)신뢰 사회의 소비자들은 상품을 평가할 때 일단 의심부터 하는 경향이 있다. 고객은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브랜드에 대한 구매를 주저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독특한 이미지를 풍기는 브랜드라도 일단 신뢰가 가지 않으면 구매하지 않으려 한다. 오랜 기간의 직·간접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소비자 사회화가 이러한 의사결정을 이끄는 것이다.
저신뢰 사회에서는 기업 브랜드 또는 패밀리 브랜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기업 브랜드처럼 커버리지가 넓은 브랜드를 앞세우는 것은 개별 브랜드의 경우보다 명확한 아이덴티티를 전달하기 어려운 반면, 효율적으로 신뢰를 구축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아울러 기업 브랜드에 대한 신뢰라는 우산 아래에서 다양한 개별 브랜드를 출시할 수 있다는 것도 큰 이점이다.
다만 기업 브랜드와 제품 브랜드가 모두 고객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경우에는 제품 브랜드에 대해 우선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을 전개할 수도 있다. 이 경우 개별 제품 브랜드가 소비자의 마음 속에 자리잡게 되면, 이를 패밀리 브랜드로 격상시켜 다른 개별 브랜드들을 포괄하게 할 수도 있다.
신뢰를 바탕으로 한 광범위한 확장
브랜드의 핵심 속성이 신뢰에 있는 경우 브랜드의 광범위한 확장(Extension or Leverage)이 가능하다는 점도 저개발 시장의 마케팅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포인트이다. 전문화된 브랜드에 대한 개념이 정립된 선진국의 소비자들과 달리 저개발 시장의 소비자들은 신뢰하는 브랜드의 전문성에 대해 개의치 않는다.
흔히 마케팅 이론에서는 브랜드 확장(Extension)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시장 상황에 따라서는 과감한 브랜드 확장(Leverage)이 바람직할 수 있다. 저개발 시장이야말로 적극적인 브랜드 확장이 요구되는 시장이다. 선진 시장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저개발 시장에서는 더욱 더 브랜드 전략에 최고경영층이 관여해야 한다.
인도 최대의 기업인 타타(Tata) 그룹은 차(Tea)에서부터 차(Car)까지 생산한다. 이름 자체가 ‘신뢰’를 의미하는 인도의 릴라이언스(Reliance)그룹은 통신, 금융, 에너지, 섬유, 석유화학 등 다양한 사업을 영위하면서 브랜드 파워를 키워가고 있다. 글로벌 기업이 브랜드 다각화를 통해 해당 국가의 재벌과 같은 형태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사전에 굳이 배제할 필요는 없다.
Ⅲ. 제품 마케팅을 넘어서
저개발 시장이 매력적인 이유는 단순히 상품판매를 통해 성장할 수 있다는 점에 그치지 않는다. 회사 자체를 상장시키거나 매각함으로써 이익을 챙길 수 있는 기회 또한 저개발 시장의 매력요인이다. 기업 상장(IPO·Initial Public Offering)의 주 무대는 이제 실리콘 밸리가 아닌 신흥 국가들이다. 올해 초 지분의 10%를 매각한 인도의 릴라이언스 파워의 공모에는 200조원 상당의 돈이 몰렸다. 올해 실시된 신흥 국가 기업의 IPO 가운데 실패 사례로 거론되는 베트남의 사이공맥주회사(SABECO)도 3000억원 상당의 자금을 모았다.
기업 공개나 매각은 신흥국의 대열에 끼이지 못하는 저개발 국가의 기업들에게는 아직 먼 이야기인 것이 사실이다. 거꾸로 생각해보면 저개발 국가들의 기업 공개 향후 본격화될 것이니 만큼 대응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저개발 시장에 진출한 대부분의 기업들은 자사가 취급하는 상품의 마케팅에 초점을 맞추는 바람에 사업 자체의 상장이나 매각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다.
사업이나 기업의 매각에 대비한다면 마케팅의 초점을 개별 제품의 장기적 성장보다 전체 사업의 규모 확대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즉 광범위한 브랜드 확장과 제휴를 통한 사업의 외연 확대 등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개별 제품의 마케팅에 초점을 맞출 때보다 훨씬 더 과감하고 통합적인 활동이 요구된다.
한편 사업이나 기업 자체를 매각을 계획할 경우 본사 브랜드와의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사전에 브랜드 변경 등을 고려해봐야 한다. 매각 또는 분사된 기업이 기존 브랜드를 계속 사용한다면 브랜드의 정체성이 모호해질 수 있고, 또한 매각이나 분사 시점에 바로 브랜드를 바꾸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저개발 시장에 대한 개별 제품 마케팅과 아울러 사업 자체의 매각을 위한 사전 포석도 함께 고려하는 확장된 개념의 저개발 시장 마케팅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저개발 시장에서는 철저히 현지 고객의 눈높이에서 판단하고, 사업 자체의 매각이라는 과감한 선택까지도 열어두는 혁신적 전략이 필요하다. 결국 저개발 시장 마케팅의 키워드는 현지에 적응(Local Adaptation)하면서 기존의 틀을 넘어 폭넓게 생각하는 ‘유연성’이 될 것이다.
- LG Business Insight 99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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